스무 살 어느 날, 건물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척추 신경이 끊어졌으나 다시 걸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1년여 동안 세 번 수술에 고통스런 재활 치료를 받았으나 목발과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게 됐다. 장애인이 된 삶은 180도 달라졌다. 퇴원해보니 세상에 ‘나 혼자’ 서있었다. 모든 불행이 내 앞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10여 년 동안 스스로 움츠려 세상을 향한 원망으로 살았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그의 앞에 예쁘게 커가는 딸들이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인생을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지난해 겨울, 평창 장애인 올림픽에서 노르딕스키 7개 종목에 출전, 역경을 딛고 완주해낸 이도연 선수(47) 이야기다. 그의 평창올림픽 성적은 중하위권. 그래도 그는 더없이 행복해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잖아요. 나이도 많고. 제 목표가 꼴찌는 하지 말자 어떤 상황에서든 완주는 하자는 것이었어요. 최선을 다했고, 목표도 이루었으니 더 이상 바랄게 없었죠.”
여름에는 핸드사이클로, 겨울에는 노르딕스키로 세상과 맞서는 그의 삶은 경이롭다. 1년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혹은 설원에서 보내는 그의 도전 정신은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궁금했다.
지난 연말 전화를 했으나 그는 해외 전지훈련 중이었다. 연초에 다시 연락을 했다. 주말에 다시 합숙훈련에 들어간다는 그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 늦깎이 대학생인 그는 해외훈련으로 놓친 기말고사를 따로 치르고 오는 중이었다. 그는 평택에 있는 한국복지대학교 장애인 레저스포츠학과 1학년이다. 부족함이 너무 많아 대학을 들어갔다는 그는 걱정했던 것보다 시험을 잘 본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어려워 인터뷰를 하기 전 그의 집 근처 놀이터에서 사진부터 찍었다. 번거로울까 걱정했더니 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생스럽지 않아요. 조금 불편할 뿐이죠.”
-훈련은 어디서 하셨습니까.
“핀란드에서 했어요. 11월 6일에 출발해 12월 28일에 돌아왔습니다.”
-짧지 않았군요. 해외 전지훈련은 처음인가요.
“동계 올림픽을 위해 2017년부터 다녔어요. 2016년에 스키를 시작했는데 이듬해 1월부터 경기에 참여했었거든요.”
-겨울 종목은 더 힘든 운동일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힘들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힘든 과정을 즐기자고 마음먹으니 고통이 좀 덜어지더군요.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주말에 다시 훈련 들어가신다면서요.
“겨울에는 평창 훈련이 계속되거든요. 1월 훈련이 끝나면 나왔다가 2월에 다시 들어가죠.”
-지금 활동하시는 주 종목이 핸드 사이클 아닌가요.
“맞아요. 겨울에는 노르딕스키를, 봄부터는 핸드 사이클 훈련을 합니다. 내년에는 도쿄 장애인올림픽이 있어서 올해는 그 준비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요.”
-내년 8월이던가요. 도쿄 올림픽까지 1년 반 정도 남았군요.
“제 주 종목이 핸드사이클이잖아요. 사실 내년 도쿄올림픽은 제 최종 목표이기도해요. 꼭 금메달을 따고 싶거든요. 그래서 동계훈련을 하면서도 사이클에 필요한 훈련을 틈틈이 하고 있어요.”
-국가대표 선수인데 사이클은 개인적으로 훈련을 하십니까.
“소속된 실업팀이 없으니까요. 국가대표 훈련은 참여하지만 1년 내내 훈련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실업팀에 소속되어 직업적으로 선수가 되면 1년 내내 훈련을 할 수 있지만 국가대표훈련이 없는 시간은 개인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운동은 특히 지속적인 훈련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렇죠. 모든 종목이 그렇습니다. 특히 제가 하는 핸드사이클은 두 팔로 사이클 바퀴를 돌려 달리는 운동인데 훈련을 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십상이거든요. 개인적으로라도 훈련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핸드사이클 실업팀이 없습니까.
“아직 없어요. 전라북도는 장애인 종목 실업팀 자체가 아예 없고요. 대신 우수선수 지원 제도가 있어요. 바람으로는 실업팀이 있으면 좋겠는데 더 많은 선수들에게 지원이 돌아가게 한다는 취지도 좋은 점이 있으니 개인적인 욕심만 내세울 수도 없는 일이예요. 작년쯤 다른 지역에서 실업팀 제의를 했는데 여건도 그렇고, 이전에 경기도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고향을 떠나 있었는데 또 타지 소속이 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거절했어요. 없던 일이 되었죠.”
-지금 바람은 실업팀 소속이 되는 것이겠군요.
“더도 말고 도쿄 올림픽까지라도 본격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좋은 지도자를 만나 제대로 훈련하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만 된다면 금메달을 걸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핸드 사이클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탁구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마음먹어도 온종일 앉아서 지내야 하는 일상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생활이 곤궁하니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받아 했어요. 그러니 신경은 예민해지고 가슴에 화만 쌓이는 것 같았어요. 주위의 권유로 탁구를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몸을 움직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날아갈 것 같았어요. 운동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한 통로였어요.”
-육상선수로도 활동하셨죠. 한국 신기록을 세운 종목이 어떤 것입니까.
“투포환 종목이에요.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포환던지기. 모두 한국 신기록을 바꾸었지요.”
-그런데 왜 종목을 다시 바꾸셨습니까.
“운동을 시작한 이유를 다시 돌아보면서부터였어요. 운동을 통해 나를 극복하고 싶었거든요. 나와의 싸움……. 그래서 탁구에서 육상으로 바꾸고 다시 핸드 사이클로 바꾸게 된 것 같아요. 노르딕스키에 도전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핸드사이클과 노르딕스키를 병행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경기 형식과 성격이 전혀 다르니 정말 힘든 과정일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지만 외국 선수들은 복수의 종목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선수들을 보면서 저도 도전하고 싶었어요. 결국은 이러한 과정 자체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고 장애를 극복하는 일이니까요.”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장애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고를 당해 다시는 혼자 설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는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또 다른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세상을 두 번 살고 있다고 할까요. 이전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죠. 인생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갖게 되었으니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것. 늘 마음속으로 다지는 생각입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절망스러웠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던 그 당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체적인 한계를 절감해야 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애가 나에게 주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또 용기를 내고 힘을 내어 한걸음 나가고 또 다시 절망과 맞닥뜨리면 또 힘을 내어 한걸음 나가는 그 과정들이 정말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도 모든 과정이 그렇잖아요. 지금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가면 쉽고 편한 시간과 공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으로 절망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도 똑같지요.”
-말씀을 듣다보니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운동이 길었던 절망의 시간을 극복하게 해준 계기였겠습니다.
“그렇죠. 운동은 제게 새로운 인생을 안겨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는 종교를 만나게 된 것이에요. 딸아이와 가장 힘들었을 때 찾아간 원불교에서 위안을 받고 삶의 힘을 얻었거든요. 그때부터 세상을 향한 원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었어요.”
-그렇게 행복을 안겨준 운동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생각으로는 쉰 살이 넘어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일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체력적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거든요.(웃음) 체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부모님이 주신 선물이겠죠. 노르딕스키 종목에서는 제가 나이 많은 순서로 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만 그렇다고 경기에 뒤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바람으로는 할 수 있는 나이까지 현장에서 뛰고 싶죠.”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내며 운동을 하는 이유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 말고 또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 꿈은 좀 더 나이가 들면 저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이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겪어보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찾으면 희망이 보이거든요. 내 안에 있는 능력, 재능, 해보려는 의지를 찾으려하지 않고 내가 갖지 못한 여건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망과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내가 겪었던 절망의 시간과 그 절망을 극복해낸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용기를 주는 일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운동을 시작하면서 만난 세상은 정말 새로웠어요. 삶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거든요. 저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나온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더 훌륭한 선수를 일찍 가질 수 있었을 텐데요.(웃음)
“그렇긴 하지만 그것 역시 욕심일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이라도 이것을 깨우쳤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합니다. 장애는 내가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할 것일 뿐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시간 또한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요리공부를 하고 있다는 둘째 딸이었다. 그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 대화 또한 남달랐다. 훈련하느라 대회 출전하느라 1년에 두세 번 만나게 되는 세 딸의 존재는 그에게 각별하다. 그 스스로 ‘나에게 아이들이 생명줄이었다’고 했듯이 그의 삶을 일으켜 세운 것은 아이들이었다. 큰딸은 검찰공무원이 됐고, 대학 재학 중인 막내딸은 공무원시험에 이미 합격했단다. 그는 엄마의 도움 없이도 잘 커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그 또한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제게 스승이에요. 늘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죠.”
어려움 시간 속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궁금했다.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해주었어요. 무엇이든 자신들이 선택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 또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거든요.”
하반신 장애 딛고 사이클과 노르딕스키 국가대표로 우뚝 선 철인
이도연 선수는 정읍이 고향이다. 1972년생. 맏딸에 남동생만 셋인 그는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체격이 좋고 달리기나 배구 등 운동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언제부턴가 제복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됐다. 그래서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군인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익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으로, 어머니는 식당일로 번 돈으로 근근이 4남매를 키우면서도 자식들 뒷바라지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았다. 군인이 되는 대신 간호사가 되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실패하고 간호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사고가 났다. 건물 옥상에서 실수로 떨어진 그에게 안겨진 것은 척추장애. 그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1년 반 동안 세 번의 수술과 고통스런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재활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담을 쌓았다.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마음을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이듬해 운명처럼 남편을 만나 세 딸을 낳았으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과 헤어지면서 어린 세 딸을 모두 껴안았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엄청난 고난이었다. 포장, 전자제품 부품 조립, 양말 뜨기 등 앉아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그의 생업이 됐다. 줄곧 함께 살아온 친정 부모님이 고통을 덜어주었지만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은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이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던 것은 예쁘게 커가는 세 딸이었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장애를 가진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자랑스럽게 여겼다. 검찰공무원이 된 큰딸은 엄마의 삶을 언젠가는 글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30대 초반, 원불교를 만나면서 세상을 더 새롭게 보게 됐다. 설법을 듣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즈음 운동을 시작했다. 2006년 굳었던 몸을 일으켜낸 것은 탁구였다. 국내외 원정경기까지 나다녔을 정도로 재미를 붙여 몰두했지만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는 운동’에 더 마음이 갔다. 육상종목으로 바꾼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초 휠체어 육상 달리기를 하고 싶었으나 투포환을 권유받고 선수가 됐다. 마흔 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이 종목에서도 그는 타고난 재능을 보여 투척 세 종목 모두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좀 더 역동적인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핸드 사이클’이다. 어머니는 딸의 꿈을 위해 거금 천오백만원을 들여 사이클을 사주었다. 그러면서도 당부한 말은 “비싸게 샀으니 힘들어도 꼭 타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언제든 정말 힘들면 그만두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금메달 2관왕, 2016 리우여름패럴림픽 은메달, 그리고 지난해 인도네시아 아시안 패러게임의 금메달은 모두 그 결실이었다. 2016년에는 사이클을 함께 탔던 신의현선수의 권유로 노르딕스키에 도전, 1년 여 만에 지난해 평창에서 열린 패럴림픽에 출전했다.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7개 종목을 모두 완주해낸 그의 경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장애인 여자 사이클과 노르딕스키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살아갈 의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길잡이가 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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