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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한센인 마을 지키며 헌신해온 강칼라 수녀

고창군 호암마을 성당 옆 작은 거처에서 강칼라 수녀(사진 오른쪽)와 피에라 수녀가 마루에 앉아 웃음짓고 있다. 박형민 기자
고창군 호암마을 성당 옆 작은 거처에서 강칼라 수녀(사진 오른쪽)와 피에라 수녀가 마루에 앉아 웃음짓고 있다. 박형민 기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왔다. 순간 혹시 전화번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가 강칼라 수녀인데요.’ 일흔 여섯 살, 외국인 수녀님은 정확한 한국말과 고운 목소리로 선입견(?)을 깼다.

호암마을은 고창 읍내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이정표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간 길에서 살짝 들어가 만나는 호암마을은 낮은 산을 뒤로 편안하게 앉아 있는 풍경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몇 년 전만 해도 ‘동혜원’이라 불렸던 이 마을은 1940년대 전국적으로 들어섰던 한센인 마을 중 하나다. 환자들이 하나둘 들어와 정착한 1952년, 마을에 ‘공소’가 문을 열렸다. 공소는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 이후 1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교우촌 공동체의 중심이 됐던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동혜원 공소’는 차별과 편견으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놓여있던 한센인들의 신앙공동체를 지키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며 다시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이곳 공소를 지키며 한센인들과 더불어 평생을 헌신해온 사람. 이탈리아 출신의 강칼라 수녀를 만났다.

1968년에 들어와 50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그의 삶은 경이롭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자리. 길고 험난했을 세월의 고난을 기꺼이 안아 세상의 빛으로 돌려놓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그는 완곡하게 인터뷰를 사양했다.

“너무 많은 매체들과의 인터뷰로 할 이야기를 다 한 처지”라는 수녀님은 그러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시간을 내주었다.

수녀님의 거처는 좁고 오래된 집. 노트북 하나 놓이면 그만일 책상과 의자가 있는 거실(?), 입구 쪽의 좁디좁은 기도실과 안쪽의 방 두 개, 그리고 간소한 주방 하나. 군더더기 없는 단출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집이 아주 작습니다. 두 분 수녀님이 생활하시기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불편함은 전혀 없습니다. 두 명 함께 앉을 수 있는 기도실이 있으니 기도할 수 있고, 각자 한 몸 뉘일 방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요. 딱 좋습니다.(웃음)”

-처음부터 여기서 생활하셨나요.

“한국에 온 것이 68년인데 그때부터 여기 살았어요. 이 집은 제가 오기 1년 전에 우리 자매들이 처음 들어왔는데 그때 지어진 집이예요. 저보다 먼저 들어와 살았던 수녀님은 30년을 이곳에서 살다가 알바니아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슬픔이 크고 아쉬워 공소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 분의 삶과 정신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지요.”

-이 공간이 수녀님의 삶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그렇지요. 한국에서 보낸 50년 시간이 모두 여기 담겨 있으니까요. 감사해야할 공간이죠.”

-호암마을에 들어오신 것이 1968년이면 꼭 50년이 되었군요.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물여섯, 만으로 스물다섯 살에 이곳에 왔어요. 참 오래되었군요.”

-고국을 떠나 언어도 그렇고 모든 것이 낮선 한국으로 오실 때는 큰 용기가 필요했겠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수녀원)에서는 언제든 어디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가게 됩니다. 저는 당초 브라질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한국으로 파견 갔던 수녀님 중 한분이 몸이 아파 귀국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어요. 수녀님들의 자원을 받았는데 그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어요. 사실 언어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자원했지요. 한 달 만에 한국 파견이 결정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용기는 많이 필요 없었죠.(웃음)”

-50년 전이니 한센인 정착촌이었던 호암마을도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을 텐데요. 지금은 환자들이 많이 줄었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어느 시기까지는 계속 늘어나 200명 가까이까지 함께 지냈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함께 들어오니까요. 그러나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부모들을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크고 성장해 이곳을 나가 살게 되면서 주민들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 사이 건강이 나빠진 환자들은 세상을 뜨고 더러는 치료가 되어 지금 한센병 환자들은 10여명 남았어요.”

-초창기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 일상이었을 텐데요.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기꺼이 선택했으니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어 소통이 어려워 고생을 했지만 밤낮으로 배워 2년 정도 지난 후에는 한국어를 말하고 쓸 수 있게 되었어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스페인의 병원에서 한센병을 공부하고 돌아와 간호보호사 자격을 얻었는데 덕분에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볼 수 있게 되었죠. 그때는 의료 수준도 그렇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어서 웬만한 치료는 자체적으로 해결 해야 했거든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환자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게는 모두 의미 있었어요.”

-지금은 환자가 많이 줄었기도 했지만 한센인이 아닌 분들도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그런 연고가 없는 분들도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여느 농촌 마을처럼 노인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처음 한센인 마을로 시작했을 때는 마을 이름이 ‘동혜원’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호암마을로 바뀌어 부르고 있더군요.

“이름이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죽림리라는 행정구역만 있었고 ‘동혜원 공소’가 있어 동혜원이란 이름이 더 알려졌었죠. 초창기부터 여기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환자들을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센병 환자가 아닌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도 어려웠으니까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차별을 겪어야했지요. 지금은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편견과 오해가 남아 있어서 한센인 정착촌을 떠올리게 하는 ‘동혜원’대신 호암마을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이름에는 물론 뜻이 있죠. 마을 뒤쪽으로 나지막한 산이 이어지는데 그 위쪽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거든요. 몸이 아주 편하게 놓여 있는데 그 광경이 아주 좋아요.”

-한센인 마을로 시작했으니 공동체적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생활환경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어요. 초창기부터 닭이나 돼지를 키우고 한때는 정부에서 권장하는 엽연초 농사로 생업을 해결했죠.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남았을 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풍족하진 않아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죠. 축사에서 나오는 오폐수나 악취 문제가 심각했거든요. 마을 전체의 고민일 수밖에 없었는데 10여 년 전쯤 고창에 눈이 엄청 많이 내렸어요. 지붕이 무너지고 축사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죠. 그때 마을 이장님이 이번 기회에 축사를 아예 없애자고 제안했어요. 자연스럽게 축사를 없애게 되었는데 덕분에 악취도 없어지고 마을의 환경이 달라졌죠.”

-대신 경제적인 여건은 어려워지게 되었겠습니다.

“실상은 그렇죠. 그래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노인들이어서 기초수급 대상자들이예요. 더러는 얼마간의 농사를 지어 생활을 해결하기도 하고요. 마을 단위로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어떤 일들인가요.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 사업으로 도자기 만드는 일도 그 중 하나예요. 국회에서 전시회도 했는데, 호암마을 도자기는 꽤 알려져 있어요. 지금은 겨울철이 되어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다시 이어질 사업입니다. 가톨릭신자들의 피정도 좋은 사업이지요. 우리 마을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최근에는 이장님이 앞장서서 추진하는 일이 있는데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체험이나 생태관광을 할 수 있는 마을만들기사업이예요. 우리 마을이 운곡습지와 가까운 곳에 있거든요.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호암마을의 이미지도 바꾸고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뜻인 것 같아요.”

-마을 주민들과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 불편하진 않습니까.

“불편함은 없어요. 다만 나이가 드니 일상이 조금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개인보다 마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많거든요. 겨울이 되면 동네 분들이 경로당에서 하루를 함께 나는데 아무래도 점심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그렇고 일상의 어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노인분들이 대부분이니 그런 어려움이 더 크겠습니다. 수녀님도 경로당에서 식사를 모두 해결하십니까.

“물론이지요.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것도 저희들 몫인걸요. 오늘도 장을 보러 시내에 가야해요. 환자들과 노인들이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는 형편이니 아직은 여력이 있는 우리들이 그 일을 대신해줘야 하거든요. 사실 겨울철 경로당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면 봉사자들의 손길이 가장 절실해집니다. 주민들이 함께 나서기는 하지만 모두 70-80대 노인들이니 식사 한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몸이 불편한 노인도 적지 않고요.”

-봉사자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나요.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필요한 일에는 맞추기가 어려워요. 가장 좋은 것은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마을에 빈집이 많이 있으니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보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수녀님께서는 그리 힘든 길이 아니었다고 하시지만 그동안 겪어내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있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가기 마련이잖아요.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으면 되고요.(웃음)”

-아무리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신다해도 늘 보람과 기쁨만 마주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늘 아쉽고 안타까운 일은 있어요. 누군가가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으면 자신도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되거든요. 그동안 환자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저 자신은 감사하게도 그런 응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자신들과 가까운 사람, 이를테면 가족들이나 이웃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다거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는 인색하더라고요. 내가 받았으면 그만큼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아왔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죠.”

-그런 상황들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꾸준히 노력했어요. 사실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깨는 것도 그 중 하나였는데 오히려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더 경계하고 차별하는 상황이 많았거든요. 돌아보면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편견이 아닌가 싶어요.”

-아까 ‘응답하는 삶’을 말씀하셨는데 수녀님처럼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아도 좀 더 가치 있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신앙을 갖고 있으면 아무래도 응답할 수 있는 길을 갖게 되니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사는가를 돌아보면서 사는 일이예요. 내 가족 내 이웃을 생각하는 열린 마음으로 살게 되면 상대방의 존재를 보게 되고 응답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기쁨을 얻게 되거든요. 사실 모든 인간은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어요. 사랑하게 되면 그 만큼 채워지는 삶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게 되면 기쁨도 행복도 그만큼 좁아지고 적어지지요.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삶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내 앞에 온유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온유한 사람이 되거든요.”

-신자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시겠군요.

“말로써 강조하기 보다는 그런 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요.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달됩니다.”

-수녀님께서 50년 시간을 실천의 삶으로 이어오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부족함이 많아요. 그러나 마음을 급하게 갖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빨리 결과를 보려고 하는 조급한 마음이 있어요. 그것을 경계해야하죠. 꽃씨를 심어도 봄이 되어야 생명이 올라오잖아요.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건강은 어떻십니까.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죠.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시술을 했는데 불편하긴 하지만 움직일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직은 운전도 할 수 있으니 오가는데 큰 불편은 없어요.”

-수녀님의 일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혹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삶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순리지요. 저희야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지만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아직은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기도 하고 저 또한 이 안에서 응답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상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지요.”

강칼라수녀가 기거하는 낮은 집 바로 옆에는 ‘동혜원 공소’가 있다. 일요일이면 마을 주민들 뿐 아니라 인근 마을의 신자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리는 성당이다.

인터뷰 말미, 자리를 함께 했던 호암마을 방부혁 이장이 “수녀님 건강하시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이고 기쁨“이라고 전하니 그는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주시면 그만큼 더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그 또한 기쁨”이라고 말했다.

수녀님의 건강이 어디 마을 주민들만의 바람이겠는가.

차별을 극복하며 편견의 벽을 깨기 위해 그가 실천해온 귀한 자취가 깊고 길다. 우리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선물이다.

■ 강칼라 수녀는

강칼라 수녀
강칼라 수녀

강칼라수녀는 1943년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마을 쿠네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탈로네 리디아, 세례명은 카를라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4남매를 ‘바르게 사는 삶, 나누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삶에 마음을 두었던 그는 열아홉 살에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에 들어가 수녀가 됐다. 그의 언니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던 그는 1968년 한국에 왔다. 한국전쟁으로 고아도 많았고, 한센병 환자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길을 가고자 했던 그가 기꺼이 헌신의 삶을 바치고자 했던 곳은 고창군 죽림리에 있던 동혜원. 한센인 정착촌이었다. 강칼라란 이름은 세례명인 카를라를 마을 사람들이 편하게 부르다가 한국식으로 ‘칼라’가 됐고, 성은 아이를 갖지 못한 한 환자가 자기 성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강씨’가 됐다.

2년 동안 밤낮으로 공부해 한국어를 배우고 익혔으며 한센병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다시 돌아와서는 정부로부터 마을 간호보조사 자격을 얻어 환자들을 본격적으로 치료하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했다.

스물여섯 살에 한국에 온 이후 50년. 동혜원 공소를 지키며 한센인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서울 진주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기꺼이 도시빈민과 노약자들을 돌봐온 그는 마을 사람들의 손발이 되었다.

한국에 왔던 초창기, 동혜원에서 고창읍내까지 먼 길을 걸어 다니며 환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고 필요한 일을 해결했던 덕분에 아직도 근처 마을 사람들은 고무신을 신고 먼지 나는 흙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수녀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6년 전 호암마을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우을리 피에라수녀(66)는 보람과 고난을 나누는 동반자. 올해도 마을사람들과 겨울을 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함께 살림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봉사와 기도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2016년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으며 올해 호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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