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에 만났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90세의 일본인 건축가 츠바타교수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인생 후르츠> 다. 건축가인 츠바타 슈이치 교수는 고베 근처의 신도시 ‘고조지 뉴타운’ 의 도시계획에 참여하지만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온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럼에도 뉴타운을 떠나지 않고 도시 한가운데에 300평 땅을 사들여 숲을 만들고 일구어 그 땅에서 자란 나무와 식물과 더불어 살며 행복을 지켜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렸다. 300평 땅에 들여놓은 노부부의 주택은 고작 15평. 남은 땅은 모두 나무와 식물에게 넘겨준 노부부의 선택이 가져온 결실은 놀랍다. 감동은 또 있다. 츠바타 교수의 나무심기다. 한 사람의 가치 있는 신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츠바타 교수의 삶이 전해준 울림은 깊었다. 인생>
최신현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61)를 만났다. 총괄조경건축가란 직함은 낯설다. 건축이나 디자인의 경우 한 도시의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데 총괄책임자로 참여하고 있는 선례가 있지만 조경 분야는 전주가 처음이니 그럴만하다.
그는 조경이 단순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경관을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의 힘으로 일깨워준 조경건축가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중에는 그의 손을 거친 곳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손꼽히는 서서울 호수공원이나 북서울 꿈의 숲, 서울 종로 걷고 싶은 거리를 비롯한 각 도시의 의미 있는(?) 공원이나 조형물의 거개가 그의 생각과 손을 거쳤다.
전주가 도시경관 디자인을 주목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배경도 여기에 있을 터다.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가 연고도 없는 전주라는 낯선 도시의 경관을 총괄하는 만만치 않은 일을 맡게 된 이유다.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예요. 전주라는 도시의 규모나 인구, 주변 환경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아직 건강함이 살아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어요. 시장님의 의지와 철학도 제 마음을 끌었죠.“
전주를 오간지 10여회. 그는 이미 전주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소풍가는 것처럼 전주행 새벽 기차를 타면서 늘 마음이 설렌다는 그가 들려주는 조경이야기는 특별했다.
-총괄조경건축가란 역할이 다른 도시에도 있을까요.
“아마 처음일겁니다. 서울시가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총괄책임자 제도를 두고 있지만 도시 전체에 대한 총괄조경 역할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습니다.”
-직함에 대한 낯설음도 있지만 조경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아직은 단편적이어서 그 역할에 대한 궁금증이 큰 것 같습니다.
“조경은 단순히 나무를 심은 일만이 아닙니다. 햇빛 바람 물 땅 등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대상입니다. 처음 총괄조경가라는 역할을 제안 받았을 때 많은 여건을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도시 규모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길지 않은 시간에 제가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이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서울도 많은 자문을 하고 있지만 서울 같은 거대도시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 미미하거든요. 그러나 전주 같은 규모나 인구, 주변 환경을 갖고 있는 도시는 그런 면에서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 내부에 산이나 하천이 잘 발달되어 있고 특히 전주천 삼천의 경우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 생태적 양호함이나 건강함이 돋보였어요. 장점이 많은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전주 같은 오래된 도시들은 도시 경관의 재편이 매우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개발 중심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많이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재생의 화두는 잃어버렸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되고 있더군요. 조경도 그 연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도시는 살아 있는 생명인 사람부터 시작 되어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들은 사람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건축이나 공간이 사람을 압도하는 공간이 되어버렸어요. 조경은 그 도시가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회복하는 통로입니다. 전주가 갖고 있는 하늘, 빛, 물, 땅의 생명력을 회복시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제지요.”
-전주가 갖고 있는 생태적 건강성을 말씀하셨는데 둘러보면 도심 안에 나무도 많지 않고 여느 도시와 차별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외향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경관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녹시량이 얼마나 되느냐는 겁니다. 도시의 경관은 평면적으로 보이는 녹지의 면적이 얼마나 되느냐보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차를 타고 다닐 때 보이는 녹시량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전주는 그러한 녹시량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도시입니다.”
-전주가 ‘천만그루 정원도시’를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선언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목표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환경에서 면적을 의도적으로 넓혀가는 것보다는 한정된 공간에서 녹시량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를 걷거나 차를 타거나 어디를 가도 녹시량이 충만한 도시로 그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전주만의 문화와 역사가 있듯이 전주만이 가질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전주 경관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녹지는 단순화 되어 있어요. 그것을 다양화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진짜 전주의 모습이 보이게 하는 것이 과제지요. 저는 전주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가진 도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명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전주의 경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시에서 아무리 천만그루 정원도시 만든다 해도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효과도 의미도 없습니다. 시의 정책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녹시량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고 함께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의미가 있겠지요.”
-결국은 시민들의 인식의 변화가 중요할 것 같은데 쉽고 빠르고 편한 것에 익숙해진 환경에서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나무나 숲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으나 아직은 그 가치나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부족하니까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사랑을 주면 그만큼 답을 해줍니다.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기쁨을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정원도시 전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정원도시 전주는 어떤 도시입니까.
“시민들이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기쁨으로 동참해 만들어지는 도시를 꿈꿉니다. 그러려면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도 올라가는 도시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전주가 경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정원 산업이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원이 만들어지는, 그래서 진정한 정원도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원산업은 아직 생소한데요.
“다양한 식물들을 재배해 산지나 유통의 중심이 되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도구가 집결되어 시장이 형성되는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정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산업화하는 일인데 이미 많은 도시들이 정원산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전주가 먼저 나선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정원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면 자연적으로 정원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러한 샘플 정원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정원도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에 제안한 것이 있는데 전주에 가든센터를 만들자는 겁니다. 정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는 전문적인 마켓이죠. 산업이 토대가 되면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통로도 넓어질 수 있겠지요.”
-정원도시 전주가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저는 천천히 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교통이 편리하다고해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은 모든 길들이 그냥 걸어가기 바쁜 형태로 되어 있잖아요. 걷다가 쉬기도 하고, 잠깐 어딘가 바라보고 싶기도 하는 도시의 거리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현재의 여건에서 그런 재편이 가능할까요.
“곳곳에 작은 공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 쉬고 싶은 공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거리와 공간이 하나의 점이라면 그런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다시 이어져 면이 되는 그런 도시가 되면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가 달라지고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됩니다. 도시 환경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갈 때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다나 산 숲,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녹시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녹시량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내면이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서로 돕고 배려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배이게 되지요.”
-전주에 식재할 나무도 고민이겠습니다.
“처음에 전주를 찾았을 때 시내 거리에 유독 남천이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가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것은 기준이 옳지 않습니다. 나무는 각자 갖고 있는 특성이 달라서 그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다름과 다름을 모아 좋은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지요. 남천은 가을에는 열매나 단풍이 좋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계절은 별 특색이 없지요. 계절마다 특색 있는 나무를 고루 심어 계절별로 모습이 달라지는 도시를 만든다면 좋겠지요. 전주는 도시의 전통성에 맞는 수종을 특성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국의 정원이 발전된 도시에 가면 몇 백종 수종이 같이 어우러져서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주시민들이 살아 있는 생명의 다양성을 보고 즐기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지요.”
-말씀 들으면서 조경과 건축이 따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주의 건축물들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오간 것이 10여회 되는 것 같습니다. 건축물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려운데 공공건축물은 질적으로 조금 더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공공건축이 앞서가면 일반건축물들도 따라 올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공공건축의 질을 높이는 방안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도시보다는 건축물의 층고가 낮고 특히 구도심 쪽은 경관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도시마다 활력을 잃었던 구도심 재생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사업의 대부분이 하드웨어에만 치중되어 있더군요. 조경 경관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국 도시 경관을 재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건축이 중심이 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조경은 여전히 아웃사이더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들은 조경과 건축이 같은 위치에서 협의하고 같이 땅을 만지면서 건축 배치를 합니다. 저는 도시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살아 있는 생명이 먼저 존중받고 그 다음에 죽어 있는 건축물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은 늘 건축이 앞서 갑니다. 그러니 도시의 맥락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로 가기 보다는 삭막한 도시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정원도시 전주의 미래가 궁금해집니다.
“저는 전주를 하나의 숲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주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지키고 살려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일만으로 도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하나 제안하고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저의 제안이 몇 사람의 인식을 바꾸고 그 몇 사람이 다시 몇 사람의 생각을 바꾸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것, 그것을 저는 가장 가치 있는 전주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최신현 대표는] 지자체 첫 총괄조경가, 대표작 '서서울 호수공원'
최신현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경과 건축을 아우르는 공간 디자이너다. 그의 이름 앞에 조경가나 건축가가 아닌 조경건축가란 직함이 더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건축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망했던 학교를 떨어지고 난 후 조경 분야로 진로를 바꾸었다. 조경과의 만남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운명과도 같았다.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그를 조경의 가치에 눈뜨게 해준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였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조경은 전공한 연구자도 거의 없었던 미개척분야여서 조경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드물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경학과를 개설한 영남대에 입학했다. 알수록 빠져드는 조경 분야는 그에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쁨의 대상이었다. 대학원(홍익대)에 들어가 환경설계학을 공부하면서 조경에 대한 그의 철학은 훨씬 더 폭넓고 깊어졌다. 조경회사와 엔지니어링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공간 디자인의 영역은 그의 삶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하는 통로로 자리 잡았다. 조경은 알수록 깊어지는 분야였다. 조경을 제대로 하려면 건축과 토목, 시공까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으로도 전문성을 갖추고(서울 시립대 대학원 박사과정), 조경기술사 자격증까지 갖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현장을 지키면서 학업을 병행했던 그는 주경야독의 결실을 같은 길을 가고자하는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대학 강의를 즐기면서도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크고 작은 현장을 지키는 일 또한 열정과 신념으로 이어냈다.
2002년,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처럼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곳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회사 ‘씨토포스 ’를 설립한 이후 그가 참여한 사업의 결실은 곳곳에서 빛났다.
대전 서구 탄방근린공원조성계획, 광주 5.18묘역 조성사업 기본계획, 인천대공원 조성, 서울 종로 걷고 싶은거리 기본계획, 행당도 복합휴게시설 기본계획제안, 대가야 역사 테마 관광지 조성 기본계획, 월드컵 공원조성 기본설계, 서울시 서서울 호수공원, 북서울 꿈의 숲, 제주 라이프 가든을 비롯해 전국 각 지역의 수많은 공모사업 현상설계에서 대상을 수상하거나 당선됐다. 이중에서도 서서울호수공원은 경관디자인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공간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 들어온 숲과 공원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며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태도를 공유하게 되었다.
영남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울시 건축정책위원과 도시공원위원, 인천공항공사 조경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매력만점 삼양동 마을 만들기’ 총괄계획가와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로 활동하면서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가치 있는 일’을 실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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