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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풍경] 조각가 강용면 씨 "공공조형물 제작에만 집중된 현실 안타까워…확고한 철학 중요"

강용면 조각가가 군산시 옥산면의 작업실에서 한쪽을 메운 작품들 사이로 작업을 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강용면 조각가가 군산시 옥산면의 작업실에서 한쪽을 메운 작품들 사이로 작업을 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오래전부터 오며 가며 마주치는 조각 작품이 있다. 문화단체 사무실에 있는 나무 조각상이다. 긴 통나무를 각 지게 깎아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세워놓은 조각. 매끄럽지 않은 투박함과 원색의 토속적 분위기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의 작가는 조각가 강용면씨(62, 아리울조형연구소 대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제작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작품은 그의 작업을 상징하는 연작 <역사원년> 의 연상에 있다. 그런데 이 작품 참 독특하다. 단단한 어깨가 돋보이는 이 여성은 서있는 그 자세가 당당하다. 거친 세상 속에 던져졌으나 스스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성을 표현한 작가의 메시지는 그래서 더 분명하다.

그는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자신의 작품에 들여놓은 조각가다. 늘 소재와 형식은 새로운 변화로 출렁였으나 시대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의 견고한 언어는 시간과 시간을 넘어서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나무 작업으로 시작해 모자이크와 아크릴, 피시와 에폭시 등 다양한 소재를 아우르며 한국적 정신의 근원을 추적해온 그의 조각은 그 자체로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상징적 언어가 됐다. 미술계가 중진작가의 반열에 우뚝 선 그를 여전히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원년> <응고> <현기증> 등 굵직한 주제의 연작으로 한국 조각에 자극을 불어넣어온 작가의 삶이 궁금했다. 때마침 완주군 소양면의 갤러리 아원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전통을 품다> 가 감동으로 대중들을 만나고 있었다.

인터뷰는 군산시 옥산면, 너른 들판 사이로 난 길가의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그의 작업실에서 있었다. 80년대 후반,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 이후 지금까지 40년 가까운 시간을 도전과 기다림으로 이어온 그의 흔적은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각 작품들로 빛났다.

-작업실이 넓습니다. 오래된 창고 같은데, 쓸모 있게 변신을 했군요.

“쌀을 쌓아두던 창고였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예전 만경강 근처 갯벌 옆에 있던 작업실도 쌀 창고였는데 작품이 많아져 15년 전에 이쪽으로 옮겨왔습니다.”

-쌀 창고와 인연이 깊군요.(웃음) 모든 작업을 여기서 하십니까.

“작업이 워낙 대작이다 보니 우선 큰 공간이 필요하고 천장이 높을수록 제게는 장점이어서 늘 이런 창고만 찾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군산 근방의 서천 장항 김제까지 창고가 있을만한 곳을 돌아다녔어요. 처음에는 100평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벌써 이곳도 거의 채워졌네요. 여기서 대부분의 작업을 하지만 공공 조형물은 소재에 따라 공장에 제작을 맡기기도 합니다.”

-조각의 특성상 아무래도 작업 공간과 환경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소재 뿐 아니라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셨지만 시간으로나 양적으로나 나무 작업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

“나무 조각은 제 작업의 뿌리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무를 택했던 것은 어려웠던 경제적 환경과도 관련이 있어요. 모교에서 조교생활을 할 때였으니 아무래도 여건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있었는데 학교 뒤에 버려진 소나무가 많았어요. 임자가 따로 없으니 톱만 갖고 가면 다 내 것 이었죠. 좋은 재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 다른 소재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 이유가 있다 해도 재료가 표현의 기법이나 주제와 맞지 않으면 한계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마침 제가 작업을 시작했던 80년대 미술계의 화두는 한국 전통성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전통’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민화나 불상 조각, 무신도 같은 그림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요소에 마음이 갔습니다. 제가 얻은 나무 조각의 형태와 색감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나무에 채색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낮선 기법이어서 우려도 있었지만 한국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구현해내는 방식이 제게는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어요. 제가 나아갈 길을 그 안에서 찾기도 했으니까요.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인물상 작품들은 그런 점에서 제 작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물상 연작인 <역사원년>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그 작업을 10년 이상 지속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오래전 인터뷰에서 역사원년의 인물상이 꼭두각시 인형으로부터 영감을 얻으셨다고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맞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제 고향마을은 한학의 전통이 깊은 곳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풍습과 무속적 환경이 일상에 배어 있었죠. 알게 모르게 오래된 풍습과 문화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전통이란 옷을 입은 대부분의 것들이 훼손되거나 단절되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던 문화의 바탕을 찾고 싶었습니다. 꼭두각시 인형은 제가 주목했던 전통적인 요소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영감을 안겼어요. 오방색을 작업의 중심에 들여놓게 된 것도 그 덕분이지요.”

-어찌됐든 채색된 나무 조각은 강용면의 작업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나무의 채색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기도한데 오히려 미술작업에서는 그러한 정체성을 외면해온 경향이 있었지요.

“맞습니다. 제 작업이 관심을 모으면서도 한편에서는 우려도 있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무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무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나무의 성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꽃 새 등 자연을 소재로 하는 조각품에 채색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어요. 전통 물감을 비롯해 다양한 재료를 섭렵하면서 저만의 언어를 찾을 수 있었지요. 그 작업을 이어갔던 90년대가 작가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30대 후반부터 40대에 이르는 시기가 되겠군요. 시간 강사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 직후부터인데, 말씀대로 선택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작업에 대한 절실함이 깊어지니 그야말로 열심히 하게 되더군요. 작업에만 온전히 매달리게 되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에서는 가장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로 꼽히기도 했어요. 지방대학에서 제 이야기가 회자 될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조각 분야는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활동 영역을 넓히는 일도 그렇고요.

“그런 어려움이야 조각뿐이겠습니까. 한국의 화단은 특정한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잖아요. 지역적으로는 서울 경기 쪽에 집중되어 있고요. 그 한계와 경계를 뛰어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확고한 철학을 갖고 노력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열 수 있는 길이죠. 저 또한 좌고우면하지 않고 작업에만 집중해오면서 그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지방대 출신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확신이 없으니 작업의 동력을 찾기 어렵고 좋은 작품도 나올 수 없죠.”

-예전과 달리 지금은 창작 지원 형태도 다양하게 열려있어서 의지만 있다면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 아닌가요.

“지원 시스템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에요. 주어지는 기회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죠. 그런 시스템을 활용해서 작업을 힘 있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얻고 예술세계를 넓혀 작가적 역량을 키워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작업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나무 이후 아크릴 작업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당시 개인전 뿐 아니라 초대나 기획전 등 참여하게 되는 전시회가 1년에 20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작업은 노동력도 그렇고 시간도 오래 걸렸어요. 오로지 혼자 힘으로 완성해야하는 작품의 특성상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즈음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갈망이 생겼어요.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 낼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싶었죠. 구리선과 모자이크를 활용한 작업을 먼저 시도했어요. 막혀있는 공간이 아닌 열려있는 투각 공간을 형상화하는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매달려 움직이는 것, 키넥트적인 구조를 해보고 싶더군요. 바람에 흔들리거나 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작업에 마음을 두면서 공간의 확장과 조명을 들여왔어요. LED를 쓰는 대신에 피시와 아크릴을 활용하기 위해 가마까지 제작했죠.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얻으려면 그만큼 비용이 필요한데 다행히 그즈음 공공 조형물 작업이 많이 들어왔어요. 열심히 벌어 열심히 투자했지요.(웃음)”

-성과는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40대 후반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 작업이 나의 작업 노정에 큰 변곡점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반응이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무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이야기 했지요. 그러나 제가 진행하는 공공 조형물 작업에 매우 유용하게 이 기법과 소재들이 활용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찾자면 성과가 없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선생님은 공공 조형물과 개인적인 작품을 별개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이 명쾌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공공성을 앞세운 조형물과 작가 개인의 작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거든요. 가장 좋은 방식은 작가의 예술성을 온전히 반영하는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는 것이겠으나 건축주와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담아내야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인적인 예술세계는 훼손되거나 묻히기 십상이지요. 저 역시 그러한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요소 때문에 포기했던 경험이 많습니다.”

-미술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공공조형물 작업은 아무래도 조각 분야와 긴밀한 관계가 있죠. 그래서인지 젊은 작가들도 공공조형물 제작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는데 선생님 말씀 듣다보니 예술관 구축이 필요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은 경제력이 있어야 다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니 무조건 외면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공공조형물에만 매달리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예술적 완성도를 향한 치열한 과정이 없이 목적을 앞세운 조형물 제작에 익숙해진다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막힐 수밖에 없거든요. 요즘 미술계에서 좋은 조각가를 찾기 어렵다는 한탄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다행스럽게 제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공공조형물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기회도 별로 없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절박하게 제 작업에 매달려야 했던 시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공공조형물을 제작하거나 제 작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공공 조형물에 쏟는 에너지 또한 의미 있게 하기 위해 2년에 한번 개인전을 갖습니다. 경계에 탄력도 주고 스스로 중심을 잡게 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2014년에 처음 발표한 <현기증> 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지향해왔던 예술의 역할과 철학을 더 깊이 있는 언어로 확장시킨 작품이 아닌가 싶은데요. 재료나 형식, 특히 화려한 원색의 색이 없어진 자리에 모노톤의 색채를 들여온 것이 놀라웠습니다.

“인물은 초기부터 제 작업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만 형식과 내용의 폭이 크게 변화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처음 시작은 고은시인의 <만인보> 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줄곧 인물에 대해 천착해왔는데 그 시를 읽으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2000년부터 한사람씩 만들기 시작해 쌓아두었습니다. 2014년 서울 자하문 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발표를 했지요. 14년 만에 공개하는 것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관심과 호평이 집중되었습니다. 에폭시를 활용한 모노톤 검은 인물상 부조에 왜 주목하는지 저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작품에 왜 ‘현기증’이란 제목을 붙였는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간관계였습니다. 그런데 60년 넘게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좋은 관계보다 섭섭했거나 대립된 관계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게다가 현대사회에서는 의도와 관계없이도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잖아요. 갈등적 요소도 그만큼 깊어지죠. 그러나 결국 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내는 복잡한 관계가 곧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 강용면 조각가는

강용면은 김제시 백산면이 고향이다. 한학자들이 많이 살고 있던 요교마을에서의 어린시절은 그의 예술적 정신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주신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른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잘그렸냐’고 칭찬해주셨다. 그 때의 칭찬이 그가 가고 있는 길을 만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서울예고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도전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조건 말리는 대신 ‘낙방하면 아버지가 권하는 학교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낙방을 하고는 아버지와 약속을 지켜 이리공고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 수업에는 관심도 취미도 없었던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의 인생에서 없어진 시간으로 생각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연거푸 떨어져 실의에 빠져있을 때 영장이 나왔다. 3년 꼬박 군대생활을 거치고 제대를 했으나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입시에도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군산대에 장학생으로 발탁되어 4년 동안 학비 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늦게 들어간 대학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작가로서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그때 쌓았다.

대학 시절에는 학원 강사를 겸하며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다. 졸업 직후 돌공장 한 켠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의욕적인 출발을 했지만 모든 재산을 투자한 기자재와 도구들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 있는 그를 스승이 일으켜주었다. 조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주말 없이 학교에 나갔다. 학교의 공간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학교 건물을 신축중이었던 덕분에 잘려져 나간 소나무들이 몽땅 그의 재료가 되었다. 홍대 대학원을 마치고 시간 강사로 9년을 보냈다. 광주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김제평야 저편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이상 강의를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0대 후반에 전업작가가 되었다. 그때의 선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여긴다.

나무 조각으로 시작한 그의 작업은 한국적 전통을 바탕으로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독창적인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소재는 다양해지고 형식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은 199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가진 22회 개인전에 고스란히 담겼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국공립미술관과 전국 각 도시의 수많은 갤러리들이 그를 불러 이름을 알렸다.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전북청년미술상, 한국일보청년작가초대전 대상 등 주목받는 수상으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2014년, 14년 만에 공개한 대작 ‘현기증’ 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진조각가 반열에 우뚝 섰다. 그 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이 전시를 2014년 우수전시로 선정했다.

내년 미국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외교통상부 문화외교자문위원으로 위촉돼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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