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담담했으나 가슴이 먹먹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더해지니 그 먹먹함은 아픔이 되었다.
영화 <김복동> 을 극장에 내걸린 지 3주쯤 지나 보았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의외로 객석은 가득 차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아베총리의 경제제재로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즈음이었지만, 영화 <김복동> 의 예상된 흥행(?)은 민망했다. 상업영화관들의 인내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영관에서 여러 달 전부터 내걸었던 몇 편 수입 애니메이션은 건재했으나 영화 ‘김복동’은 간판을 내렸다. 김복동> 김복동>
그런데 끊어질 듯 했던 영화의 생명(?)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입소문 덕분이었을까. 자치단체와 기관, 각 분야의 공동체들이 영화 상영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영화 <김복동> 은 위안부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였으며 평화운동가였던 고 김복동 할머니(1926~2019)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할머니가 1992년부터 올해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싸웠던 27년 동안의 긴 여정이다. 아흔 살이 넘은 고령에도 세계의 도시들을 돌며 일본의 식민정책 만행을 고발하고 공식적인 사죄를 요구했던 할머니의 삶을 담담하게 담은 이 영화는 역사적 실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왜 대한민국 국민이 이 치욕적인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알려준다. 김복동>
이 영화를 만든 송원근 감독(43)을 만났다. 방송용 다큐를 주로 제작해온 그에게 <김복동> 은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중심에 있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를 다루는 일이니 소명의식이 발동하지 않았을 리 없고 한일 양국 사이의 갈등이 극도로 악화된 시절이니 책임감 또한 적었을 리 없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쾌했다. 김복동>
“모두가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이고 싶었다. 또한 이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영화 상영과 감독과의 대화를 함께 요청하는 덕분에 전국의 도시들을 이웃집 드나들 듯 오가고 있는 송 감독은 고단하면서도 의미 있고 즐거운 이 여정이 얼마동안이라도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고된 여정이 역사를 바로 보게 하는 새로운 힘을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화 관객은 기대한 만큼 이루어졌습니까.
“예상보다 저조했어요. 상영관들이 너무 빨리 영화를 내린 것이 아쉽긴 하지만 또 좋은 영화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으니 욕심을 부릴 일은 아니죠. 그나마 영화를 미처 보지 못한 관객들이 공동체를 통해 상영 요청을 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이 영화를 못 보셨지요. 영화는 언제부터 준비했습니까.
“할머니께서 지난 1월 28일에 돌아가셨는데 그 3개월 전에 제안을 받았습니다. 오래전부터 현장을 함께 하며 기록해온 미디어 몽구 김정환씨가 김복동 할머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터여서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었지요. 곧바로 제작을 시작했지만 이미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계실 때여서 할머니의 일상을 담기에는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았습니다.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미디어 몽구의 자료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방대한 자료가 동원되었겠습니다.
“미디어 몽구가 촬영한 자료들이 있었지만 영화를 만들기에는 부족했어요. 정의기억연대의 자료가 중요했는데, 당시만 해도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어요. 정의기억연대에서 3~4주에 걸쳐 자료를 찾고 정리해주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습니까.
“개인적으로 현장을 담거나 자료를 들여다본 적은 없었습니다. 한일위안부 합의 이후에 토크 프로그램을 연출했는데 기획을 하면서 내용을 들여다보고 전문가들의 이야기 들은 것이 전부였어요. 다만 작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 과 <아리랑> , <한강> 을 이어 읽으면서 우리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를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는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강> 아리랑> 태백산맥>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만났어야 하는 일 같습니다.(웃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형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머니 영화를 제안 받은 것이죠. 6개월 정도 책에 빠져 있다가 그런 제안을 받으니 소설에서 만났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일본군에 끌려가던 소녀들의 장면이 선명했어요. 자료를 찾아보니 김 숨 작가가 쓴 자서전이 있었는데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가 따로 없더군요.”
-영화의 구성이 새로웠습니다. 할머니의 기록이면서도 할머니의 개인적 일상에 집중하지 않고 관련 상황들을 이어가면서 그 안에서 할머니의 존재를 들어나게 하는 방식이 다른 다큐와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영화가 할머니의 자서전 성격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통해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구성에 관심이 갔어요. 김복동도 그런 대하소설 같은 구성으로 관객들이 깨닫고 감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관객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시간의 흐름으로 일별하면서 스스로 알게 하는 그런 힘을 원했던 것이겠군요.
“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었던 시점이 아베의 경제제재로 막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이런 시점에서 우리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영화죠. 김복동 할머니도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나설 때 오히려 화를 참고 인내하며 차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분이셨어요. 영화도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고 그런 의미를 녹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돌아봐야 하는 일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한일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왜 여기까지 이 지경으로 온 것인가에 대한 것이죠. 지금 우리 사회가 왜 이런 상황에 놓이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말하자면 그런 문제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발점 같은 역할을 영화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영정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 한 마지막 장면인데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한 장면도 담지 않았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도가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어떤 걸음을 걸어왔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관객들이 우리 역사를 알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의 활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 남아서 이어질 수 있도록 이어지고 떠다니며 힘을 전하는 그런 역할을 기대했어요. 굳이 장례식을 담지 않고 영정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 한 것도 그런 의도였습니다. 돌아가셨다고 해서 할머니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래서 그 과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메시지 같은 것이겠습니다.
“맞습니다. 할머니가 억울해했던 일본의 사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있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끝까지 얻고 싶었던 것을 결국 못 얻고 가셨잖아요. 그런 뜻을 담고 싶었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살아 계실 때의 냉철하고 의연했던 모습을 더 강하게 기억하게 하자는 것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생각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더 많은 관객들이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더군요.
“제 입장에서는 더 그렇죠.(웃음) 사실 저는 어떤 운동성으로 이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관객과의 대화를 해보면 그런 것을 원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는 그 질문에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답합니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새겼으면 좋겠거든요. 한 순간 감동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물들어버리는 그런 과정을 공유하고 싶은 거죠. 우리가 안고 있는 한일 역사는 우선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답도 얻게 되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찾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 영화를 보고 어느 것 하나 해결된 것이 없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감독님이 다큐를 통해 의도하신 것은 결국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큐의 힘은 그런 것 같아요. 방송 다큐와 극장 다큐를 구분한다면 방송다큐는 우리가 그냥 우연찮게 보다가 뜻밖의 즐거움과 뜻밖의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면 극장 다큐는 아주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연히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서 보는 그것만으로도 우선 출발선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극장 다큐는 사실 매우 아날로그적인 방식입니다. 이를테면 직접적으로 와 닿는 지적인 깨달음 보다는 감정적으로 사람들을 녹여내고 물들이는 염료와 같은 것이죠. 관객과의 대화를 하다보면 영화를 보고 비슷한 느낌들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떠다녔던 질문과 답을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하더라도 더 깊이 있게 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믿죠. 사실은 이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는 기대가 훨씬 높았어요. 7월 중순부터 인터뷰가 이어질 정도로 관심이 높았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어요. 한일문제의 근원을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알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냥 뉴스로만 소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을 잘 알아주시는 것 같았어요. 단순히 슬픈 영화로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희망을 제대로 보고 그 메시지를 읽어내는 관객들이 늘어날수록 그런 메시지가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거든요. 공동체들의 상영 요청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죠.”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다른 영화도 만들고 싶어요. 그러나 굳이 욕심을 내고 싶진 않아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내 ‘내가 할 수 있을까’를 되물음을 했습니다. 그 과정이 웃으면서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무게감과 사명감을 갖고 해야 했어요. 그것은 어느 순간 소명의식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나에게 주어진 과제였어요. 어느 날 어느 순간 물이 밀려오는데 제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면서 한 것이었죠. 앞으로의 일도 분명히 그렇게 올 것이라는 예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죠.”
-어떤 이야기를 담게 될지 궁금합니다.
“국가의 어떤 큰 흐름 속에서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50년대 이후로 군사정권의 독재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 뿌리는 물론 일제 강점기죠. 우리의 근현대사 100년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어긋나고 망쳤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짓밟히고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죠. 개인은 늘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분명히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 진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사회의 굳건한 시스템 속에서 묻히고 뭉개지고 왜곡되는 그런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소외되는 목소리를 듣고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 송원근 감독은 세월호·친일파 등 폭 넓은 사회적 이슈 다뤄
송원근 감독은 1977년 생, 올해 나이 마흔 셋이다. 남원이 고향이지만 일찍 전주로 이사와 성장했다. 전북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보다는 방송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아 방송반에서 활동하면서 대학시절 내내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다큐 제작의 모든 과정은 온전히 독학으로 익혔다.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터전을 잃은 주민들의 삶을 담은 <두꺼비강의 눈물> 을 비롯해 <야학은 무엇인가> , <이제 대한민국의 반란이 시작된다> 등 당시 제작된 다큐 작품은 각종 영상 공모전에 출품되어 수상했거나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이제> 야학은> 두꺼비강의>
2003년 대학 졸업과 함께 서울 MBC시사교양국에 들어가 일했다. 소속은 되어 있으나 정규직이 아닌 이른바 독립피디 신분이었다.
<화제집중>
,
<불만제로>
와 같은 고발성 시사프로그램과
2019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 을 연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지난 8월에 개봉한 다큐영화 <김복동> 은 극장 상영을 마무리 했지만 전국의 자치 단체와 기관, 학교, 공동체들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상영은 감독과의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일상이 바빠졌지만 보람과 책임의식을 절감하며 기꺼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김복동>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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