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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실천, 사회적 가치 이끌어온 송경용 성공회 신부

나눔과 미래 이사장인 송경용 신부가 서울혁신센터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 사무국 복도를 걷고 있다. 박형민 기자
나눔과 미래 이사장인 송경용 신부가 서울혁신센터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 사무국 복도를 걷고 있다. 박형민 기자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지만 돈이 성공의 목표인 우리 사회에서 ‘나누고’ ‘공유하는’ 삶의 방식은 여전히 낯설고 인색(?)하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킨 ‘촛불’의 위대한 힘을 경험했지만 사회적 불평등의 간극이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사회적 현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57· ‘나눔과 미래’ 이사장)를 만났다. 그는 40년 가깝게 나눔을 실천하며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우리 사회에 일깨워온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다. 빈민운동으로 시작해 사회적 경제 운동까지, 대한민국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위한 그의 활동은 온전히 현장성을 기반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덕분에 그는 학문과 이론의 틀 안에서 탐색되는 사회적 가치의 한계를 현장의 힘으로 극복해 현실적 대안으로 만들어 내고 발전시켰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빛을 내는 사회적 경제의 다양한 통로들이 그 결실이다.

인터뷰는 어렵게 이루어졌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잘게 쪼개어도 부족한 그의 바쁜 일상에서 두세 시간 얻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루어진 인터뷰는 그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서울 불광동 서울혁신센터의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 사무국에서 있었다. 인터뷰 직전까지 공덕동 생명안전시민네트워크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달려온 그는 직함이 어색할 정도로 젊고 열정적이었다. 덕분에 그 앞에 놓인 수많은 단체와 그 활동을 어떻게 그렇게 지치지 않고 해내는지 알게 됐다.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한 빈민운동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사회적 경제 운동까지 신부님을 줄곧 이끌어온 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부터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눔을 공유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지요. 그 시작은 야학이었고요. 상계동에 들어간 것이 79년 9월 28일이니 올해 39년째군요. 동력을 꼽자면 나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작이 상계동에 있는 야학이었죠.

“맞습니다. 적십자회관에 개설한 상계적십자 청소년 학교였어요. 그때 제가 다녔던 연세대 학생들이 ‘돌멩이 반’이라고 독서 모임을 따로 만들어 운영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모두 제 인생의 스승이 됐어요.”

- 그 친구들이란 누굽니까.

“상계동 일대에서 일했던 친구들이죠. 하루 12시간 13시간씩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열서너 살 청소년들인데 저보다 삶의 폭이 훨씬 넓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 그곳을 제 인생의 시원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그때 갖게 된 것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그즈음은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반복해 만나게 되는 종교인들을 보면서 온몸으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80년대 초는 이념으로 세상을 판단했던 때였는데 그 분들은 온몸으로 영성을 실천하는 분들이었거든요. 종교적 영성이 갖는 힘과 헌신성을 보았죠. 도대체 교회는 어떤 곳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알고 싶어지더군요. 야학에 나오는 친구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물음 때문이었어요.”

-늦게 신학교를 다시 들어간 것도 그런 물음이 바탕이었겠습니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건축으로는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건축가는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힘쓰는 재능 밖에 안주셔서......”

-야학은 계속하셨습니까.

“제가 상계동에 처음 들어간 것이 79년 9월 28일인데 상계동에 나눔의 집을 연 날도 86년 9월 28일이예요. 저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84년에 군대 제대를 하고 상계동에 갔더니 노동자들이 살고 있던 오래된 주거공간들이 철거되고 있었어요. 깡패를 동원한 철거반 폭력에 여학생 반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우는 모습을 보고 몸이 얼어붙더군요. 나도 모르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게 해주시라’고. 그 기도를 안했으면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그래서 제가 후배들에게 기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웃음)”

-나눔의 집은 지금 여러 곳에서 운영되고 있지요.

“상계동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그 후에 봉천동 등 몇 군데에 생겨났어요. 저에게 보람이 있다면 ‘나눔’이란 말을 널리 나눈 것인데, 그때만 해도 보수 진보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어요. 한쪽에서는 혁명해야 하는 판에 무슨 나눔이냐, 또 한쪽에서는 부자들 것 뺏어가는 일 아니냐고. 온갖 오해와 억측을 다 했죠.”

-지금은 친숙하지만 그 당시는 낯설었던 말이군요. “제가 ‘나눔’을 앞세웠던 것은 이유가 있었어요. 저는 항상 삶의 현장에 있었는데 우리 현실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뭔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더군요. 이념이 중시되던 때였지만 지금 당장 가장 약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의 어둡고 이중적인 이면과 맞닥뜨려야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서로를 향해 네 탓이라고 손가락질만 하지 막상 내 탓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 현실을 보면서 이념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졌어요. 동료나 선후배들과 토론을 하면서도 삶이 밑받침 되지 않은 공허한 이론과 이념, 생활에 밀착되지 않는 그런 숱한 구호들이 공중에 붕붕 떠다닌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현실의 절박함에 대한 자각 이었겠습니다.

“일상을 살면서 늘 현장의 삶이 얼마나 긴박하고 절실한가, 삶의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거든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구체적이고 긴박한 현실 같은 것이었죠. 가난이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늘 긴박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혁명이나 사회변화를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긴박성을 모르는 탁상 담론들이 넘쳐나는 것에 화가 났어요. 삶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밀착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죠.”

-종교인으로서의 고민도 같은 것이었습니까.

“예수의 삶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답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오염된 교회가 너무 많았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먼 당신 같은 존재가 교회라면 나는 그런 간판을 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죠. 나는 진정한 삶을 이야기 하고 싶은데 교회라는 간판이 그것을 가로 막을 수도 있고, 또 이 공간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교회를 갖지 않고 걷는 교회를 이어온 것이군요.

“어느 날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성체를 쪼개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더 신비한 일은 신부님이 포도주를 잔을 들어 올리는데 성당 구석에 있던 제게 피 냄새가 몰려왔어요. 식은땀이 나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예수님의 삶의 정수는 나눔이라는 것. 그래서 ‘나눔의 집’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그 곳을 통해서 하신 일이 참 많더군요.

“400만 원짜리 임대 사무실이었어요. 불도 잘 안 들어오는 허름한 공간이었죠. 그래도 밤이 되면 상계동 친구들이 모이죠. 어린 시절 성경을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고 저 역시 신학생 신분이니 기도도 하고, 성경구절을 주제로 토론도 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일을 만들었습니다. 상계동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데 마음을 모아 설문지를 돌려 일을 찾았어요. 아이들 공부방, 야학, 다양한 계층을 위한 모임까지 많은 일이 생겨났어요.”

-모두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이지만 꼭 돈이 있어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군요. 돈이 아니어도 나눌 수 있는 것들이었네요. “그렇죠. 그래서 네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하나는 이곳은 가난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교회, 단순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교회죠. 두 번째는 실질적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민중복지를 지향했어요. 세 번째가 지역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역주민들의 센터가 된다는 것. 그 다음은 종교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경계가 없는 집, 누구나 올 수 있는 그런 집이었죠.”

-경제적으로는 어땠습니까.“시작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눔의 집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많은 분들이 나눔의 집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 나눔의 집은 산동네의 산복도로 같은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산복도로는 산동네 가기 위해 오르거나 내려오는, 산동네를 가로지르는 길이예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올라가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와 함께 어깨 걸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이죠. 그 길 같은 것이 곧 나눔이에요. 나눔의 집 후원회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사회적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적처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분들의 힘이었죠.”

-팍팍한 사회인 것 같은데 신부님 말씀 들으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가로막혀있을 뿐 서로 조금만 더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고 건강한 가치관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비전을 공유한다면 서로가 가진 작은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함께 해온 분들이 많이 있지요.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수천 명, 수만 명이고요. 가장 고마운 분들은 저와 함께 했던 활동가들입니다. 제 꾐에 빠져서(?) 이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 대한 빚이 큽니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가치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의 삶은 정말 고단하지요.

“구체적 현실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막막하죠.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사회적 보장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외국에 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이 활동가들이 번듯한 직업으로 분류되고 있는 환경이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직업의 영역에서 기타 등등으로 분류되거든요. 몇 년 전에 공익활동가 사회적 협동조합 ‘동행’을 만든 것도 이러한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1000명 정도의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사회적 복지 지원과 공공의 선을 위한 활동가들의 연대를 이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눔과 미래는 언제 설립되었습니까.

“1998년 노숙인 무료급식소로 일이 시작되었는데 2004년 법인체로 설립된 이후 지금은 주거 복지 등 사회적 경제 활동을 확산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근래 들어서죠.

“맞습니다. 사실 나눔의 집을 통해서 해온 일들이 결국은 사회적 경제의 연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협동조합은 그동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다시 살아나고 있는 분위기죠.”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환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처음에는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운용되었어요. 지금은 사회혁신이라는 가치가 더해졌죠. 사회적 경제는 사실 민주주의의 도장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 경제가 국가의 아젠더가 되고 주요 정책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이지요.”

-사회적 경제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확산되는 것이 당연하고요. 사회적 경제는 15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어온 가치입니다. 지속해온 힘의 근간은 이것이 풀뿌리 운동이라는데 있어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살고자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인간을 경쟁적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요. 경제활동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대안일 뿐 아니라 사회적 대안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구체적인 이론이나 관념적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을 증명해온 운동이 사회적 경제 운동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 가치예요.”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수많은 통로를 열고 확산시켜오셨는데, 나눔은 어떤 의미입니까. “나눔은 자기 자신에게 드리는 가장 거룩한 제사 같은 것입니다. 삶은 살아갈수록 참 어렵거든요. 삶은 살수록 비루해지고 작아집니다. 처음에는 내가 거룩한 사람도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갈수록 존재가 작아지고 불안해지잖아요. 때로는 비루해지기도 하고. 그럴 때 남을 돕는 일은 결국 나를 이롭게 하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와 관계하고 누군가와 접속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나눔이지요. 나눔이 곧 자신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임을 알게 되는 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 송경용 신부는

송경용 신부는 전주가 고향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서울로 이사를 갔으나 할머니와 전주에 남아 초등학교와 중학교(완산중)를 어렵게 마쳤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를 성장시킨 힘이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이후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일을 한다는 것은 곧 생존의 문제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져야 할 짐은 그만큼 무거웠다. 대학은 사치다 싶어 취직시험을 봤다. 삼성 대림 한전 등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장에 모두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입시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시험이나 한번 보자’고 생각해 연세대 건축과를 지망했다. 면접날이 되자 갈등이 생겼으나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합격증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운 좋게 합격을 했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강남의 룸살롱까지도 일터가 되었다.

대학시절 선배의 권유로 야학을 알게 됐다. 민주화의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 상계동 노동자들을 만났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보였다. 대학 4학년 한 학기를 남겨놓고 신학교를 다시 들어갔다. 건축가보다 종교인으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1993년 서품을 받고 성공회 신부가 된 이후 나눔을 실천하는 그의 삶은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시작된 그의 사회운동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고 확산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 ‘나눔의 집’을 열고 청소년 쉼터, 노숙 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장애인 센터 등 사회적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다양한 공간과 기구를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적 경제 분야에 대한 폭을 넓힌 그는 귀국한 이후 한국의 사회적 경제 운동을 확산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에 더 열정적으로 뛰어 들었다.

지금은 나눔과 미래 이사장,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GSEF) 공동의장, 도시재생협치포럼 상임대표 등을 맡아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일을 주도적으로 꾸리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복지를 위한 사회적 장치와 기구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교회란 이름을 달지 않고도 기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그는 ‘걷는 교회’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이 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최근 새로운 사회적 금융 생태를 만드는 사회적 금융 추진단 단장을 맡게 돼 더 새로운 의지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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