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추사와 더불어 전주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을 꼽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추사에 비해 창암은 너무 알려져 있지 못하다. 창암의 글씨는 유수체로 불리운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는 뜻이다. 그는 서울의 명문가 출신인 추사와 사뭇 다르게 정읍에서 태어나 10세쯤 원교 이광사의 서첩을 보고 감동을 받아 글씨를 익혔으며, 글씨에만 전념하였다. 이광사는 조선의 대표적인 동국진체의 서예가로 꼽히는데, 이는 중국풍을 벗어나 조선조 풍의 서예를 구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추사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성향과 원교의 동국진체가 마주치는 모습이다. 추사가 보기에 동국진체는 지역성을 대변하는, 촌스러운, 정통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었고,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길에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글씨를 떼도록 했다는 고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폄하되었다. 그러나 9년 간의 유배를 마치고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떼어놓은 편액을 다시 걸도록 했다고 한다. 추사가 창암을 만나는 장면도 있다. 1840년 가을, 추사 55세, 창암 71세, 귀양 길의 추사는 전주 한벽루에서 창암과 마주한다. 창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추사가 정중히 하필을 청하니, ‘붓을 잡은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사양했으나 다시 간곡히 청해오자,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이라고 썼다. 이에 추사는 ’명불허전‘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9년 뒤 추사가 다시 전주에 왔을 때에는 이미 창암은 고인이 되었다. 이에 추사는 ’명필 창암 완산이공지묘‘라는 묘비문을 썼다고 한다.
창암은 원교가 제기한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이다. 가장 정교하게, 자연스럽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성을 창암의 글씨에서 맛볼 수 있다. 촌스럽다고 폄훼되기 쉬운 지역성을 예술성의 극치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그의 서예는 중국의 전통성에 근거를 둔 맥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창의성을 선사한다. 창암을 다시 들여다봐야 지역 문화가 산다. 창암은 지역성이 어떻게 최고로 승화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다. 조선과 현대를 통 털어서 전주에 창암 만한 예술가가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유홍준 같은 이가 고구마 인장을 섰다고 폄하하지만, 창암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벼루 3개가 구멍이 날 정도로 연마했던 그의 필력은 형식성을 초월할 정도로 극에 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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