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1월 9일 포크 일행은 기묘한 악단과 함께 익산으로 진입했다. 포크의 방문을 기다린 익산 주민들은 지붕 위를 포함해 모든 곳을 뒤덮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포크를 맞이했다. 그러나 포크는 이들을 무시하고 가장 신속한 동작으로 관아 맞은편 집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포크의 가장 큰 스트레스, ”화장실 가기“
포크가 조선의 지방을 조사 과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화장실’ 이용이었다. 9월달 그가 처음 개성에서 접한 조선의 화장실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방문 밖에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개성 객사?) 정원 건너편 70피트(21미터) 정도의 거리에 ‘변소’가 있었다. 낡아서 다 쓰러져가는 헛간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 주변에는 ”쪼그려 앉아 일을 볼 때 필요한 돌” 몇 개를 모서리에 얹어 놓았다. ‘변소’에 갈 때면 한 명 또는 두 명의 병사가 반드시 함께 했으며, 나머지 몇 명은 내가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낮고 긴 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는 발로 걷어차였다.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가 기록한 상황별 한국어 표현 중 화장실 간다는 표현을 두 가지로 나눠 기록한 부분이다. 즉, ‘화장실에 간다’는 일반적인 표현은 “뒤퍼(Tui-po)로 기록하고 ‘똥 싸러 간다는 천박한 표현’은 ”똥누(Ttong-nu)“로 표기해 화장실이 급할 때 사용할 현실적 표현까지 남겨두어 웃음이 났다. 특히,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 거리에 용변이 널려있고 화장실이 불비한 상황과 140여년이 지난 현재 2020년대 대한민국 화장실문화가 세계인의 칭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 점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노력에 따라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실감케 한다.
△10년후,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삼례에 도착하다.
익산군수의 환대와 시끌벅적한 잔치상을 뒤로하고 포크는 3시 5분 익산(금마)을 출발했다. 4시 10분에 누추한 작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남쪽으로 길을 계속 가서 5시에 삼례찰방도(S'hum-nye chalpang-do)에 도착했다. ‘찰방도(察訪道)’란 조선시대 정보 통신을 위해 10대로를 중심으로 말과 인력을 관리하는 ‘역참’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찰방’ (종6품)을 둔 곳으로 현재 전라북도 일원의 12개 역을 관할했다. 삼례도는 조선시대의 10대로 가운데 한양에서 제주로 구간에 설치되었는 데 ‘삼례도역’은 일본 헌병주차대와 일본인 소학교로 이용되다가 광복 후에 삼례 동부교회로 이용되고 있다. 삼례도 찰방역의 7개 건물들 가운데 본청은 덕류당(德流堂)이고 말을 위해 제사지내던 마신당(馬神堂)은 교회 뒤편의 언덕에 있었는데 1990년 초 필자 방문시 관련된 당골할미가 수년전 돌아가신 이후 관련 공간은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삼례에서는 포크도착 다음날인 9월 23일 장이 열릴 예정인데 이미 장터가 열려 있었다. 이는 오일장이 매일 열리는 상설장으로 발전하는 조선 후기 현상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주막이 꽉 차 가축우리 같은 방 한곳에서 포크와 통역인 전양묵, 집사인 정수일 등 세 명이 모두 함께 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부자동네 전라도가 부자가 아닌가?
전라도의 관문인 삼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포크는 서울에서 전라도가 상당히 풍요롭다고 한 이야기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우리는 평야 지대에 머물렀다. 인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내 기대와는 달리, 비록 벼는 풍부한 소출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서울의 많은 조선인들이 이야기했던 이 지역의 풍요로운 상황이나 부유함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집과 옷차림은 서울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목재가 매우 드물어서 집은 대부분 진흙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장독과 그릇들은 품질이 더 좋았고 수량도 많았으며, 부엌 살림살이도 더 많아 보였다.”
이 같은 의문은 전주에 도착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서울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집들도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기와집은 드믉며 경기도나 충청도에 비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그런데 정작 장독과 그릇, 살림살이는 더 좋아보였다는 역설적 상황이 기록되고 있다. 즉, 겉은 허술해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윤택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문은 4일뒤 정읍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집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그런다면 관아의 관리가 그들을 붙잡고 돈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조선의 관리들 중 ‘공명첩’(이름이 비어있는 관리 임명장)을 돈으로 사서 지방 관리가 되어 재임동안 각종 명목으로 백성의 재산을 약탈해가는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즉, 전라도가 부유한 곳인데 집이 누추했던 것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한 소극적 대응법의 결과였던 것이다.
또한 포크는 삼례 숙소에서 역관인 전양묵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묵(통역 관리)은 관리들이 부유한 백성을 불러 뇌물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를 거절하면 그들은 매질을 한다. 그런데 백성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면 오히려 종종 나쁜 관리를 공격해 서울로 쫒겨나게 한다고 했다.”
즉, 포크는 삼례에서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뇌물 요구가 한계에 달하면 마지막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관리들을 공격해 쫒아냈다는 충격적 발언을 듣게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10년후 전라도 지역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한 내용이었다. 이같이 풍요로운 전라도를 가난하게 만든 것은 부패한 관리를 양산한 당시 고종-민비정권이었다. 결국 1884년 11월 미국인 포크가 방문한 삼례에서 들은 조선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10년 후인 1894년 11월 삼례 그 자리에서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외치는 동학농민혁명군의 구호와 행동으로 백성 스스로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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