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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9) 1884년 미국외교관 포크의 전라도 기행을 마치며

1884년 11월1일-12월14일까지 조선의 충청-전라-경상 등 삼남지역 조사를 위한 포크의 전체 일정 가운데 이번 기획을 통해 연재한 부분은 11월8일-11월 20일 사이의 전라도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고 실제 내용은 전라북도 권역에 한정하였다. 이번 연재를 마치며 남원일대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11월 15일 나주에 도착한 포크는 자신이 나주까지 와야 했던 핵심 목표인 나주앞 영산강 포구에 쌀을 수송할 수 있는 ‘침몰하지 않는 증기선’이 들어올 수 있는 지에 대한 내용을 집중 조사하였다. 포크의 나주 물길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주의 내륙수로) 남쪽으로 1마일(1.6km) 거리쯤에 폭이 좁은 강(江)[영산강]이 있었다. - 지도 [대동여지도]에 나와 있는 강이었다. 이곳에는 조수가 있었는데 조수간만 차이가 대략 4-5피트(1.2-1.5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하지만 배는 나주에서 10리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 이 같은 조사내용 결론은 결국 나주 영산포까지 쌀 수송을 위한 증기선의 진입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후 포크는 광주로 가는 도중에 영산강 나루에서 자신의 짐을 실은 나귀가 물에 빠져 공들여 찍은 대부분 사진의 유리원판들이 깨지거나 물에 젖어 손상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1월 18일 담양을 지나며 사찰터에서 만난 석당간의 신비로움에 빠져 직접 담양 석당간을 그려 수첩에 남겼다. 이 같은 한국의 종교신앙과 불교문화에 대한 포크의 호기심과 관심은 남원 초입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11월 19일 순창을 지나며 ”순창은 미소(miso, 일본 된장)를 만드는 소스인 된장과 빨간 고추로 만드는 고약 같은 혼합물(고추장)로 유명했다. 조선에서 최고였다! “는 찬사를 남기고 남원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포크는 전라도는 대체로 나무와 목재가 매우 희귀하며 충청도에서도 비슷했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길의 협소성과 관리의 문제를 들며 조선의 마을들은 도로가 발달되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남원초입에서 현재의 만복사지 유적을 만난 포크는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있었다. 나는 네 장의 사진을 찍었다. 노출 시간은 11-13초(해가 밝고 날씨가 좋았다)였다.“라고 적고 특히, 만복사지 입구의 석인상과 불상 등에 매료되어 ”부처의 얼굴과 옷, 자세는 평생 본 중에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 진정으로 아름다웠다.“와 같은 많은 설명을 남겼다. 또한 남원 성벽이 보수되고 있는 상황을 기록하고 남원지역 전체 도면을 작성했다. 특히, ”남원 주변에서 나는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특이할 정도로 많이 봤다. 그리고 키가 무척 큰 남자들도 많았다. 일부는 완전히 유럽 사람의 얼굴이었다.“ 라고 기록해 남원사람들 가운데 키 크고 옷 잘 입고 이국적인 얼굴 모습이 많이 남아있음을 기록하였다. 한편, 포크는 남원 초입부터 가마꾼들이 기생 여주인공이 살았던 곳이 어디냐며 흥분했던 곳을 찾아 오작교(烏鵲橋)(O-chak-kyo)와 광한루(廣寒樓)(Kwang-wol-nu)에 올라 강 건너 언덕들과 연못을 보며 ”이 다리와 집은 조선에서 무척 유명했다. 모두에게 알려진 전설적인 판소리의 무대였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춘향전 내용을 소개하였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춘향전 영문번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매우 높다. 남원 광한루 오작교 이야기 (포크는 춘향전 제목을 이같이 붙였음 옛날 옛적에 남원 부사가 있었다. 그에게는 아이 때 이름인 이도령으로 불리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가장 아름다운 기생인 춘향이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런 후 부사와 아들은 서울로 갔다. 그리고 새로운 부사가 남원에 내려왔다. 그는 백성들을 착취하기로 악명을 떨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는 춘향을 원해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그가 묻자 그녀는 이유를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리고 5-6년을 가둬두고 때때로 불러서 매질을 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동안 이도령은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과거시험을 통과하고 어사 벼슬을 얻어서 세 마리의 말이 새겨진 마패를 품고 전라도로 파견됐다. 그는 거지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남원으로 내려왔다. 부사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광한루에서 진수성찬을 차리고 잔치를 벌였다. 이웃 고을에서 관리들이 참석했다. 술, 여자, 밥, 그리고 시(詩)가 있는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졌다. 손님이 모이고 더러운 옷을 입은 어사도 참석한다. 부사는 서둘러 하인들을 불러 그를 쫓아내라고 한다. 하지만 운봉(雲峯)(Unpong)의 영장이 어사의 신분을 반쯤 알아차리고 말한다. “그를 머물게 합시다.”(그의 주장은 그도 부사와 마찬가지로 남자이므로 그 역시 이곳에서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길 자신의 차림새가 거지같아서 한 명을 제외하면 어떤 기생도 그의 곁에 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어느 소녀가 곁에 있다면 술맛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옆의 기생이 그를 의심했다. 그는 운봉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소고기를 좀 주시오.” 운봉이 많은 양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다리를 뻗고 긴 소매로 고기를 쓸어버리고 관리의 얼굴에 국을 엎어버렸다. 그는 시를 한 수 쓰겠다고 했다. 운봉이 그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썼다. “금잔의 술은 천인(千人)의 피요, 옥쟁반의 음식은 만인(萬人)의 기름이다. 음악은 백성들의 신음이다.” 운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운봉영장은 “저는 이만 가보겠소이다,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면서 자신이 왜 앞으로 가지 않는지 의아해 했다. 바로 그때 어사 역시 자리를 뜨고 그의 일행들이 쳐들어와서 부사와 군중을 두들겨 패고 일부를 잡아갔다. 부사는 바지에 일을 보고 말았다. 임실의 현감은 쥐구멍에 머리를 쳐 박아서 사람들이 머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신기해했다. 어사가 의복을 갖춰 입고 돌아와 춘향이를 불렀다. 다른 기생들이 그녀가 쓴 칼을 벗겨냈다. 그는 모든 사연을 편지로 써 왕에게 보냈다. 왕은 춘향이를 어사에게 아내로 주고 관직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이도령의 일생에 관한 아주 긴 노래(판소리)의 일부분이다. 전라도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를 노래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들이 많았다. △필자는 향후 이들 자료의 구체 내용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검토를 약속하며 본 연재를 마칩니다. <끝>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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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11 17:33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8) 전주를 떠나 나주로 향한 포크의 여정

△원평마을에서 밤길을 밝히는 횃불로 포크를 맞이하다. 1884년 11월 12일까지 2박3일동안 머물렀던 포크는 12일 오전 다음번 목적지인 250여리 떨어진 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아직 추수가 진행 중인 논 사이를 지나며 그해 비가 많이 내려 벼에 달린 알곡량이 적다는 전라감사의 말을 확인하며 금구쪽으로 향하였다. 소나무숲이 풍성한 금구초입을 지나 음식이 차려진 금구관아를 지나쳐 주막에 머무르자 뒤쫓아온 나이든 현령(김병숙)이 예를 갖춰 맞이하고 ‘좋은 술’을 가져오게 해 대접하고 술값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여정을 진행해 5시50분 어두워진 길을 지나 큰 장이 열린 마을로 진입하였다. 이때 앞서가던 길나장이들이 밤 길을 밝힐 횃불을 책임진 ‘유사’를 외치자 마을사람들이 빽빽한 초가집 사이로 횃불을 들고 나타나 포크일행을 맞이하였다. 포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 관리들의 공식행차인 경우 어두워진 밤에 길을 가야할 상황이면 마을마다 횃불을 책임지는 ‘유사’라는 존재가 있어 길나장이들이 ‘유사!’를 외치면 이들이 주민을 독려해 다음 마을까지 횃불로 이어주는 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같이 포크는 밤늦게까지 길을 갈 경우 유사를 불러내 횃불로 불을 밝히고 목적지까지 강행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특히, 이 같은 내용은 조선시대 야간 군사훈련인 야조(夜밤 야操조련할 조)진행시 횃불을 밝혀 군사이동 등을 도왔던 연거(演멀리흐를 연 炬횃불 거:횃불을 멀리까지 밝힌다) 행사와 비슷한 모습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포크는 잘못하면 화재가 날 것같은 상황에서 원평주막에서 숙박을 하였다. 이곳은 마당이 넓고 가장 깔끔한 방이 있었는 데 자신이 원하는 만큼 깨끗하고 맛있는 밥이 나왔다고 특별히 기록에 남겼다. 군령다리 마을에서 갈재(노령)을 넘어 장성 원덕리에서 포크가 만난 첫 번째 미륵상. /필자 제공. 유리원판 사진 촬영(노출 3초 조리개1/4) △정읍 갈재(노령)를 넘어 장성초입 미륵불을 만나다. 11월 13일 원평을 떠나 포크는 크고 예쁜 마을인 태인을 지나며 마을 한중간에 있는 섬이 있는 연못(피향정)을 지나 길을 재촉해 저녁 6시5분 정읍의 군령다리마을에 도착했다. 포크는 이곳의 이름이 군령(軍令)다리(‘군대명령 다리’) 마을이란 점과 바로 다음 지역이 “긴 성벽의 요새”라는 의미인 ‘장성(長城)이란 점, 그리고 두 지역 중간에 있는 갓바위산 위에 있는 산성(입암산성)등의 군사적 중요거점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기록을 남겨 군인으로서의 중요한 정보파악력을 보여주고 있다. 11월 14일 오전 현재 전북과 전남의 경계인 갈재(노령산맥)를 넘으며 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와 장성초입에 있는 원덕리마을의 미륵상을 지나며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골짜기 바닥 마을에 있는 미륵상(Miryok)을 만났다. 15피트(4.5m) 높이로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겨우 머리만이 인간처럼 보였다. 나는 긴 귓불과 이마 앞머리의 ∧∧∧문양을 보고 부처라고 판단했다.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자는 가장자리에 가리비 조개껍질 무늬가 있는 평평한 돌이었다.” 이 원덕리 미륵상은 돌기둥 모양의 석장승같은 이미지의 불상으로 수호신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불상이 있는 곳은 노령산줄기를 넘는 사람들의 숙박공간인 미륵원(彌勒院)이란 역원이 있던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장성의 [역원]에 “미륵원(彌勒院) 현 북쪽 21리에 있다. 원 북쪽에 돌 미륵불이 있는데 높이가 4, 5길이나 되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불상이 고려시대 양식인 것으로 볼 때 원래는 사찰이 존재하였던 곳을 조선 시대 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포크묘사 영신역원 구조와 명칭. a. main entrance(대문) b. kitchen(부엌) c. open center-yard(마당) d. guest rooms(건너방) e. host's room(주인방) f. anpang, wife's room(안방) g. shed for wood(땔나무간) h. stables(마굿간) i. shed(헛간) j. shelves for dishes(그릇 놓은 선반) k. porch(쪽마루) l. little room(쪽방)-sleep or rest m. front porch(앞 쪽마루) n. a shed-open for luggage & (창고) o. back gate(뒷문) p. cooking place heats room(부뚜막) △조선의 전형적인 주막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다. 이곳을 지난 포크는 장성 관아를 피해 장성 월평장(황룡시장)을 지나 5시경 외딴 주막에 도착했다.(위치상 영신역원으로 추정됨) 이곳은 다른 주막에 비해 꽤 크고 깔끔했으며, 포크는 여주인 방인 안방(anpang)을 차지고 통역인 전양묵과 집사 정수일은 주인 방을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의 방에 있는 작은 화장대용 상자와 약간의 비단 옷, 옷상자 따위를 본 정수일이 이 주막 주인이 보통 시골 백성들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고 ’주인의 배필‘인 안방의 주인이 아내가 아니라 분명 첩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녀가 조선의 시골 여자로서 좋은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곧이어 안방의 주인이 등장해 처음 본 서양인에 놀라 정상적인 응대를 못하는 상황이 진행되었는 데 포크는 그녀가 첩인 점을 확인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표현에 본 부인은 이곳보다 훨씬 허술한 곳에서살것이라는 말을 덧붙인 점이다. 한편, 포크는 이곳의 구조와 모양이 전형적인 조선 주막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림을 그려 주막의 모습을 도면으로 표현하였다. 이 기록은 1884년 11월 14일에 주막 현장에서 그려진 현존 주막에 대한 기록 가운데 유일한 구조도라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향후 이 그림을 근거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주막을 재현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더욱 중요하다 그 내용을 보면 주막의 공간구조는 전형적인 □자형 공간으로 이 구조는 19C말-20C초에 활동한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에 나타난 ‘넉넉한 객주’ 모습이나 ‘촌가녀막’과 기본적 구도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준근의 그림은 앞서 포크와 같은 시기 근무한 영국 외교관 칼스의 저술에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시기 상황으로 파악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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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7 13:16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7)포크의 여행과 관련된 행정기록들

△호조를 발급받아 여행을 다니다. 1884년 9월과 11-12월 2차례에 걸친 조선지역 조사를 위해 포크는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1882년 12월 설치된 외국과의 외교교섭과 무역거래업무 전체를 관장하는 행정부서)’에서 발급한 국내여행증명서인 ’호조(護:보호할 호 照비출 조)‘를 발급받아 자신이 방문한 지역 최고 책임자들에게 확인을 받으며 조사여행을 진행하였다. 호조(護照)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통행증명서로서 개항 이후 외국인 통행증의 개념을 지닌 증명서였다. 호조의 발행은 주로 중국 및 일본 상인을 위해 발급되었던 것인데 포크의 호조는 미국공사관 외교관의 호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가 크다. 포크는 충청-전라-경상지역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각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감사를 비롯한 관리들에게 제출하고 승인을 받았다. 이를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 갑신년 8월 발급된 호조와 갑신년 9월 발급된 호조 두 가지가 전하는데 갑신년 9월 발행 호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護照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爲 給發護照事照得 美國人海軍中尉福久氏游 歷忠淸全羅慶尙道等地 合行給照護送仰沿途 各官驗照放行毋令阝且滯該員亦不得 藉端遠留致于事究切切須至護照者 右給 海軍中尉福久氏 持憑 甲申九月 初八日 限 回日繳銷 忠淸監司 朴齊寬 忠州牧使 李鎬喆 晉州牧使 金靖鎭 全羅監司 金聲根 羅州牧使 朴奎東 호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미국인 해군중위 복구씨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지역을 다니는 것에 대한 호조를 발급함. 지나는 길의 각 관리들은 호조를 살펴보고 통행을 허가하며 (방해받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해당 관원은 또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머물게하여 조사를 받는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 이것을 해군중위 복구씨에게 지급하여 증빙으로 소지하게 함 갑신년 구월 초팔일 돌아오는 날을 한도로 하여 효력이 정지됨 충청감사 박제관 충주목사 이호철 진주목사 김정진 전라감사 김성근 나주목사 박규동 △포크의 여행경비 차용과 비용 반환기록 한편, 포크가 소지한 호조는 단순 여행 허가문서 기능 이외에 ‘여행경비 현지 차용허가’ 기능도 갖고 있었다. 즉, 포크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비용을 지급했는데 당시 매일 지급한 기본비용은 조사단 18명의 매끼 식사비(20-30푼), 짐 운반 말 사용료 10리 당 50-60푼, 12명 가마꾼 10리당 50푼 등으로 포크가 계획한 1일 90리를 갈 경우 매일 지급되어야 할 비용이 식사비 1620푼, 말 3마리 임대료 1,350푼, 가마꾼 12명 일당 5,400푼으로 총 8,370푼이었다. 당시 포크는 비용지급을 위해 조선화폐인 상평통보 1푼과 당오전 5푼을 지참하고 관련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1푼짜리 1,000개의 무게가 3Kg 이상이란 점을 고려할 때 8,370푼의 무게는 하루 25Kg에 달하는 무게로 엄청난 무게의 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같은 과중한 무게의 경비는 한꺼번에 준비해 50여일에 가까운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에 포크는 조사 기간 동안 경유하는 지역의 감영과 목 지역에서 관련 비용을빌려 쓰고 이후 서울 복귀 후 변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크는 자신이 여행하는 도중 갑신정변(1884.12.4.-6/양력)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실패한 사실을 12월 8일 경상도 상주로 가던 도중 점심 무렵에 듣게 되었다. 특히, 자신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민영익의 피습(생존여부 불명) 소식은 이후 조선의 민심이 급변한 상황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조선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활동을 마치고 12월14일(양력) 서울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미국공사 후트에 의해 일주일만인 12월 21일 임시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이같은 혼란 상황 속에서도 포크는 12월 24일 갑신정변 실패 후 친청 수구파로 재구성된 조선 정부의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에게 전라감영 등에서 빌린 차용금을 반환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미안美案]에 남아있다. 내용은 영문과 한문으로 되어 있는 데 영문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내륙지방 여행을 시작하기 전인 10월 28일에 폐하 외무부로부터 받은 신용장과 함께 이 자리에 다시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서신을 제시한 후 아래와 같은 금액을 지급 받았습니다 충청도 공주-충청감영 10000 푼 전라도 전주-전라감영 5000 〃 전라도 나주-나주목 10000 〃 경상도 진주-진주목 20000 〃 충청도 충주-충주목 5000 〃 총액 62000 〃 각 지역의 금액과, 저에게 돈을 선불한 지방 및 지역 이름과 함께 직원이 직접 작성한 확인내용이 신용장 뒷면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신용장의 조건에 따라 돈을 제공한 각 관리에게 나는 영문으로 된 영수증을 주고 금액도 한자로 표시했습니다. 신용장을 가지고 저는 총액 62,000푼을 폐하의 외무부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영수증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이 서신을 마치면서 저는 여행하는 동안 저에게 매우 귀중한 신용장을 제공해주신 폐하의 외무아문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뜻을 받들어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C. 포크 미 해군 중위 미국 해군성 조병호 외무독판 각하께 차용금액 단위를 영문에서는 ‘푼(pun)’으로 표시하였는 데 한문으로는 ‘량(兩)’으로 표기해 100푼(分)=1兩 단위 환산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포크의 조사일기에는 앞서 공주에서 받은 5푼 동전 10000푼 중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전주이남 지역에서 5푼 동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5푼 동전 4000개를 1푼 동전으로 바꾸고 역시 추가로 전라감영에서 5000푼을 더 요청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5푼 동전은 1883년(고종 20) 2월에 주조된 당오전(當五錢)을 말한다. 주목되는 것은 포크가 전주에서 들은 내용인 “전주 이남지역에서 5푼 동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당오전은 비록 명목 가치가 상평통보의 5배로 결정되었으나, 경기도·황해도·충청도 등 정부의 행정력이 비교적 쉽게 미칠 수 있는 지역에서만 통용되었던 상황을 반영한 사실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년후인 1885년 전라감사 김성근이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의해 비리가 지적되었는 데 그 가운데 서울로 보내는 엽전을 모두 당오전으로 바꾸어 보낸 사실 등이 문제되어 벼슬이 박탈되는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앞서 포크의 당오전 20,000푼을 1푼전으로 바꿔준 사실이 이 같은 문제와 연결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감안되었는 지 전라감사 김성근은 1년 뒤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복귀되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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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4 17:32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6) 포크가 만난 조선의 여인 –전주기생

포크는 44일동안 조선의 남부지역을 지나며 다양한 조선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기록이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자신을 위해 북춤을 추고 권주가를 불렀던 전주 기생(妓生)[Kisang]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전주를 떠나기 전날 그의 일기 마지막에는 서울과 전주에서 보고 들었던 기생들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이곳 감영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자와 매춘부, 기생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관아에 복무하는 존재였지만 민가에 나가는 것도 허용되었다. 서울의 궁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라감영에 존재한 많은 여자들 가운데 매춘부와 기생을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나타난 ‘기생(妓生)’의 ‘기(妓)’란 ‘여악(女樂)’ 즉, ‘여자음악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기녀를 창기(娼妓)로 불렀던 사실은 고려, 조선시대에 나오는 데 <성종실록>에서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기(娼妓)는 본래 어전(御前)의 정재(呈才:대궐에서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와 대소의 연향(宴享:국빈을 위한 잔치)를 위하여 마련된 것인데 ...” ( 성종 9년(1478) 11월 23일) 라고 하여 결국 왕실과 국가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여성 음악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런데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배우는 단계에 있는 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생(生)’자를 붙였다. 결국 생(生)이란 배우는 자라는 의미의 생도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생은 여기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생이란 의미로 나타난 표현이 일반화된 표현으로 파악된다. 이같은 사정은 성종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보낸 글 가운데 여기(女妓)를 양성하는 창기소(娼妓所)가 서울과 지방에 분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경외(京外)의 창기소(娼妓所)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宴享)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 “(성종 17년 10월 27일 ) 그리고 이 같은 양성기관이 교방이었다. 전라감영 교방에는 19세기 후반 호남읍지등에 전주부 교방에 34명의 기생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앞서 포크를 위한 북춤을 추고 권주가를 불렀던 4명의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들은 그야말로 전문 음악인인 ‘창기’가 되기위해 전라감영 교방에서 수련을 쌓고 있던 ‘기생’들이었다. 그리고 4명의 무용수들에 앞서 등장한 2명의 나이가 들은 여인들은 이들을 ‘교육하는 창기’였음을 알 수 있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쌍검대무(雙劍對舞)>,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1749년 신광수(申光洙)의 '樂府上寒碧堂十二曲中 三曲(악부 상 한벽 당십이곡 중 3곡)'의 ‘전주 어린 여학(女學:교방기생)들은 남장을 좋아하네. 한벽당 속에 검무가 한창이네. 全州兒女學男裝(전주아녀학남장) 寒碧堂中劒舞長(한벽당중검무장) 내용을 연상케 한다. 한편, <훈몽자회>(조선 역관이자 중국어학의 대가인 최세진이 1527년(중종 22)에 쓴 한자 학습서)에서 창(娼)을 녀계 챵, 기(妓)를 녀계 기로 설명하고 있는 데 이들 ‘녀계’가 음악과 춤을 담당한 여자들에 대한 총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녀계’의 남편들이 모두 ‘악공(樂工)이라고 기록해 이들 ’녀계‘의 성격이 전문 여성 음악인에 대한 총칭이었고 같은 음악을 하는 악공과 가정을 이룬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녀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여성음악 전문직이었다. 그런데 포크일기를 정리해 처음 책으로 간행한 사무엘 훨리 교수는 포크의 11월 11일 전주기록에 연이어 포크가 자신의 조사일기 중 맨 마지막 부분에 [일반사항]이란 제목으로 ‘조선의 매춘부’라고 제목을 달고 별도로 기록한 다음 내용을 첨부하였다. [일반사항] 조선의 화류계 여인들 외입쟁이(We-ip-chang-i) : iro otoko (이로 오토코 いろおとこ:色男) (정부(情夫), 호색한을 뜻하는 일본어) 은근짜(Unkuncha) : 은밀한 매춘부, 버려진 메카케(めかけ) (일본어로 첩을 의미) 더벅머리(Topongmori) : 공개된 매춘부, 하지만 메카케. 통지기(Thongjiki) : 서방질을 잘하는 계집종. 사당(Satang) : 남자의 등에 업혀 다니는 시골 여자들, 주막의 가수이자 협잡꾼이다. 큰 고을에는 없다. 색주가(Sakchuka) : 술을 파는 여자, 선술집의 협잡꾼, 집에서 몸을 파는 창녀로 보면 된다. 집에 머문다. 대개 이런 집들은 많은 수가 가까이 모여 있다. 각 집에 창녀가 한 명씩이다. 서울의 서문 밖에 많다. 기생(Kisang) : 별감 가마꾼의 첩, 승지 사령의 첩. 이들은 두 종류의 길나장이가 빌려준다. 이 남자들은 기생 외입쟁이(We-ipchangi)이다. 서울의 기생 외입쟁이는 가끔 여자들 문제로 큰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대략 종로나 남대문으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곤봉 따위로 싸우며 기생 구역을 다툰다. 이 기록은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존하는 조선의 화류계 여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 가운데 가장 앞선 기록으로 파악된다. 종래 ‘조선의 화류계 여인’에 대한 가장 자세한 첫 기록은 1927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이다. 여기서 ‘해어화(解語花)’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당나라 현종(玄宗)이 양귀비를 ‘해어화’라 지칭한 것에서 유래했는 데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한국기록에서는 연산군,광해군 기록에서 실제 특정 기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어 ‘해어화’가 기생을 부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이능화가 이를 책이름에 사용하여 ‘해어화=기생’이란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능화는 이 책에서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내용을 상세히 밝혔다. 책은 모두 35장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8장에서는 조선에서 기생제도를 설치한 목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잔치에 흥을 돕기 위해서이고, 둘째, 의녀나 침비 같은 기능직을 맡기기 위해서이며, 셋째, 변방의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고, 넷째, 지방의 관청에서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마지막 35장에 갈보종류총괄(蝎甫種類總括)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조선의 화류계 여성들에 대한 종류를 소개하였다. (갈보는 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갈보(蝎鋪)’라고 빈대를 적은 대목이 있다. 이능화는 ‘피를 빠는 곤충’에서 갈보에 빗대어 이들 여성을 설명하였다.) 기생(일패)은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지방 관아의 교방에서 가무교습을 받은 여악(女樂)으로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30여세에 관기를 은퇴하여 술집을 열거나 전업하였다. 은근짜(隱君子(이패)는 은근자(殷勤者)로도 불렸는데 남들 몰래 매춘(賣春)을 하는 부류 탑앙모리(搭仰謀利=더벅머리?, 삼패)는 잡가정도를 부르며 매춘 자체만을 업으로 삼는 부류를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삼패에 속하는 자로 사찰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각지로 돌아다니며 묘기와 몸을 파는 여사당패(女社堂牌),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色酒家)였는데 작부(酌婦)로도 표현. 이같은 이능화의 분류 내용과 설명은 현재 ‘표준국어대사전’등 대부분의 자료에 이들 내용이 거의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1884년에 이미 포크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이들의 명칭과 성격을 나누어 체계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조선의 실상을 세밀히 조사하는 군사정보원의 역할을 수행한 포크의 정보 수집내용의 양상과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포크의 소개자료에서 주목한 것은 맨앞에 언급된 외입장이와 기생과의 관계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능화가 사용한 일패, 이패, 삼패같은 등급화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최근 이능화의 이같은 조선 기생에 대한 일패, 이패, 삼패 라는 왜곡된 기생의 정의와 분류법과 설명에 대해 여악의 전통을 계승해온 전문예인인 기생을 조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까지도 몸을 파는 조선의 창녀 매춘부 가운데에서도 가장 하위계급의 집단인 갈보로 왜곡시켜 놓았고 존재하지도 않던 일패라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냈고 당시 일반 시정에서 매음을 병행하며 잡가 정도만을 할 수 있었던 삼패를 가무를 전업으로 하던 전문 예인집단인 기생의 범주에 자의적으로 끼워넣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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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30 15:21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⑮포크가 만난 전라관찰사, 김성근

1884년 11월 10일 전주에 도착한 포크는 전라감영을 방문해 당시 50세였던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을 만났다. 김성근은 안동 김씨로 헌종1년(1835) 한성(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철종 12년(1861)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9년(1872) 성균관 대사성(정3품 성균관 전임 관원) · 좌승지(정3품 승정원=비서실, 호조담당)를 역임하였다. 1874년 이조참의(판서(장관)-참판(차관) 다음의 정3품 관직(차관보)를 맡았고, 1879년부터 예조 참판(종2품, 차관급) · 호조 참판 · 한성부 부윤(종2품 시장)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1883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서재필의 외숙(外叔)으로 서재필박사가 어린시절 한양 김성근 집에서 지냈다. 전라감사 김성근은 부임 후 흉년으로 피해가 큰 백성에 대해 휼전을 부과하고 신역을 탕감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수재나 화재 발생시 구휼조치를 시행하였고, 특히 나주 등 10개 고을의 진결(묵힌 토지)에서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폐단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또 1884년 초에 발생한 가리포민란을 조사하여 흉년에 탐관오리의 탐학이 더해지면서 민란이 발생하자 가담자와 부정관리 모두 법규대로 처리해고 하는 등 지방관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데 힘쓴 것으로 평가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임기가 만료되어 1884년 12월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고, 1885년 2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그런데 1885년 전라도 좌,우도암행어사 모두 김성근의 전라도 관찰사 재직시 규례위반과 공금 유용 혐의로 징계를 올려 의금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 결과 어사의 규탄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임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복직되어 공조, 형조, 이조, 예조 등의 판서직을 두루 거쳤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5월24일 예조판서로서 조경묘와 경기전 어진 배봉문제로 전주에 왔었다. 1903년 탁지부(재정부) 대신을 거치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후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성근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관련 행적이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김성근의 말년 행적은 전형적인 조선지배세력 중 일제에 투탁한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여준 사실을 보여주었다. 1913년 다나까 세이고우(田中正剛)가 편찬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서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풍채가 훌륭함, 높고 귀한 관직을 두루 지냈으되 청렴함으로 스스로를 지켰고 필법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나이가 현재 팔순인데도 여전히 완력이 웅건한 까닭에 높은 명성이 일세에 뚜렷이 드러난다고 평하였듯이 서예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 <근역서화징>에 글씨가 전한다. 1919년 사망하였다. △전라감사 김성근, 자신의 환생관련 이야기를 포크와 나누다.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다시 만난 전라감사 김성근은 포크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되어 전주의 승려가 환생하여 자신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포크에게 전했다. ”꽤 많은 대화가 이어졌고 점점 동양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그는 얼마 전, 전라도의 어느 산속 동굴에서 발견된 50년 된 종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는 “나는 불교 승려 ○○이다”라는 글에 이어 50년 전 날짜가 쓰여 있었고 이어서 “나는 (그 날짜)에 태어나서 전라도의 감사가 됐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쓰인 날짜가 그의 계산에 따르면 자신의 생일 해당 월과 일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말했다. ... 그는 오래되어 노랗게 변한 종이를 내어놓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번역해 주었다. 그는 이런 일이 불교적인 환생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미국)에도 이런 일이 있는지 등, 내 생각을 물었다.“ 이 내용은 매우 독특한 기록으로 포크의 기록과는 별개로 당시에도 이미 불교 환생담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즉, 앞서 소개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 1913년에서 김성근에 대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김성근)씨는 출생전에 전주군 원암산 원등암(遠燈菴)(현 완주군 소양면 청량산 '원등사') 석함속에 보관된 글 가운데 원등암의 승려 해봉(海峯)은 이름이 성찬(聲贊)인데 모년 모월일에 한성의 재상 김모로 태어나리라고 하였다. (김성근)씨는 호를 해(海)자를 사용하였고 이름에는 성(聲)자를 사용하였으니 기약치 않았으나 서로 부합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왕수인(王守仁)고사와 비교해 말한다. (氏出生前 全州郡猿岩山遠燈菴石盒中 有藏書曰本菴僧號海峯名聲贊某年月日書 後身爲漢城宰相金某云 氏號海字 名聲字 不期相符 世人以此比王守仁故事) 이 내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서예가로서 활동한 김성근의 독특한 환생담을 일본인들도 흥미로와하며 기록한 것이다. 이 내용이 남겨질 정도로 이미 당시에도 많이 회자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유사사례로 소개한 왕수인(王守仁)고사는 중국 명대(明代) 대표적 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양명학을 정립한 왕양명의 환생담이다. 즉, 왕양명이 제자들과 함께 중국 절강성의 진강(鎮江) 금산사(金山寺)를 방문하였다가 50년전에 돌아가신 스님이 자신으로 환생하였다는 게송(偈頌;스님이 돌아가시며 남긴 글귀) 기록을 발견한 사례와 김성근의 환생담 내용이 같다는 말이다. 전라감사 김성근이 포크에게 보여준 50년전 종이 기록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원암산에 원등암(遠燈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곳에 해봉이라는 주지가 있었다. 해봉 스님이 1834년 입적하면서 원등암 석굴에 조그만 석함을 두면서 “이 석함은 전라 감사로 부임하는 사람만이 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이 원등암을 찾아 석함에서 7언 4구절로 된 한시가 적혀 있는 서한봉투를 얻었는 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원암산의 붉은 해가 서울 도성에 떨어져 재상의 몸을 받게 되었으니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스님이지만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이 되도다 (遠岩山上 日輪月 影墮都城 作宰身 甲午以前 海奉僧 甲午以後 金聲根) 도광 14년(1834) 갑오 5월 15일 해동 사문 해봉 성찬이 원등암 16 굴 중에 향피고 묻어두다. 이후로 해봉스님의 이름을 따고 선비 정신을 기리는 뜻을 담아 호를 해사(海士)라 했으며. 많은 절을 찾아 다니며 부산 금정산 범어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구 팔공산 범어사 등 수많은 사찰의 편액의 글씨를 남겼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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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6 15:34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⑭ 포크, 전라감영의 신비롭고 위엄있는 문화에 최대의 경외심을 표하다.

△포크, 기묘한 전라감영 기생들의 북춤에 매료되다. 전라감영에서 포크가 경험한 대표적인 문화적 행사는 ‘춤추는 소녀인 기생들의 ’북춤‘이었다. 포크가 경험한 전라감영의 공식 환영행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선화당의 커다란 대청으로 연결된 방문이 열리고 키가 큰 6명의 토속 악단(3현6각)이 툇마루에 자리 잡은 모습이 보였다. 이어 어마어마한 가채를 머리 위에 올린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이 두 개의 나무패(박)로 손뼉을 치듯 소리를 내자 네 명의 소녀가 어여쁘게 차려입고 열을 지어 뒤편에서 천천히 들어왔다. 각각 10인치(25cm) 높이에 적어도 18인치(46cm) 넓이의 머리카락 뭉치를 머리위에 쌓아올려 그 무게 때문에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명은 녹색 치마를, 한 명은 어두운, 다른 한 명은 연한 푸른색 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길고 풍성했으며 뒤로 질질 끌렸다. 그리고 치맛단을 팔 아래 몸통까지 바짝 올려 묶었다. 치마 위로는 노란색 비단 겉옷을 입었다.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빨강, 파랑, 녹색, 노랑, 그리고 하얀색의 띠로 이루어진 곧고 넓은 소매가 달렸다. 길고 축 늘어진 노리개와 두꺼운 붉은 끈들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소녀들은 무척 어렸다. 16-17세가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몹시 창백한 얼굴에 그다지 예쁘지는 않았다. 악단이 기묘한 음악을 시작하자 뻣뻣하게 팔을 내민 채 천천히 미끄러지며 몸을 돌리는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노랑, 파랑, 그리고 하얀색 비단 띠로 장식된 커다란 북이 놓였다. 그 주변으로 무용수가 움직였다. 얼마간 한 줄로 움직이다가 다시 짝을 이뤄 마주보다가 등을 졌다. 그러더니 사각형으로 움직였다. 빨간 술이 달린 북채 네 쌍이 바닥에 줄지어 놓였다. 얼마 후, 소녀들이 줄을 이뤄 북채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자세를 바꾸다가 손에 주워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북 앞에 도달했고 다시 느린 동작으로 북 주변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곧 함께 북을 치기 시작했다. 매우 천천히 미끄러지는 듯한 무용수의 춤 동작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 춤 사진에 대한 위스콘신 대학 밀워키 도서관 자료 설명에는 “South Korea, dancers performing tongyong drum dance (victory dance): 한국의 통영북춤(승전무)을 추는 무용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포크는 ”자신을 감화시키기 위한 북춤(drum dance for my edification)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궁중잔치 때 춤추었던 대표적인 춤인 ‘무고(舞鼓)’의 내용으로 외방 관아에서도 관련 기녀들이 교류되어 연주한 북춤이다. 지방에서 행해진 것 중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통영의 승전무가 대표적으로 부각되어 위스콘신 대학 설명에서 통영 승전무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확히는 조선후기 의궤(儀軌)에 기록된 ‘무고(舞鼓)’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며 조선후기 전국 지방관아 소속 교방에서 연행되던 대표적인 춤의 내용으로 ‘전라감영 무고’로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춤에 대해 포크는 “가장 동양적이고 원초적”이란 표현으로 자신이 느낀 기묘한 신비감을 표현하였다. △전주 한정식의 원류 전라감영 음식과 술상을 받다. 한편, 공연이 끝나고 포크가 유리원판 사진을 찍은 후 음식을 가득 쌓은 두 개의 상이 들어와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 상은 1상에 10명이 먹을 만큼 많은 음식이 배열되어 있었고 예전에 큰 잔치때 상에 수둑히 쌓았던 당과더미 등으로 가득한 상차림이 특징이었다. 이 내용은 송영애교수(전주대)가 연구한 ‘전라감영 외국 손님 접대 상차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별도의 술상이 마련되어 앞서 춤을 추었던 기생 중 한명이 대표로 술을 권하고 나머지 기생과 함께 길게 소리높여 ‘권주가’를 불렀다. 포크가 통역을 통해 그 내용을 그대로 적었는 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고대의 황제[한 무제]는 아침 이슬을 모아서 마시고 장수를 누렸습니다. 이는 술이 아니라 불로주입니다. 마음을 다해 마시고 천세를 누리소서.” 이 내용은 <청구영언>이나 <가곡원류> 등에 전하는 십이가사 ‘권주가’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필자가 확인한 전주에서 불린 권주가와 가장 유사한 내용인 부산지역에 전승된 권주가는 다음과 같다. “잡수시오 이 술 한잔 한무제 이슬받은 이 술 한잔 천만년 잡수시오 잡수시오 술이 아니라 승로반(承露盤:이슬 받는 그릇)의 것이오니 잡수시면 장수하오니라”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술상을 치우자 기생 한 명이 문간으로 나서더니 다른 소녀들과 함께 길고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 잡쉈소(Ta-chap-susso)!” 외침소리는 관아의 남자들이 합창으로 받아 전해졌다. 포크는 이 모든 것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884년 11월 10일-12일 2박 3일간의 전라감영 도시 전주를 방문해 다양한 경험을 한 포크의 한마디 인상은 ‘경외심’이었다. 그가 전라감영에서 보고 접하고 느낀 수 많은 상황들은 그에게 “신비로운 동양적 전제국가의 문화적 위엄에 경외심을 갖게하는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내가 앉은 곳에서 보는 광경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장면보다도 더 동양적이고 원초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기묘하게 흥겨운 춤을 추는 소녀들, 우뚝한 기단 위의 관아건물(선화당), 용, 호랑이, 커다란 북, 붉은색 기둥, 창과 무기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리들, 문 옆에 초록색 옷을 입고 일렬로 선 소년들 - 이 모두가 모여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하나의 멋진 장관을 만들었다.“ 포크는 전라감영 전체 공간에서 풍겨 나오는 위엄과 아우라, 그리고 동양적 신비로운 의복과 색감, 형언키 어려운 음식과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음악과 춤 그리고 각종 의전 등에 흠뻑 빠져 자신이 경험한 아시아의 대표국가 중국이나 일본 어디에서도 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었음을 극찬하였다. 이러한 전라감영관련 기록은 포크가 이전, 이후 타 지역을 조사하며 남긴 기록들과는 엄청난 질적 내용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조선 각 지역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며 여러 부정적 내용도 그대로 기록한 사례들과 비교할 때 전라감영에 대한 감동적인 느낌을 그대로 남긴 기록은 전라감영을 복원하고 새롭게 재창조하자는 현재 우리의 목표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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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8 16:35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⑬ 포크 사진을 통해 전라감영 선화당 기물을 복원하다.

△포크 사진에 나타난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 기물들 포크가 찍은 현존 2장의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 사진을 통해 관련 기물 복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되였다. 첫 번째 전라감사가 찍힌 사진을 통해서는 지난 기고(2023.8.22.)에서 설명한 전라감영 선화당 용호병풍과 감사가 앉은 의자복원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전주 기생의 북춤’ 사진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가 나타났다. 사진에 나타난 내용들은 왼쪽 위에서부터 보면 ①선화당 주련문 ② 창틀 ③실내 목재 칸막이 ④중간 기둥 현판 ⑤ 삼지창형태 기물[둑纛]과 기치대 ⑥왼쪽 기둥 하단 종이싸개(주근도지) ⑦바닥 돗자리(지의) ⑧ 중앙의 큰 북 ⑨ 바닥 오른쪽 안식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포크의 조사기록에는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에 대해 사진찍듯이 묘사한 설명이 있는 데 사진 내용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선화당]은 찬란한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길이가 50피트[15m]나 되는 중심 구간은 전면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깔끔하게 돗자리[지의]가 깔려 있으며, 천장 나무들은 밝은 색상의 미세한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단청]되어 있다. 중앙에는 뒷벽에 기대어 두 개의 커다란 병풍이 나란히 서 있었고, 오른쪽은 훌륭한 용, 왼쪽은 사납게 날뛰는 큰 호랑이를, 둘 다 아주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그렸다. 그 앞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양식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앞에는 더 두꺼운 방석과 감사가 몸을 기대는 자세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좌대 받침[안식]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가로 세로 4피트 크기의 커다란 네모난 종이 등이 걸려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삼지창같은 무기와 장대[둑纛]들이 있는 기치대가 있었다.”포크 기록에는 선화당 건물 외양이 기본적으로 기둥에는 붉은 칠이 칠해져 있고 처마 아래 창방과 평방 및 공포에는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향후 선화당 등 건물단청의 기본 정보로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의 바닥 돗자리[지의]와 좌대와 안식, 삼지창[둑기]과 기치대 등이 언급되었고 사진에 보이지 않는 ‘천장의 가로 세로 4피트(120cm) 크기의 커다란 네모난 종이등’이 언급되었다. △조선 국왕이 전라감사에게 군사권을 위임한 상징, 둑기(纛旗) 복원 필자는 전라감영복원재창조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앞서 병풍복원과 함께 기물 고증을 진행하여 조선왕실 기물 전문가인 장경희교수(한서대)에게 연구를 부탁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진행된 가장 주목되는 복원품이 사진 ⑤인 ‘둑기’였다. ‘둑’은 감사를 상징하는 기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소꼬리나 꿩의 깃털로 장식한 큰 깃발인 ‘독(纛둑 독)’을 ‘둑’이라고 읽는다. 이는 고대 중국에서 장례에 사용되던 깃발[纛]에서 기원하여 한 대(漢代)에는 군사용 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왕이 지방 군사령관인 관찰사에게 군대 통솔권을 위임해준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긴 장대에 장식을 달아 깃발을 만든 것이다. ‘둑’은 고려시대이래 군통수권자를 상징하여 군영에 둑을 설치하고 둑 주변에서 군령을 집행하거나, 군대의 출병에 앞서 둑제사를 거행하여 군대를 통솔하는 상징으로서 활용했다. 이 전통이 조선에도 계승되었는 데 이와 관련하여 서울의 ‘뚝섬’ 명칭이 바로 이곳이 태조이래 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기 때문에 둑섬에서 뚝섬이 된 유래에서 잘 알 수 있다. 이같은 둑기가 전라감영 선화당 사진에서 확인되어 각 지방 군통수권자인 관찰사에게 이같은 둑기가 하사되었고 이를 집무실인 선화당에 비치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둑제(纛祭)를 지낼 때 사용하는 병기로서의 둑이고, 또 하나는 종묘나 문묘에서 무무(武舞)를 출 때 악기로서 사용하는 둑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병기에 해당되는 둑은 나무로 창처럼 생긴 자루를 만들고, 창 아래쪽에 말꼬리털로 만든 상모를 둥글게 꽂은 형태이다. 조선후기 의궤를 비롯한 문헌에 그려진 둑은 자루 끝의 창의 형태가 단창에서 삼지창의 형태로 변화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발견된 둑은 이 같은 조선 전 후기 양식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 후기 기물이 함께 비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둑을 복원하는 데 있어 다행히 삼지창 형태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둑 유물을 참고하고 단창은 <악학궤범> 그림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그리고 창날 밑에 술이 내려져 있는 데 붉은색 홍둑과 검은색 흑둑 2종류로 나뉘어져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악학궤범> 등 자료에 나타난 색이 모두 홍둑으로 되어 있어 일단 홍독(紅纛)으로 재현하였다. 그런데 최근 AI기술로 흑백사진의 음영값 등을 고려해 원래 컬러 색을 복원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주 기생들의 북춤사진’을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2020년 필자가 진행한 색 복원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복원된 사진에서 오른 쪽 둑기 색이 삼지창 ‘홍독(紅纛)’과 단창 ‘흑독(黑纛)’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향후 붉은 색 ‘단창 홍둑’을 검은 색 ‘흑둑’으로 수정해야 한다. 또 포크가 언급한 전라감사 및 기생들의 옷 색도 상당히 유사하게 나타나 향후 AI컬러 복원을 통해 사진속 인물들의 복장 재현에 참고할 수 있게 되었다. △선화당 주련문의 복원 한편, ‘북춤사진’에서는 기둥마다 ‘주련문’ 들이 보이고 있다. 주련(柱聯)은 시구나 문장을 종이·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 두는 것으로 건물의 격을 높이는 장식물이다. 경계와 교훈, 건물 자체의 정체성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라감영 선화당의 주련문은 전라도 최고 통치공간 선화당의 위격을 높여주는 가장 중요한 문화자원이다. 그런데 그동안 선화당 주련문의 실체는 알 수 없었고 단지 ‘북춤사진’에 나타난 일부 흔적으로 그 내용을 추정할 뿐이었다. 그런데 2020년 10월 전주역사박물관(당시 관장 이동희)에서 조선말 채경묵이 엮은 <풍패집록>에서 ‘선화당 주련’이 소개되었고 최근 국역 출간(이동희 등,<국역 풍패집록>2023)되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즉, 사진 속 정중앙의 글귀가 “염경장주춘의(艶景長住春意): 아름다운 경치는 봄기운 오래 머물게 하네”라고 하여 전주 천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는 글귀가 이번에 찾은 <풍패집록> 주련문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향후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의 주근도지, 지의, 사각 한지 등, 안식 등의 기물과 주련문 등을 복원하는 추가 작업이 요청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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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19:45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⑫ 포크의 기록과 사진, 전라감영을 복원하다

△포크, 각 지역 최초 사진들을 남기다. 포크가 조선에 재임하였던 1884년 6월 ∼1887년 4월까지 4년간 촬영한 사진은 현재 43장(밀워키대학 도서관 소장본)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1884년 11월 1일∼12월 14일까지 진행한 삼남지역 조사 기간 중 포크는 약 33장 이상의 사진을 찍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중 충청 전라지역에서 29장을 찍었다. 즉, 공주 공산성 남문옆 건물에서 군사책임자인 중군 및 아들들 사진 4장(1장 현존),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에서 은진미륵과 사찰 경내모습을 찍은 사진 6장(1장 현존), 충남 강경 전경 사진(1장 현존) 등을 찍었다. 그리고 전라감영에서 전라감사와 군중들, 기생 사진 등 모두 6장의 사진을 찍었다.(2장 현존) 정읍 노령 갈재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찍었고 장성으로 넘어가 장성 초입 현재 노령터널 바로 옆에 있는 원덕리 미륵불상을 찍었다. 그리고 나주에 들어가 읍성 사진, 목사와 군중, 남문 등 4장, 그리고 남원 만복사지에서 4장(1장 현존)의 사진을 찍었다. 따라서 이 기간중 촬영한 사진 중 충청권 3장 전라권 3장 그리고 부산 1장등 총 7장이 남아있다. 이들 사진 중 주목되는 것은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사진이다. 논산을 지날 때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마주한 거대한 불상에 감탄하며 자신이 함께 촬영 대상자가 되어 일행 중 한명(정수일?)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여 유일하게 포크 자신이 찍힌 사진을 남겨놓고 있다. 그 동안 이 사진에서 포크 모습은 검은색으로 매우 작게 나타나 주목되지 못했다. 필자가 개별 사진을 확대해 포크의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진에서 흥미로운 것은 포크의 조사 당시 복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즉, 1880년대 짙은 파란색 해군 장교 복장과 장교모자 및 가죽 장화를 신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습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의 복장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포크 일기에서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해군 장교 제복’과 ‘독수리 모습이 있는 모자’를 강조하였는 데 포크 사진에 나타난 모습과 복원된 1890년대 해군중위 복장에서 모자 중앙에 희미하게 나타난 독수리 상징모습이 드라마 주인공 유진초이 모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당시 사진현상과 인화는 유리판에 은화합물을 발라 밀폐된 나무판 필름홀더에 유리판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안에서 열리게 하고 다시 밀봉해 보관하다 암실에서 현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유리원판 필름을 사진으로 만드는 인화방식은 소금과 질산은 화합물을 발라 인화하는 방식과 계란 흰자를 이용한 알부민 인화지나, 젤라틴 인화지를 사용해 검은 상자에 보관하다 암실에서 유리필름에 밀착시킨 후 햇빛으로 인화하였다. 포크사진은 당시 유행한 젤라틴인화지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현존하는 43장의 사진은 유기 화합물이란 점에서 시간이 갈수록 퇴락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국 근대사의 실상을 담고 있고 일부 사진은 전라도 최초의 사진들이며 또 전라감영 역사의 증거라는 점에서 전라북도 차원의 사진자료 확보와 연구가 요청된다. △포크의 2장 사진 전라감영 선화당을 복원시키다. 필자가 포크 자료를 접하게 된 계기는 전라감영 복원 자료 확보과정이었다. 그리고 포크가 제공한 선화당 관련 정보는 1)포크의 일기 기록, 2)포크의 스케치 그림, 3)포크의 사진 3종류였다. 특히 중요한 선화당 내부와 관련하여 포크는 11월 11일자 기록에서 사진찍듯이 묘사한 전라감영에 대한 묘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선화당) ...가운데에는 뒷벽에 기대어 두 개의 커다란 병풍이 나란히 세워졌다. 오른쪽은 거대하고 화려한 용, 왼쪽은 맹렬한 큰 호랑이가 모두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고 적었고 순간적으로 스케치한 그림에서는 호랑이와 용을 크로키처럼 묘사하였다. 그리고 사진 2장은 전라감영에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였다 전주에서 찍은 사진 중 현존하는 2장의 사진은 전라감영 복원에 가장 중요한 선화당 내부의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먼저 전라감사와 육방권속, 나인들이 찍힌 사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진 배경인 병풍이었다. 이 병풍에 대한 자문(한국민화학회 회장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을 통해 중요한 복원 자료들이 확보 되었다. 즉, “전라감사 김성근과 6방 권속 및 나인을 찍은 사진에는 뒤로 약 2m이상의 병풍형 가리개가 나타나 있는데 사진 왼쪽은 범으로 오른쪽은 용으로 파악된다. 특히, 용호병풍도의 형식을 보이는 이 그림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민화풍의 병풍형 가리개로 파악”되었다. 또한 전라감영 선화당 병풍은 “중앙에서 파견된 매우 수준 높은 도화서 화원 화가의 작품으로 까치가 등장하고 호랑이 무늬를 표범무늬로 표현한 것 등에서 민화 까치호랑이의 도상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용 그림 오른쪽 중단 즈음에 용의 머리가 사람들 사이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용의 수염과 뿔의 일부가 확인된다. 용의 머리를 중심으로 보면, 머리 위로 몸체가 곡선을 그리며 굽이를 이루고 있다. 이런 요소가 스미소니언박물관 <용호도>의 '용'과 유사하다. 따라서 병풍 복원을 위한 현존 참고 병풍은 포크와 함께 근무했던 미국 해군무관 버나도(J. B Bernadou, 1858~1908)가 1884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종로나 광통교(廣通橋) 인근에서 구입하여 미국으로 가져가 스미소니언박물관에 기증한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장 <용호도> 2점을 제시”하였다. 이를 근거로 완성된 것이 현재 전라감영 선화당에 전시된 병풍이다. (병풍제작은 한국민화학회의 추천을 통해 남정예 작가가 수고해주셨다.) 본 병풍은 현존 감영 중 유일하게 선화당 내부에 복원된 것으로 전라감영의 위용과 기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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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1 15:34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⑪조선의 첫 공식 ‘카메라 촬영자’, 퍼시벌 로웰

△조선에 들어온 카메라(Camera)의 전신, ‘칠실파려안’ 포크가 1884년 전주에서 사용한 사진기 즉, 카메라(Camera)는 1870년대 유행한 건식 유리원판 카메라였다. ‘카메라’는 로마인들이 썼던 라틴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줄인 말로 ‘어두운(obscura)’+ ‘방(camera)’이라는 단어를 결합한 용어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나 상자의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면에 바깥 풍경이나 물체가 거꾸로 나타나는 광학적 현상을 기계장치로 만든 것이다. 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 17세기 유럽에서 사용되었고 이 기술이 18세기 후반 조선에 도입되어 이명기(李命基)가 1787년에 그린 사실주의적 작품인 ‘유언호 초상화’(보물 제1504호) 제작에 활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시문집(산문) 10권)에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순 우리식 한자표현인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칠실(漆옻 칠 室집 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방’, ‘파려’(玻유리 파瓈유리 려)’는 ‘유리’, ‘안(眼)’은 ‘눈, 보다’로 ‘캄캄한 방에서 유리 눈을 통해서 본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기계를 통해 외부 물체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설명한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어두운 방에서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설명)을 통해 그 원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칠실(漆室)은 산과 물의 아름다움이 반대편에 둘러 비친다.……맑고 좋은 날씨를 골라 방을 닫는다. 창문이나 바깥의 빛을 받아들일 만한 것은 모두 틀어막는다. 방안을 칠흑같이 깜깜하게 해 놓고 구멍 하나만 남겨둔다. 돋보기(안경알) 하나를 가져다가 구멍에 맞춰놓고 눈처럼 흰 종이판을 가져다가 돋보기에서 몇 자 거리를 두어 비치는 빛을 받는다. ...산과 물의 아름다움과 나무와 꽃과 누각 등의 모습이 모두 종이판 위로 내리비친다.……천하의 기이한 경관이다.……사물의 형상이 거꾸로 비쳐 감상하기 황홀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되 터럭 하나라도 차이가 없기를 구한다면 이 방법을 버리고서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여유당전서> 문집 10 설편(說篇) 정약용의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이기양(李基讓)이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丁若銓)의 집에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이라고 불린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고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 초본을 그리게 한 사실을 기록한 「복암이기양묘지명(伏菴李基讓墓誌銘)」에서도 확인된다. 이후 이동형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기록으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영법변증설(影法辯證說)'이 있다. 그는 “그림자란 사물의 그늘이다. ... 밝음의 반대이다. 물상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또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다.”로 빛에 의한 물체 모습을 ‘그림자’로 총괄해 우리의 전통적 인식체계로 설명하였다. 즉, 햇빛에 비춰 생긴 검은 그림자,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 물위 거울처럼 비춰진 그림자 등의 실체와 칠실파려안에 의한 그림자 등의 실체를 빛과 연결지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과학적 논리로 더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조선 방문 공식 첫 사진촬영자, 퍼시벌 로웰 (Percival Lowell) 1830년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외부의 물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 장비와 햇빛에 반응하는 은화합물 계통 물질을 결합시켜 8시간 노출을 통해 최초의 사진이 발명되었다.(니엡스) 그리고 이후 은판에 사진이 나타나는 방식(다게레오 타입, 1분 노출)을 거쳐 1850년대 유리판에 얇은 막을 생성하는 의료용 콜로디온액과 은화합물 반응에 의한 ‘습식 콜로디온 방식(유리습판)’을 거쳐 1870년대에는 젤라틴을 활용한 ‘건식’ 유리원판 사진술(유리건판)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1883년 미국에 갔던 조선 보빙사를 돕는 외교 고문으로 포크와 함께 활동했던 미국 천문학자 ‘로웰’이 포크보다 6개월 앞서 조선에 공식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와 조선국왕 고종의 최초 사진을 찍었다. 로웰은 조선에서의 활동으로 노월(魯越)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 앞서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를 위한 외교고문으로 활동하였고 그 보답으로 1883년12월 20일 조선에 공식 초청되어 1884년 3월18일까지 약 3개월간 체류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양에 머무르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이때 접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정리해 2년 뒤 188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로웰은 뛰어난 사진 촬영기술을 발휘하여 조선 수도 서울 일원의 다양한 모습을 촬영하였고 고종과, 왕세자 시절 순종의 최초 사진을 포함하여 80여장의 사진을 촬영하여 현재 그가 세운 박물관에 관련 자료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진관 기록은 1883년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 제14호 1884. 2.14에 “김용원(金鏞元)이라는 사람이 작년 여름에 사진관을 개설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접한 사진기는 대부분 서양인들이 들고 왔다. 카메라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놀랍도록 정교한 사진의 결과물로 인해 사진을 찍는 카메라는 ‘사람 혼을 빼는 기계’로 인식되었다. 즉, 1880년대 후반 조선의 저잣거리에서는 “어린아이의 눈을 빼내 사진 박는 기계의 눈을 해 박는다.”, “사진 기계가 집이나 담에 비추면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다.”등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시기였다. 특히, 1888년 선교사가 사진을 찍은 어린아이가 죽은 사건으로 사진관련 괴담이 도성에 팽배해져 선교사 보호를 위해 제물포에 정박했던 미군이 출동하는 사태도 있었다. 이 같은 서울 일원에서의 사진관련 소문과는 달리 전주에서는 오히려 전라감사가 사진찍기를 자청하고 사람들도 거부감없이 촬영에 응하고 있어 전주지역이 상대적으로 신문물 수용에 적극적이거나 거부감이 적었음을 보여준다.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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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7 17:37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이야기] ⑩ 포크, 전라감영에서 동아시아 정세를 설명하고,  전라도 최초의 사진을 찍다

△포크, 전라감사와 1880년대 동아시아 정세를 논하다. 1884년 11월 11일 11시에 포크는 사진기구를 챙겨들고 전라감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라감영 선화당의 압도적인 형태와 주위 환경에 다시 깊은 인상을 받고 선화당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포크는 전라감사가 궁금해 하는 국제정세에 대해 설명하였다. 먼저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청프전쟁1884.8-1885.4.)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과 중국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를 물은 전라감사에게 류큐 제도(오키나와 섬)의 문제(1872년 일본에 완전 복속)를 말해주고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중국과 일본의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했다. 이 내용은 정확히 10년 후인 1894년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일으킨 청일전쟁(1894.7-1895.4)과 전쟁 승리후 일본이 진행한 조선 강점 계획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청일전쟁 10년 전에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국제 정세를 조선 정부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면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시 국내 문제가 이들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빌미가 되지 않게 대처해 이를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다. 특히, 갑신정변(1884.12.4.-7.) 실패이후 포크가 ‘미국 대리공사’로서 조선의 고종과 민비 등과 긴밀히 접촉하며 활동한 내용 등을 고려할 때 이 같은 조언을 제시했을 것이란 점에서 이때 피력된 포크의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파악과 예측은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었다. 당시 1884년 11월경 조선정부 및 주요 정책 결정자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와 이해력이 포크의 표현처럼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후 10년의 기간은 충분히 대비하고 국내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반면교사의 역사사실로 더욱 부각된다. 그런데 포크가 만난 상당수 조선의 고위관리에 비해 전라감사는 “그는 깊은 관심을 보였고 내가 말한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표현처럼 적극적 수용자세와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김성근은 식사중 대화에서 “나는 나이가 50인데 (서양의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28살이고 나는 오히려 (나이는 많지만) 어린아이, 학생일 뿐이다. 많은 백성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의 관리인데도 (새로운 과학과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하였다. 포크는 타 지역에서 만난 관리들과 달리 전라도 최고 관리인 전라감사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솔직한 말을 듣고 “이는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라는 표현을 남겼다. 이후 기록에서도 많은 조선관리를 만났던 포크는 이 같은 평가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라감사 김성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주목된다. 이 같은 지도자의 겸손과 자신의 책임성을 강조한 표현은 현재의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된다. △포크, 최첨단 사진기로 전라도 최초의 사진(寫眞)을 찍다! 포크는 11월10일 처음 전라감영을 방문했을 때 전라감사에게 전주를 둘러보는 것과 카메라 촬영허가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전라감사는 이미 카메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을 찍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나는 감사에게 전주를 둘러보겠다고 요청했고 그에게서 마지못한 답변을 받았다. 그는 내가 고을에 나가볼 수 있게 집사를 보내겠다고 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면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카메라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몇 장의 사진을 꺼내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군함 앨럿 호(USS Alert)와 앨럿 호에 승선했던 하웰(Howell)이 찍은 다른 사진들 이었다. 이것은 내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독일인을 통해 그 사진들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내용은 앞서 조선정부의 지도부가 조세 곡물의 안전 운반을 위해 ‘화륜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며 전라감사가 화륜선 사진을 갖고 있었음을 소개하였던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전라감사가 ‘카메라’에 대해 알고 싶어했고 ‘자신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다. 전라감사 김성근이 ‘카메라’에 관심을 갖은 것은 당시 조선 사회 지도층에서 ‘사진(寫眞)’ 촬영이 최고의 신드롬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공식적으로 발명된 것이 1830년대이었고 발명 후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된 서양 근대 문명의 대표 주자였다. 1830년대에 서구에서 발명된 '포토그라피(Photography)‘는 그리스어 ’빛’을 의미하는 포스(Phos)와 ‘그리다’라는 그라포스(Graphos)가 합쳐진 말이다. 1840년대 중국에 전해진 이 기술은 ‘빛을 담는다’라는 의미의 섭영(攝:당길 섭, 影:그림자 영)이란 단어로 표현되었는 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초상화' 또는 ‘그림을 정확히 그린다.’는 의미인 ‘사진(寫:베낄 사,眞:참 진)’으로 표현되었다. 이 표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사진인 1863년 청나라 사행단 이의익(李宜翼) 일행이 북경 아라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찍은 기록(이항억, 연행초록』)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이 개항후 1870, 80년대 중국 및 일본에 파견한 영선사, 수신사 등에 참여한 사신들은 중국과 일본 방문시 사진관을 찾아 개인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필수 일정이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주 감영을 방문한 포크가 카메라 촬영을 하겠다고 하자 전라감사 김성근은 자신의 사진 촬영을 적극적으로 부탁한 것이었다. 포크는 전라감사와의 대화가 끝나고 자신을 위해 춤을 춘 4명의 무용수들의 공연이 끝나자 카메라를 꺼내놓고 이를 설명했다. 그리고 조명이 무엇인지, 유리컵에 든 신비로운 약이 무엇인지 따위와 같은 질문들에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참석한 대인들 전체가 아이들처럼 순진한 표정을 짓고 내 지식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감사는 신문물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부하 관리들과 더 친밀한 태도를 보여줬다. 포크는 이 같은 전라감영에서 본 “기묘하게 흥겨운 춤을 추는 소녀들, 우뚝한 기단 위의 관아건물(선화당), 용, 호랑이가 그려진 병풍, 커다란 북, 붉은색 기둥, 창과 무기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리들, 문 옆에 초록색 옷을 입고 일렬로 선 소년들의 모든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고 ”이 모든 모습들이 모여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하나의 멋진 장관을 만들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표현에 적확히 부응하는 모든 장면을 담기위해 기생과 감사, 전체 군중 등의 사진 6장을 찍었다. 이들 사진은 노출 시간은 28-35초, 조리개 노출은 ½-¾인치로 찍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사진은 안타깝게도 나주-광주길에 짐실은 말이 물에 빠지며 상당수 망실되었는데 천행으로 전라 감사와 전주 기생의 사진이 남아있다.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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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4 16:20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⑨포크가 사용한 1884년 당시 최첨단 장비들(1)

△포크, 현존 최고의 전라도지역 기온∙기압 측정 자료를 남기다 1884년 포크의 조선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에 대한 조사 목적중 핵심사항은 금강 특히, 영산강에 화륜선이 진입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조사였고 이와 함께 각 지역의 지형 및 지리 그리고 정확한 지역 정보 확보였다. 이를 위해 포크는 1880년대 최첨단의 측정 도구들을 휴대하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즉, 포크의 기록은 1884년 11월1일부터 12월 14일까지 44일 동안 조선의 대표적 전국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기반으로 서구의 근대적 측정기구를 활용하여 이동 시간(시계), 거리(목측 관찰), 방향(나침반), 온도(수은 온도계) 및 기압(아네로이드 기압계), 고도(기압변화 활용 추정) 그리고 생생한 조선사회의 이미지 채록기인 사진기를 활용하여 조선의 당시 정보를 유례 없이 정확하게 기록한 현존하는 최초의 조사 보고 자료이다. 포크는 특히, 소지한 자료중 매일 매시간마다 회중시계와 해군용 나침반, 화씨 온도계와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활용하여 각 지역의 지리, 지형 정황과 기온 기압을 측정하였다. △1884년 포크가 방문한 초겨울 전라도는 상대적으로 포근? 인류가 온도 기록을 체계적으로 한 것은 1659년 영국의 기상학자들이 날씨 관련 통계를 모으면서 그 시작되었다. 그러나 각국이 데이터를 정리, 공유하기 시작한 것은 1873년부터이고 공식 세계 기상 기록은 18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편, 조선의 기상 관측 제도는 1876년 개항을 기점으로 개항장을 드나드는 선박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실시되었다. 7년의 무관세시대를 지나고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며 관세자주권을 확보하고 1883년에 처음 설치된 인천·원산·부산 해관에서 기온관련 측정 자료들이 기록되었는 데 1883년 8월 12일 부산지역 기압과 기온 등의 자료가 현존 최고 자료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근대 온도 측정의 역사는 주로 해관이 있던 부산,원산,인천이 측정 대상지역이었다. 그런데 그 1년후인 1884년 11월 포크가 내륙 지방인 충청,전라,경상지역에 대한 최초의 측정자료를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포크의 기록은 전라도지역 최초의 기온과 기압자료로서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온도 측정단위는 '화씨(華氏)'온도였다. 이는 최초 고안자인 독일의 파렌하이트(Fahrenheit)를 청나라에서 ‘화륜해특’(華倫海特)으로 음차한 표현 앞글자 ‘화’에 존칭어 ‘씨’를 붙여 ’화씨(華氏=℉)‘란 표현이 유래했다. 우선 포크가 남긴 전라남북도 지역의 온도관련 기록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포크가 측정한 장소의 값이 아닌 지역 평균값이긴 하지만 일단 140여년전인 1884년의 측정값과 1991-2020년 평균값이 큰 차이없이 최고, 최저값 범위에서 유지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온차가 특이하게 나타난 곳이 3군데 확인되어 주목된다. 먼저 11월 12일 전주의 경우 최고기온 평균치보다 7°C이상 높은 기온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읍 군령다리마을의 경우 정읍지역 최고 평균값과 8°C이상의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전주의 측정값은 금구로 출발한 오전 시간대의 측정값이고 정읍 군령다리마을의 경우 이곳이 갈재(노령)밑 계곡에 위치한 지형적 특징일 수 있지만 아침 8:45의 측정값이란 점을 감안 할 때 두 기록 모두 매우 높은 온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결과는 포크가 여행했던 1884년 겨울의 상황이 상대적으로 따뜻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포크는 기록에서 춥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지만 11월 9일 금마(익산)에서 삼례로 가는 길에서 ‘벌거벗은 아이들’과 ‘다리가 드러난 채 맨발의 남자’들을 기록한 상황과 이 기온 상황이 대비된다. 특히, <비변사등록>에 1884년 9월(음) 기록에 전라, 충청, 강원 감사들이 목화농사의 참혹한 흉년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기압계와 나침반을 들고 조선의 지형, 지리 상황을 측정하다 포크가 사용한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1643년 토리첼리가 처음 사용한 수은같은 액체를 사용하지 않고 기압을 측정하는 장치로 1844년에 프랑스 과학자인 비디(L. Vidi, 1805–1866)가 고안했다. 아네로이드(aneroid)는 그리스어로 액체가 아니라는 뜻인데 아네로이드 기압계 안에는 얇은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상자가 들어 있고 상자 안은 진공으로 되어 기압의 변화를 나타냈다. 1880년대에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수은을 사용하지 않고 가벼워 휴대하기 편리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기압 측정 단위는 밀리바(mb) 또는 헥토파스칼(hPa)을 쓰는 데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기압을 인치 수은(inHg)으로 측정하였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위는 ‘인치 수은’(약 33.86헥토파스칼 또는 33.86 밀리바)로 표준 대기압은 약 29.92 인치 수은이다. 그리고 포크가 사용한 기압계는 해발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압이 떨어지므로 평지와의 기압차를 이용해 산의 높이를 추정하는 간이 고도계로 사용할 수 있었다. 포크의 조사자료에 나타난 수치와 비교하면 전라도의 평지지역은 표준기압보다 높은 30이상의 수치를 보여주었고 높은 고개인 정읍 갈재 고갯마루(=276m)나, 고원분지로 올라간 남원운봉 여원치(=477m) 등은 표준기압보다 낮은 수치를 보여주어 산지지형 상황을 수치화한 최초 기록인 포크기록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포크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해군 장교로서 방향을 기록할 경우 항해, 측량 시에 사용하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포크는 자신의 일기에는 방향을 표시할 때 ‘northeast by east’라는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사전적 의미로 “[항해 측량용어] 북동미동(北東微東): 동북에서 110˚15’ 동쪽으로 치우친 방위(方位). NEbE.”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형적인 해군의 방위 표시방식으로 매우 정확한 방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번역할 때 모든 방향을 이렇게 나타낼 수 없어 “북동(北東)” 으로 단순화해 옮겼지만 실제 방위는 이같이 매우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사진에 제시한 ‘19세기 미해군용 나침판’에 잘 나타나 있다. 이같이 포크는 방향설정에서도 당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정보를 담아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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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0 18:01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⑧ 전라도 최고 통치 공간, 전라감영에서 근대 물품을 만나다.

△동양의 신비로운 왕국같은 전라감영에 들어서다. 1884년 11월 10일 오후 12시 10분경 포크는 전주에 도착하자 마자 남문옆 동쪽 끝에 위치한 낡은 관아건물(경기전 전사청?)로 안내되었다. 잠시 휴식후 포크일행은 가마를 타고 수백 명의 군졸들이 둘러싸고 있는 전라감영의 첫 번째문인 포정루문을 지나고 두 번째 중삼문을 지나 가마에서 내렸다. 그리고 길나장이들이 양쪽으로 줄을 선 돌이 깔린 진입도로를 지나 마지막 내삼문이 열렸다. 그리고 포크의 눈앞에는 거대한 관아(선화당)가 나타났다. “매끈한 기와를 올린 높은 지붕과 기둥은 높고 당당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본관에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하급 관리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풍광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조선에 있는 어떤 외국인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동양의 오만스러움과 전제 권력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맨 위 계단에서 모자를 벗고 화려한 예복을 치렁치렁 걸친 회색 수염의 나이든 관리에게서 정중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흔들어 포크를 오른쪽으로 안내했다. 이 역할은 전라감영의 육방권속 중 가장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방(吏房)으로 보인다. △전라감영에서 자명종과 유리거울 등 근대물품들을 접하다. 포크는 선화당의 안쪽 방에 서 있는 전라감사와 마주하였다. 크고 검은 수염의 남자는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에는 뒤쪽으로 기다란 빨간 술을 매달았고 앞쪽에는 공작 깃털을 꽂아 장식했다. 포크는 바깥문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포크는 깊은 산속 미지의 왕국 같은 이곳에서 화려한 스타일의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두 개의 유리거울과 시계 등 서구의 근대 문물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서구를 대표하는 자명종 시계와 화려한 거울은 신비한 왕국같은 전라감영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아 큰 놀라움을 표하였다. 조선에 전해진 자명종은 <국조보감>에 의하면 1631년(인조 9) 7월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포르투갈의 신부 육약한으로부터 천문학 서적, 천리경 등과 함께 얻어왔다고 하는 데 ‘한 시간마다 스스로 울린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자명종 전래에 대한 첫 기록이다. 또 대동법 시행으로 유명한 김육이 지은 <잠곡필담>에는 김육 자신도 중국에서 자명종을 가져왔는데 효종대(1650~1659 재위) 밀양 사람 유흥발이 일본 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을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깨달고 직접 만든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또 현종 10년(1669)에 이민철과 송이영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리되 동력을 물 대신 추로 돌게 개량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천체의 운행을 한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조선 특유의 혼천시계를 제작하였다. 특히, 전주사람인 이민철은 나이 아홉 살 무렵에 자명종을 분해 조립해 지켜보던 이들 모두 경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명종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동래 사람들이 왜인에게 태엽 감는 법을 배워 서울에 전했다. 그러나 자세하지 않아 시계가 있어도 쓸 줄 몰랐다.(중략) 내 숙부 이민철이 조용한 곳에 자명종을 들고 가 시계 축 도는 것을 응시하고는 나사를 모두 뽑아 분해했다. 보던 이들이 모두 경악했으나 이내 조립해 이전처럼 완성했다.” 이이명(1658~1722) <소재집(疎齋集)> 1723년(경종 3)에도 청나라에서 보내온 서양문진종(西洋問辰鐘)을 관상감에서 본떠 만들었다고하여 18세기부터는 관상감원들이 자명종을 제작했고 그것을 시간 측정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정두원에 의해 조선으로 도입된 자명종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인 신기한 기계로서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서 개량, 활용되고 마침내 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라감영에서 포크가 보고 놀란 시계가 조선에서 자체 생산한 시계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1884년 6월 평안도 유생의 상소에 “또 자명종(自鳴鍾), 시표(時標:시계), 유리(琉璃) 등의 망가지기 쉬운 완호품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시장에 들여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때는 이미 조선사회에 이들 물건이 수입되어 판매가 이뤄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어서 전라감영의 시계가 과연 조선의 자체 제작품인지 수입되어 사용된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이같은 근대 물품이 전라감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이 포크기록을 통해 명확히 확인되었다. 한편, 1879년 2월 27일자 일본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조선의 근황’에서 “전기, 철로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신기함을 의심하는 것 같다. ...조선인 가운데 유리 거울을 소유함은 이른바 상류층으로 하등 인민과 같은 이들은 이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가 많다.”라고 보도한 내용에서 유리거울은 지위 높은 자들의 새로운 문물이었다. 그런데 유리거울이 전라감사 집무공간에 2개나 있었다는 점은 전라감영이 이 같은 근대 물건과 접하는 창구이자 근대 문물의 활용처였음을 보여준다. 거울은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시대이래 쓰여진 종교적 정치적 신성성을 상징한 도구였다. 이때의 거울은 동경(銅鏡)으로 구리와 합금(구리+주석, 구리+아연)을 반사체로 하여 반듯한 면을 광내어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유리에 광물질인 은이나 수은을 입혀 반사되도록 한 거울이 유입되면서 상류계층에서나 쓸 수 있었던 동경은 유리거울의 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일상품이 되었다. 유리 거울은 일명 석경(石鏡) 이라고도 불렀다. 청나라 때 중국에 들어간 사신들은 베이징의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바로 아라사(러시아) 사신들의 숙소와 이웃하고 있었다. 옥하관에서 사온 물품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바로 유리거울로, 이를 ‘어루쇠’라 했다. 지금도 거울이 어루쇠로 통하고 있는데, 그 어원을 순조28년(1828) 사행을 다녀온 기록인 『왕환일기(往還日記)』 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아라사는 중국 발음이 어라시(於羅澌 워루어스)이니,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석경(石鏡)을 어리쇠(於里衰)라고 부르는 것이 필시 아라사에서 생산되는 아주 두꺼운 유리로서 ...그러한 것이다.” <왕환일기(往還日記)>, 무자년(1828) 6월. 현재 표준어로 거울을 지칭하는 ‘어루쇠’라고 하는 말이 19세기 초반에는 ‘어리쇠’라고도 발음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에서 들여오는 유리 거울이 대부분 러시아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전라감영에서 포크는 자명종과 유리거울 등 서구 제품들이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통해 전라감영이 근대문화수용의 중심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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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2 15:34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⑦동양의 전제 권력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전라감영에 들어서다

△철제 선정비가 즐비한 전라감영도시 전주 11월 10일 11시 8분 전라감영에서 10리 떨어진 가리내(Kari-na) 마을 주막을 지난 포크는 전주의 지역 정보를 급히 기록하며 진입하였다. 먼저 전주의 공간 지형이 진입로가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 서, 남쪽지역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 공간이며 주변산 중 가장 높은 산은 900-1000여m에 달한다고 보았다. 이 산은 전주 북서방향에 있는 모악산(795m)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길 옆에 있는 많은 돌과 쇠로 된 선정비들을 언급하였다. 특히, 쇠로 된 선정비가 훨씬 많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지난 15분 동안 나는 치장이 잘된 돌들(선정비)을 꽤 많이 봤고 철제 선정비는 더 많이 봤다. ” 철비(鐵碑)는 철로 제작한 비(碑)를 말한다. 그리고 철은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이 있어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로 만든 비를 건립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비. 석비. 철비를 언급하면서 철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철비가 청백리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 찬사이고 철비가 건립된 가문은 최고의 영광이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전국에 철비는 전국 23지역에 총 47개가 남아있는데 전북지역에는 7기가 남아있다.(군산 3기, 전주 2기, 김제 2기, 고창 1기, 정읍 1기 등 7기) 그런데 전주지역 2점중 국립전주박물관소장 철비는 남원지역 이전품으로 포크가 보았던 수많은 전주지역의 쇠로 된 선정비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1개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철비는 전라관찰사 이헌구가 재직 시절(1837년 1월-1838년 12월)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한 ‘관찰사이헌구청간선정비’로서 전북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같이 돌로 된 선정비보다 더 많았던 철제 선정비등이 현재 극소수만 남은 것은 일제가 1941년 9월 ‘금속류 회수령’을 공포하고,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을 때 이들 쇠로 만든 선정비들도 대부분 약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일제는 1940년대 침략전쟁을 확전시키면서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모든 쇠붙이들을 약탈하여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던 상황에서 대부분 사라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의도된 마을 배치와 열악한 도로 포크가 전주로 들어서며 쓴 기록 중 주목되는 또 다른 내용은 지방의 마을 위치를 의도적으로 중요 도로로부터 떨어트려 배치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즉, 조선 정부가 지방 마을들의 위치를 의도적으로 도로에 인접시키지 않고 있는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산비탈에 위치한 마을이 무척 많았다. 늘 그렇듯이 길에서 떨어져 있었다. 조선의 고을과 마을은 서울과 연결된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샛길을 통해서만 접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터는 큰길이나 근방에서 열리는 것이 허용됐다. 이는 중요한 사실이다. 많은 마을을 볼 수 있지만 외국인이 선택할 만한 큰길만을 여행해서는 절대 실제 마을에 들어가 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정부가 장터를 마을로 옮긴 후 큰길을 수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 같은 상황은 조선 정부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방법 중에 서울의 경우 도심 내부에 좁은 길을 만들어 외적의 작전활동을 제한하였다는 견해와 연결되는 것이다. 즉, 지방의 마을들을 큰 길에서 떨어진 곳에 구성해 외적 침입시 피해 축소 및 백성 보호를 위한 소극적 대응법을 추측케 한다. 또한 포크는 도로 사정에 대해 좁고 진창흙과 자갈이 섞여있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미 17세기 중반에 나온 유형원의 『반계수록』에서 “수레의 이용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한 사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19세기 조선을 찾았던 많은 서양인들도 조선의 지방도로에 대해 매우 좁고 불편함을 기록한 것과 같은 입장이었다. 즉,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의 외국인 고문으로 참여한 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고종의 초청을 받아 포크보다 6개월 먼저 조선에 왔던 퍼시벌 로웰이 “조선의 도로는 도로라는 이름이 과분할 정도로 빈약하다....계획적으로 길을 닦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생겨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라고 적고 있다. 포크의 요청으로 1886년 7월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 또한 『한국견문기』(The Korean Review1901-1906)에서 “전 국토의 어느 곳을 가 봐도 도로라는 것이 말이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라고 지적했다. 1885년-1896년사이 조선에서 근무한 러시아 장교 카르네프는 『내가 본 조선 조선인』에서는 “조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 도로 사정이다. 모든 길은 대단히 좁고 구불구불하며 더러웠다...조선의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모든 길은 논과 밭사이로 나있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전주로 진입하는 도로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크는 이같은 상황 개선을 위해 마을로 교역 중심 공간인 시장터를 옮기고 도로를 재정비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포크가 처음 본 큰 키의 전주사람들과 7-8000여채 건물로 꽉 들어찬 전주 포크는 조선의 각 지역을 다니며 당시 유행하던 인종학적 지견을 바탕으로 지역별로 조선사람들에 대한 인종 특징 확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마주친 180cm에 육박하는 큰 키의 전주 사람들을 주목해서 기록하고 있다. 포크는 전라도 사람들의 특징이 타 지역과 다른 점이 보일 때 마다 특별히 신경써서 기록을 남겼다. 한편, 기온 기압을 측정해 가장 오래된 전주의 온도측정 기록을 남겨 놓았다. 1884년 11월 10일(양력) 11시18분 가리내 주막 근처의 측정값 기록은 “기압은 30.42, 온도는 53F°(11.6℃), 바람은 남서풍이고 춥다.”였다. 이는 1961년-1990년까지의 11월 10일 전주 평균 기온 8.6℃(최고13.5℃~최저3.9℃) 자료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는 날씨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포크일행은 11시 50분 멋진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숲(전주 숲정이)과 자갈이 많고 거의 경작이 되지 않은 평지를 지나, 몇 개의 누각과 오래된 비석이 많은 길을 지나 12시 10분에 전주의 남문에 도착해 임시 숙소로 안내되었다. “이 도시는 성벽 안에 2,000여 채의 집이 있었다. 고을 전체는 7,000-8,000여 채에 달했다. 거리는 비좁았고 정리가 안되어 있었다. .... 동쪽 끝의 커다랗고 추레한 방이 있는 허름한 관아로 꺾어져 들어갔다.” 포크가 전주성에 진입한 길은 현재 전주천변 길을 따라 덕진구청과 숲정이숲이 있었던 해성중고등학교자리(현 동국해성 아파트)일대를 거쳐 서문쪽을 지나쳐 전주 남문시장쪽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남문으로 들어와 동쪽 끝에 위치한 허름한 관아에 잠시 쉬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경기전과 조경묘 근처의 공간으로 추정된다. 얼마후 포크일행은 빨간 겉옷을 입은 길나장이 6-8명이 호기심에 휩싸인 거친 무리들을 마구 밀쳐내는 소란과 함께 전라감영입구에서 의장을 갖춰 대기중인 수백 명의 군졸들을 헤치며 전라감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포정루문과 중문을 거쳐 안쪽에 가마가 내려지고 마지막 문(내삼문)이 한 가운데서 열려 젖혀졌다. “내 앞에 거대한 관아가 나타났다. 매끈한 기와를 올린 높은 지붕과 기둥은 높고 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본관에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하급 관리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풍광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조선에 있는 어떤 외국인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동양의 오만스러움과 전제 권력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장면이었다. ”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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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5 16:43

[조법종교수의 전라도이야기] ⑥ 19세기 조선 개화의 또 다른 중심, 전주를 방문하다

1884년 11월 9일(음9월22일) 삼례장 전날 북적이는 주막들을 헤매다 간신히 방을 구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포크 일행은 가장 좋은 방인 안방(Anpang:여자들의 숙소)을 쓰기를 원했지만 여자들이 몹시 화를 내 할 수 없이 한 방에서 3명이 자게 되었다. 방은 좁았고 밤새 수 많은 빈대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나름 잘 막아내며 온돌바닥을 껴안고 잤다. 포크는 벌레에게 시달리며 동행한 역관 전양묵과 집사 정수일에게서 당시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한 지방의 민심을 청취하게 되었다. △전주의 80대 개화사상가, 조선의 개화를 주창하다 미국 외교무관인 포크의 중요 임무중 하나는 각 지역의 민심을 청취하고 조선의 정세를 파악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삼례주막에서 들은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한 민심은 외국문명 수용에 반대하는 여론의 확인이었다. “전양묵이 오늘 밤 많은 관리들이 외국 문명에 반대하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신념이라고도 했다. 심지어 지위가 매우 높은 이들도, 외국인들과 함께하거나 외국을 나갔다 온 경우에는 지역에서 소외되는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곧 방문할 전주에 조선의 전반적인 서구문화 수용 반대 입장과는 달리 조선의 개화를 강조한 80대의 개화사상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게 되는 내용이었다. 즉, 앞서 1880년 일본에 수신사 일행으로 다녀와 별기군 창설에 참여했다 임오군란때 죽을 뻔했던 김노완 용안현감은 전주의 노학자가 자신의 개화사상 스승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최고 상관인 전라감사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찾았음을 당당히 말하였다. “최근 전주를 방문한 그(김노완 현감)는 먼저 팔십이 넘은 한 노인을 찾은 다음 전라감사를 방문했다. 감사는 왜 자신을 먼저 찾지 않았는지를 추궁했다. 김노완 용안현감은 그 노인이 문명을 알려준 스승이라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지난 수년간 조선을 개방하고 외부 세계와 어울릴 것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것 같았다. 김은 내가 그 노인에게 관심을 가지기를 바랐다. 나는 그럴 것이다.” 즉, 전주의 80대 노학자는 조선의 대부분 유학자와 민심이 서양문명 수용에 강한 거부감을 피력하던 시절에 전라감사도 인정할 정도로 중요한 개화사상가로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라북도의 근대 유학자의 대표 학자로서 위정척사적 성리학자인 간재 전우(1841-1922)선생과 그 제자분들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전주에는 이보다 40여년 앞서 태어나 1880년대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며 개화사상을 설파한 전주의 노학자가 존재하였음이 이번 포크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특히, 전라감사 김성근도 전주를 방문한 용안현감이 직속 최고 상관인 자신보다 먼저 80대의 개화사상가를 찾은 것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이 학자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학자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개화를 반대하던 분위기에 맞서 1880년대에 조선의 개화를 역설하고 주창한 전주의 새로운 개혁사상가가 존재하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개화정책에 대해 국가에 적극 개진해 신념을 실천한 사상가의 존재는 전라도, 전주지역의 개혁적 성격과 이후 1890년 근대개혁의 필요와 실천을 진행한 새로운 전라도의 역사적 토대와 정신적 계보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80대 개화사상가의 실체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급히 추진되기를 제안한다. △‘사수강’(만경강 원 이름)을 건너 전주 ‘가리내’로 들어서다 포크는 11월 10일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아침에 많은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사수강(泗水江)(Sac-su-gang)에 9시 44분 도착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밤에 다시 비가 왔고 오전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다. 이상한 날씨였다. 기온은 어제 40F° (4℃)에서 55F°(12.7℃) 사이를 오갔다. 기러기는 여전히 많으며 거의 언제나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9시 23분에 길을 나섰다. 사수강(泗水江)(Sac-su-gang)에 9시 44분 도착했다. 물살이 거셌고 가장 깊은 곳이 4피트(120cm)였다. 서쪽으로 450피트의 강바닥이 펼쳐졌다. 우리는 남쪽 둑에서 출발했다. ... 평야에는 방앗간과 많은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동쪽과 북쪽으로 개간되지 않은 거대한 평지가 펼쳐졌다.” 필자는 이 대목을 번역할 때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즉, 13년 전인 2005년에 만경강의 본래 이름이 ’사수강‘이란 사실을 발표했었는 데 놀랍게도 1884년 이 강을 건넌 미국 외교관의 기록에서 이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경강(萬頃江)’이란 표현은 우리의 전통 역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명칭으로 일제강점기에 만경현과의 인접성 때문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설정한 명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1870년대 제작된 <대동여지도총도>에 현재의 만경강을 ‘사수(泗水)’라 표현하고 있으며 1906년 완성된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의 산천(山川)조 호남연해제천(湖南沿海諸川)에서는 우리나라 모든 강의 원류와 경유지 등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면서 현재 만경강의 본래 명칭이 사수강(泗水江)임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사수’라는 이름은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의 강 이름이자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지역의 강 이름으로서 유교문화의 발상지이자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강 이름이었다. 따라서 만경강의 본 이름 ‘사수강’은 조선시대 왕조와 문화발상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던 명칭이었다고 생각된다.(조법종, '만경강 이야기 땅과 생명 그리고 강-만경강의 역사', 전북일보 2006.3.15.) 현재, 완주군에서 추진하는 만경강 관련 사업에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소개와 연구가 함께 필요함을 보여준다. 한편, 포크는 전주행을 서둘러 11시 8분에 사수(泗水)강의 본류로 보이는 물길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명칭은 가리내(Kari-na) 마을이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가리내’라는 이름은 전주천과 삼천천이 합류하는 곳인데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전주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보면 내가 갈려 나뉘어져 있는 모습으로 가리내의 뜻은 ‘(물이) 갈린 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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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1 19:35

[조법종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⑤전라도 관문 삼례에서 접한 조선의 현실

1884년 11월 9일 포크 일행은 기묘한 악단과 함께 익산으로 진입했다. 포크의 방문을 기다린 익산 주민들은 지붕 위를 포함해 모든 곳을 뒤덮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포크를 맞이했다. 그러나 포크는 이들을 무시하고 가장 신속한 동작으로 관아 맞은편 집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포크의 가장 큰 스트레스, ”화장실 가기“ 포크가 조선의 지방을 조사 과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화장실’ 이용이었다. 9월달 그가 처음 개성에서 접한 조선의 화장실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방문 밖에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개성 객사?) 정원 건너편 70피트(21미터) 정도의 거리에 ‘변소’가 있었다. 낡아서 다 쓰러져가는 헛간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 주변에는 ”쪼그려 앉아 일을 볼 때 필요한 돌” 몇 개를 모서리에 얹어 놓았다. ‘변소’에 갈 때면 한 명 또는 두 명의 병사가 반드시 함께 했으며, 나머지 몇 명은 내가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낮고 긴 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는 발로 걷어차였다.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가 기록한 상황별 한국어 표현 중 화장실 간다는 표현을 두 가지로 나눠 기록한 부분이다. 즉, ‘화장실에 간다’는 일반적인 표현은 “뒤퍼(Tui-po)로 기록하고 ‘똥 싸러 간다는 천박한 표현’은 ”똥누(Ttong-nu)“로 표기해 화장실이 급할 때 사용할 현실적 표현까지 남겨두어 웃음이 났다. 특히,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 거리에 용변이 널려있고 화장실이 불비한 상황과 140여년이 지난 현재 2020년대 대한민국 화장실문화가 세계인의 칭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 점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노력에 따라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실감케 한다. △10년후,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삼례에 도착하다. 익산군수의 환대와 시끌벅적한 잔치상을 뒤로하고 포크는 3시 5분 익산(금마)을 출발했다. 4시 10분에 누추한 작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남쪽으로 길을 계속 가서 5시에 삼례찰방도(S'hum-nye chalpang-do)에 도착했다. ‘찰방도(察訪道)’란 조선시대 정보 통신을 위해 10대로를 중심으로 말과 인력을 관리하는 ‘역참’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찰방’ (종6품)을 둔 곳으로 현재 전라북도 일원의 12개 역을 관할했다. 삼례도는 조선시대의 10대로 가운데 한양에서 제주로 구간에 설치되었는 데 ‘삼례도역’은 일본 헌병주차대와 일본인 소학교로 이용되다가 광복 후에 삼례 동부교회로 이용되고 있다. 삼례도 찰방역의 7개 건물들 가운데 본청은 덕류당(德流堂)이고 말을 위해 제사지내던 마신당(馬神堂)은 교회 뒤편의 언덕에 있었는데 1990년 초 필자 방문시 관련된 당골할미가 수년전 돌아가신 이후 관련 공간은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삼례에서는 포크도착 다음날인 9월 23일 장이 열릴 예정인데 이미 장터가 열려 있었다. 이는 오일장이 매일 열리는 상설장으로 발전하는 조선 후기 현상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주막이 꽉 차 가축우리 같은 방 한곳에서 포크와 통역인 전양묵, 집사인 정수일 등 세 명이 모두 함께 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부자동네 전라도가 부자가 아닌가? 전라도의 관문인 삼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포크는 서울에서 전라도가 상당히 풍요롭다고 한 이야기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우리는 평야 지대에 머물렀다. 인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내 기대와는 달리, 비록 벼는 풍부한 소출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서울의 많은 조선인들이 이야기했던 이 지역의 풍요로운 상황이나 부유함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집과 옷차림은 서울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목재가 매우 드물어서 집은 대부분 진흙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장독과 그릇들은 품질이 더 좋았고 수량도 많았으며, 부엌 살림살이도 더 많아 보였다.” 이 같은 의문은 전주에 도착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서울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집들도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기와집은 드믉며 경기도나 충청도에 비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그런데 정작 장독과 그릇, 살림살이는 더 좋아보였다는 역설적 상황이 기록되고 있다. 즉, 겉은 허술해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윤택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문은 4일뒤 정읍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집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그런다면 관아의 관리가 그들을 붙잡고 돈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조선의 관리들 중 ‘공명첩’(이름이 비어있는 관리 임명장)을 돈으로 사서 지방 관리가 되어 재임동안 각종 명목으로 백성의 재산을 약탈해가는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즉, 전라도가 부유한 곳인데 집이 누추했던 것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한 소극적 대응법의 결과였던 것이다. 또한 포크는 삼례 숙소에서 역관인 전양묵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묵(통역 관리)은 관리들이 부유한 백성을 불러 뇌물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를 거절하면 그들은 매질을 한다. 그런데 백성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면 오히려 종종 나쁜 관리를 공격해 서울로 쫒겨나게 한다고 했다.” 즉, 포크는 삼례에서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뇌물 요구가 한계에 달하면 마지막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관리들을 공격해 쫒아냈다는 충격적 발언을 듣게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10년후 전라도 지역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한 내용이었다. 이같이 풍요로운 전라도를 가난하게 만든 것은 부패한 관리를 양산한 당시 고종-민비정권이었다. 결국 1884년 11월 미국인 포크가 방문한 삼례에서 들은 조선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10년 후인 1894년 11월 삼례 그 자리에서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외치는 동학농민혁명군의 구호와 행동으로 백성 스스로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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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3 15:25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④함박 눈을 맞으며 고대 유적지인 용안-익산-삼례길을 지나다.

1884년 11월 9일 9시 15분 포크는 개화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노완 군수가 이끄는 병사와 군졸 나팔수들로 이루진 환송 행렬과 함께 용안을 떠나 익산으로 향했다. 눈이 일부 쌓이고 젖은 길을 지나 10시에 ‘걸망장’(Kuul mang chang)에 이르렀다. 이곳은 용안의 경계로서 호남읍지(1872년경)에서 ‘검망장(劍望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규장각 소장 ‘1872년 용안현지도‘에서는 ’금성시(錦城市)‘라는 명칭으로 나타나 있다. △용안의 ‘걸망장’(함열 금성장터)을 지나며 친절한 주민들을 만나다. 걸망장이라는 말은 상인들이 등에 매고 다니는 걸망을 맨 등짐장수인 ‘부상(負질 부 商장사 상)’과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안고 다니는 ‘보상(褓포대기 보)’ 즉,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장터를 뜻하는 것으로 전한다. 이곳 걸망장은 ‘검성(劍城)’으로도 쓰였는 데 ‘금성(錦城)’으로 쓰이며 금성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원 위치는 현재의 함열여고옆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1년 11월 호남선철도(1914 완전 개통) 중 대전-함열까지가 먼저 개통되며 역이 위치한 함열읍 와리 지역으로 시장이 옮겨져 현재 함열중학교 밑이 아랫장터, 그 위는 윗 장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포크는 장터가 열렸던 이곳에서 책과 개고기를 팔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1884년 양력 11월 9일은 음력 9월 22일로 현재도 익산 함열 장날이 2, 7일 오일장으로 열리는 데 바로 포크가 9월 22일 장날 이곳을 지났던 것이다. 그리고 용안현감은 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포크를 소개하였고 포크는 친절한 사람들의 태도에 호감과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이같이 포크는 용안에서 현감의 환대와 길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외국인을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전라도에 대한 긍정적 인상과 우호적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같은 인상은 이후 전주를 방문하여 더욱 강해졌다. 한편, 포크는 타 지역에서 조선 사람들의 문자 해득력의 수준과 문자를 통한 정보전달의 실제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데 걸망장터에서 책이 판매되고 있었다는 기록은 그 같은 의구심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고 파악된다. 특히, 전주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이래 꾸준히 성장한 상업적 책 간행과 판매 상황을 직접 금성장터에서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 그 의미가 크다. △미륵사지앞 주막에서 익산의 ‘길라잡이’를 만나다. 포크 일행은 춥고 질척해진 길을 지나 석불주막(석불사거리)을 지나고 12시 35분경 익산(현재 금마)에서 5리 떨어진 주막에 도착했다. 이곳은 바로 ‘구원점막(舊院店幕)’ 즉, ‘옛날 역원마을 주막’으로 현재 익산 미륵사지 앞에 있었던 주막이었다. 점막(店幕)은 ‘주막’으로 불리는 상인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사설 숙소를 가리킨다. 조선전기에는 조정에서 원(院)을 설치하여 숙박을 제공하였으나 조선후기 상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상인과 여행자가 증가하자 민간의 사설 숙박 장소인 점막이 증가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점막은 장시의 발달과 함께 교통로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大東輿志)>에는 일부 누락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996개의 원점(院店)이 확인된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읍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역원에 포자를 설치하고 주점을 두어 물자유통의 장소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점막이 상업유통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크는 자신을 기다리던 익산의 ‘길라잡이’를 이곳에서 만났다. “(구원점막)에는 어제부터 나를 기다렸던, 빨간 겉옷을 입은 6명, 나팔수 2명, 악단 6명, 깃발을 든 소년 2명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뿌”하는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출발했다. 그리고 이어서 기이한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진기한 행렬을 길게 이루며 익산으로 향했다.“ 이들 길라잡이는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으로 말의 어원은 지로나장(指路羅將)이다. 지로는 가리킬 지 指, 길 로 路로 길을 인도한다는 뜻으로 이 지로나장이 길나장으로 변하고 접미사 '-이'가 붙어 ‘길나장이’란 말이 생겼다. 나장은 군관(軍官) , 취수(吹手) 등과 함께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는 지로나장이 까치옷으로 단장하고 깃을 꽂고 앞에 선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포크는 이 같은 길라잡이와 나팔수들의 과잉 행동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다. ”호위대(길라잡이)는 앞서가며 길을 열고 서둘러 식사와 숙소를 준비한다. 서울을 출발하면서 이 절차는 시작됐다. 지방 관청에서 다음 관청으로 호위대를 보내라고 명령이 내려간다. 고위 인사가 여행할 때 진행되는 표준 관행이었다. ... 빨간 겉옷의 나팔수 두 명, 파랑과 흰색이 섞인 겉옷의 길라잡이 두 명, 그리고 아전 두 명이었다. 우선 그들은 길을 열기 위해 사람들을 언덕 위로 몰아내면서 나를 화나게 했다. ” 그러나 이후 경상도로 넘어갔을 때 너무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되자 이들의 행동을 묵인하게 되었다. △눈덮인 용안-익산-삼례길에서 고대유적을 지나다 포크는 자신이 지난 익산길에 대해 “오늘 길과 들판 주변에서 비석처럼 다듬어진 오래되고 커다란 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고대의 유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라며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즉, ‘고대 유물’들이 이 공간에 많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포크가 지난 곳은 백제 최대의 석불이 남아있는 ‘석불사거리’를 지났고 익산의 길라잡이를 만난 곳이 세계유산 미륵사지 앞이었으며 익산에서 삼례로 올때 왕궁유적과 동서고도리 석인상들도 지났었다. 필자는 이 기록을 보며 함박눈이 수시로 내려 포크가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웠다. 만약 날씨만 좋았다면 고대 유적에 큰 관심이 많은 포크가 어쩌면 미륵사지탑이나 왕궁리 탑, 석불사 석불 등을 사진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귀중한 유적들의 원형이 더 잘 기록된 사진이 남겨졌을 텐 데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포크는 눈 내린 길을 지나 익산관아(현 금마면 사무소)로 진입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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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0 18:49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③포크, 가마타고 삼남대로를 거쳐 전라도에 들어오다

△전라도로 가는 첫 길 삼남대로와 영호남 도로의 분기점 ‘삼례’ 포크의 조선 남부지역 조사는 <대동지지>에 나와 있는 8대로인 해남로(충남,전북,전남지역)를 통해 시작됐다. 그리고 통영로(경남)와 동래로(경남,경북,충북) 를 기본 여행길로 정했다. 해남로는 통칭 한양에서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지방으로 통하는 대로라는 의미에서 ‘삼남대로’라고 불리었다. 포크는 1884년 11월 1일 자신의 숙소가 있는 ‘갓점골’ 즉, 현재 서울 청계천 3가 수표교와 을지로 인근의 입정동(笠井洞)에서 출발해 용산 삼각지 부근인 ‘밥전거리’를 지나 한강을 건너 동작진-과천으로 이어진 해남로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서울 근교의 뚝섬을 건널 때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의 화장실이 얼마나 깊던지, 용변을 본 후 이것들이 바닥까지 도달하려면 1년이 걸린다는 말을 들으며 조선인의 허풍과 유머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 길로 전주를 지나 나주까지 방문한 포크는 나주에서 방향을 틀어 자신이 조선에서 꼭 보고 싶어했던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통영의 ‘거북선’을 보기 위해 광주를 거쳐 담양-순창-남원으로 이동해 앞서 10대로중 유일하게 영남과 호남지역으로 길이 나뉘는 삼례에서 ‘해남로’와 갈라진 ‘통영별로’ 길을 이용해 해인사를 방문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길이 조선의 가장 중요한 관도로서 이미 춘향전 이도령 어사행차길이기도 했으며 1597년 이순신 장군이 경남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아 백의종군을 위해 갔던 길로 그 분기점은 삼례였다. 즉, 삼례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조선시대까지는 현재의 영∙호남선이 갈리는 대전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었다. △포크의 충성스러운 가마꾼 조선시대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고 다니던 주요 이동 수단은 가마였다. 당시 지방여행을 위해 조선의 고관들은 4명이 교대로 드는 가마를 이용했는 데 포크도 이를 활용했다. 포크가 처음 가마를 탈때의 상황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사방이 막힌 모양의 아담하고 정갈한 가마를 탔다. 내 가마에는 챙이 넓은 펠트 모자를 쓰고 헐렁한 흰 옷을 입은 네 명의 가마꾼이 배정되었다. 신분이 높은 조선인이 여행하는 가장 과시적이고 사치스러운 방법이었다.”라고 했다. 11월 9일 용안을 떠나 익산으로 가면서 “익산에 도착하기 전에 눈이 서너 번 무섭게 쏟아졌다... 길은 형편없어서 끔찍할 정도였다. 나는 가마꾼이 가여웠다. 그들은 진정 용감하고 주의 깊게 우리들을 운반했다. 그들의 일은 지독하게 힘들었다.”라고 기록했다. 또 가마꾼은 보교(步轎; 포크는 “포케요pokeyo”라고 썼다)라 불렸는데 “이들은 길이 험하면 ‘제미(chemi)‘ 라는 욕설을 하거나 길을 막고 얼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욕을 퍼 붓는다. 그리고 고개를 오를 때 너무 힘들면 가마꾼들은 “아이고, 죽겠다(O-ui-i-go, chuketta!)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해 매우 구체적인 한국어 표현도 남겨 놓았다. 포크는 이들에 대해 “불평이 많지 않고 굳센 노새처럼 강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주인이 하루 이틀 숙박을 하거나 기다릴 때면 투전이나 막걸리와 소고기, 밥에 몰두한다.“ 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긴 여행동안 포크는 가마꾼들에게 꽤 호감을 느껴 두 명에게 '순둥이'와 '들창코'같은 별명을 붙였다. 이 같은 가마꾼들의 성격은 필자가 70년대 동네 택시회사 기사분들에게서 느꼈던 이미지와 묘하게 중첩되어 시대가 달라도 비슷한 업종의 특성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가마꾼들의 이동 속도는 10리(포크는 10리를 3.2마일=5.15km로 보았다.)를 1시간 내외로 진행했고 1일 최대 80-90리를 진행했다. 가마 1대의 운송방식은 4명이 2인 1조로 교대하며 담당했는데 가마를 직접 들지 않는 나머지 1조는 가마 옆에서 10분마다 휴식할 때 가마의 지지대를 들어 올려 동료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어깨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는 1888년 명성황후의 시의로 내한했던 릴리어스 H. 언더우드(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의 “가마꾼은 4명이 2명씩 쌍을 이뤄 가마를 드는 데 휴식을 취하는 가마꾼들은 매 10분마다 30초가량 잠시 가마를 들어주었고, 두 쌍은 매 3마일(4.8km)마다 교대를 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포크가 가마꾼에게 지불한 일당 포크의 여행 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내용은 엄청난 동전 궤짝을 말에 싣고 다닌 부분이다. 포크는 식사비와 기타 비용을 현장에서 지급했는데 특히, 보교 즉, 가마꾼에게 일정 기간마다 급료를 지급했다. 포크가 가마꾼과 협상한 요금은 매 10리당 50푼이었다. 그리고 하루 90-80리를 가는 것을 약속하고 매일 진행 거리를 <대동여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일당을 지급했다. 이 같은 가마꾼 1명의 일당은, 당시 조랑말 타는 비용(10리 50푼)과 같아 결국 가마당 4인의 비용은 말타는 것보다 네 배 비용이 들었다. 포크가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이들에게 지급한 액수는 한 달 보름 동안 총 168,000푼이었다. 이는 대략 하루에 한 사람 당 320푼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냥(兩)-전(錢)-푼(分)’의 화폐단위가 현재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느냐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쌀 1섬(20말) 공정가가 5냥이었던 점을 바탕으로 현재 가치(2011년 물가 기준)를 환산해 1냥=7만원, 1전=7000원, 1푼=700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가마꾼의 일당이 22만4000원으로 상당한 고액이 된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1883년 2월 주조이익을 높여 긴급한 재정난을 모면하기 위해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했었다. 따라서 당오전에 의해 최소 5배 정도의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고려돼야 한다. 한편, 1894년 <교남수록>에 나타난 1끼 밥값 평균이 2전 8푼(28푼)으로 10년전인 1884년 포크가 지급한 25-30푼과 비슷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1894년 1끼 밥값 28푼을 실제 4,000원(2011년) 정도로 계산한 견해를 따르면 결국 가마꾼의 일당은 최소 4만5700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또 포크가 방문한 전라도에서는 당오전 통용이 안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 일당은 평균 일당 수준 5만여원에서 최대 2배인 10여만원까지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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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6 16:08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②전라도를 처음 찾은 포크, 금강에서 좌초된 미군함을 도운 익산 용안현감과 만나다.

△포크, 최초로 대동여지도 들고 전라도를 찾다 조선주재 미국 최초 무관으로 복무를 시작한 포크는 외교관이자 일종의 공식적인 정보원으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즉, 포크는 부임후 3개월이 채 안된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구체 정보를 직접 조사했다. 먼저 9월 22일부터 10월 7일까지 16일동안 서울 북서부, 경기 개성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2차로 1884년11월 1일부터 12월 14일까지 44일동안 경기, 충청, 전라, 경상지역을 돌고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서울로 복귀하는 조사를 진행했다. 포크는 이때 미 국무부에서 요구한 조선에 대한 군사적 정보와 지역현황을 포함한 모든 방면의 정보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포크는 조선정부가 제공한 '대동여지도'로 전체 일정을 짜고 이동수단으로는 당시 양반의 지방여행 시 활용한 가마를 타고 여행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는 자신이 휴대한 조선의 지도에 대해 정밀함에 감탄하면서, 하루에 80∼90리를 가기로 약속한 가마꾼들과 시비가 생길 때마다 대동여지도를 놓고 거리를 따지는 상황이 연출됐다. 종래 대동여지도의 사용에 대한 이야기는 이보다 1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과 이후 1905년 러일전쟁, 그리고 이어진 일본의 한국 토지측량에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다고 전했는 데 이번 기록을 통해 1884년에 미국인 포크에 의해 가장 먼저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포크는 직접 현장 사용을 통해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을 확인한 최초의 서양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포크는 나침반, 회중시계, 기압계, 온도계를 휴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온도, 기압 측정자료를 남겨놓았다. 특히, 미국이 관심 있었던 금광 등 지질광물 자원관련 정보도 기록하고 있다. 포크는 이와함께 각 지역의 공간 정황과 산성 등 군사적 방어거점 및 읍성 등의 지리적 특성을 기록하면서 순간 순간 스케치 형식으로 그림을 남겨 지형과 공간 특성을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미국 CIA가 가장 대표적인 휴민트의 전형으로서 그를 소개할 정도로 뛰어난 정보원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전라도에서 좌초된 미 군함을 도운 용안현감을 찾다. 포크의 조선 남부지방 여행목적 가운데 가장 먼저 해야할 임무는 금강에 진입했다 좌초됐던 미군함 앨럿호(USS Alert:경계호)를 도와준 관리를 찾는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현재 한국, 미국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으로 미 군함을 이용해 금강에서 증기선 운항 여부를 확인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포크는 앞서 공주에서 충청감사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에 충격받아 조선의 지방 행정체계에 실망했었다. 그런데 전라도 용안지역에 진입하며 용안현감이 미군함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미국측의 공식 감사를 전했다. 앨럿 호(USS Alert)는 미국 해군의 1,020톤, 전장 60.88m 전폭:9.8m의 철제 포함(gunboat) 증기선으로 포크가 1876년 아시아 분함대에 배속되어 처음 승선했던 배였다. 당시 포크의 주요 임무 가운데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수심조사가 있었는데 이는 조선의 세금 운반을 위한 증기선 운항 가능성 확인이었다. 이는 미국이 조선에 증기선을 판매하기 위한 사전 조사작업이었고 이를 위해 조창이 있는 전라도 용안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특히, 미국 군함이 이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금강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이 이번 자료로 확인되어 당시 조선의 조세운반 화륜선 구매경쟁에 미국이 적극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서 미국이 보빙사 귀국선으로 최신의 트랜튼호(USS Trenton)를 제공한 점과 나주를 꼭 가야되는 이유로 영산강 수심과 증기선 운항 가능여부 확인이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용안 현감부인의 ‘매우 훌륭한 전라도 음식’ 에 반한 포크 포크가 찾은 용안현감 김노완은 개화파 인물로 1880년 2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해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온 군인이었다. 1881년 신식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관여했다가 1882년 임오군란때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존재였다. 이후 1882년에는 지평현감을 거쳐 1884년 1월 용안현감으로 부임했다. 1885년 6월 '전라감사계록'에 나타난 평가에 의하면 그는 매우 성실하게 현감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평가됐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위한 선정패를 세우고 있음을 포크가 기록했다. 김노완은 1884년 갑신정변(12월 4일∼6일)의 와중에서 피해를 보지 않고 계속 관직을 유지했는데 그와 관련된 마지막 자료는 1899년 법부품보에 ‘을미사변 복수를 도모한 용의자’로 나타나 민비(사후 명성황후 추증)살해에 대한 복수 활동에도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포크는 타 지역에서 경험하지 못한 격조있는 손님접대와 전라도 음식을 용안에서 맛보았다. 포크는 2일간 머무는 동안 현감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통해 품격있는 전라도 음식과 손님접대를 받았다. 즉, 숙소에 꽃 화병을 놓고 수시로 감,배 등 과일을 제공하고 술잔에는 국화꽃을 띠우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할 수 없는 품격있는 대접을 받았다. 포크는 이때 받은 식사대접의 내용을 그림과 자세한 음식설명과 함께 ‘매우 훌륭한 성찬’이라고 표현했다. 포크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라감영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리했는데 전주에서 ‘포크 밥상‘을 개발한 것처럼 ‘용안현감 김씨부인 밥상’을 익산에서도 개발하면 좋을 것 같다. [차림내용] 밥,소고기무국,소고기 구운 것,삶은 계란,간 천엽, 육회 , 생선 젓갈, 튀김(전?),무채와 나물, 작은 그릇의 소고기국, 김치, 식초, 차가운 국수, 구운 통닭, 조개 젓, 생굴, 배, 김치, 감, 화로 위의 뜨거운 요리(호두, 소고기, 콩, 버섯, 그리고 적어도 4가지의 다른 야채와 허브가 모두 섞였다-신선로)/ 술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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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0 15:29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① 미국 최초 외교무관 포크 씨와의 만남

전북일보는 조법종 우석대 교수(교양대학장)가 전라감영 복원 과정에서 1884년 최초로 촬영된 전라도 관찰사의 사진을 추적한 이야기를 연속으로 보도합니다. 조법종 교수는 촬영자인 미국 외교무관 포크가 남긴 전라도 조사기록을 현장 확인과 함께 소개할 예정입니다. 서양인에 의해 기록된 140여년전 전라도의 생생한 모습을 통해 우리 근대 전라도의 실상을 파악하고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1883년 미국에 최초로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 포크와 만나다 2023년은 조선과 미국이 1882년 수교하고 최초로 서구에 공식외교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한지 1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당시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을 벗어난 이후 처음으로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서구세계와의 만남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했다. 당시 보빙사는 모두 20대로 민비의 친조카인 23살의 민영익과 영의정 아들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으로 구성됐다. 이때 보빙사와 40여일간 동행한 미국측 통역장교 역시 27살의 ‘조지 포크(Georgr Clayton Foulk; 한자 이름 복구(福久)’였다. 이들 20대의 조선과 미국의 청년들은 의기 투합해 결국 민영익은 포크를 조선주재 외교관으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여 결국 함께 귀국해 조선의 개화를 논의했다. △보빙사, 에디슨 전기조명을 단 화륜선타고 세계일주를 하다. 미국 21대 대통령 아서는 조선에 대한 호의 표시로 보빙사에게 에디슨 전기조명장치를 최초로 설치한 미해군 증기기관선 트랜튼호(USS Trenton)를 제공해 세계일주를 하고 조선으로 귀환토록 배려했다. 이에 부사 홍영식 일행은 태평양을 건너 바로 귀국해 고종에게 보고하고 정사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는 조선인 최초로 12월1일 뉴욕을 출발해 유럽 각국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를 지나는 6개월여의 세계 여행을 한 후 귀국했다. 당시 귀환 여정은 뉴욕-대서양-스페인 지브랄터 해협-마르세이유- 파리-런던-로마-수에즈운하-이집트-인도양-인도 봄베이-스리랑카-싱가포르-홍콩-나가사키-제물포 순이었다. 1884. 5. 31. 보빙사일행과 함께 포크는 제물포에 도착하여 6월 미국 공사관 해군무관으로 부임했다. △가마타고 조선을 조사한 포크, 전라도 최초 사진을 찍다 포크는 부임직후 조선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1884년 1차 9월과 2차 11월-12월 사이 조선의 중부 및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 여행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2차조사시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의 주요 지역을 여행하며 30분 단위의 기록과 대부분 최초로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들을 남겼다. 그런데 여행기간 중 갑신정변(12.3-12.6)이 발생해 조선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속에 ‘왜놈’으로 오해되며 신변 위협을 경험했고 갑신정변 직후 미국공사 푸트의 사임으로 조선주재 미국 임시대리공사를 맡았다. 이후 고종의 외교자문역을 수행하며 조선과 청의 갈등에 개입해 조선을 도왔으나 청과의 정치적 갈등이 촉발되어 1887년 미국 정부에 의해 미국외교관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편을 잡다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이 때 포크의 역할이 소재가 되어 2018년 방영된 ‘미스터 선샤인’ 주인공의 모델로도 알려졌다. 필자는 2021년 완공된 전라감영 복원을 위한 ‘전라감영 복원재창조위원회’에 참여해 부위장직을 맡아 감영관련 자료 고증 등을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전라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 자료들을 수집했는 데 출처를 알 수 없는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의 사진 2점을 확보하게 됐다. 이 사진은 전라관찰사와 6방 권속 등이 함께 찍은 사진과 4명의 기생이 춤을 추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확인을 통해 이 사진들이 바로 1884년 11월 10일에서 12일까지 전주를 방문한 조선주재 미국 공사관 무관인 미국 해군소위 포크가 찍은 사진이란 점이 처음으로 확인되게 됐다. 또한 포크가 매일 쓴 조사일기를 남겨 놓았고 이 일기가 2007년 사무엘 홀리교수에 의해 정리도어 책자로 간행됐다. 기록을 검토하면서 포크의 기록은 19세기-20세기초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남긴 초기 서양인들의 기록과는 그 수준과 내용, 형식 및 정보량에서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포크의 기록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미 국무부에 제출하기 위한 조사자료였고 또한 개인적으로 향후 조선에 대한 별도의 책을 저술하기 위한 원본 자료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1897년 포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 기록은 100여년 이상 전문이 공개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필자는 2021년 포크의 2차 조사여행 기록을 부인과 함께 번역하고 관련 현장들을 방문해 설명을 달아 책자를 간행했다. 그리고 2023년 올해 서구세계인 미국으로 떠났던 조선보빙사 140주년을 기념하고 조선에 부임해 우리의 근대시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남긴 포크의 기록을 소개해 근대로 진입하던 전라도의 모습을 본고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시기 우리의 과거모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 가에 대한 시대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은 중국 고구려사왜곡 대책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중등역사교과서 검정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 전라감영 복원재창조 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고 현재 전북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KBS역사스페셜, JTBC차이나는 클라스 등에 출연해 대중 활동도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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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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