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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⑭ 포크, 전라감영의 신비롭고 위엄있는 문화에 최대의 경외심을 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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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가 자신을 위해 북춤을 춘 기생 사진 설명을 “자신을 감화시키기 위한 춤”을 춘 무희라고 표현하였다. (흑백사진 AI 컬러변환 프로그램 변환 샘플로 색이 기록 내용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음)

 

△포크, 기묘한 전라감영 기생들의 북춤에 매료되다.

전라감영에서 포크가 경험한 대표적인 문화적 행사는 ‘춤추는 소녀인 기생들의 ’북춤‘이었다. 

포크가 경험한 전라감영의 공식 환영행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선화당의 커다란 대청으로 연결된 방문이 열리고 키가 큰 6명의 토속 악단(3현6각)이 툇마루에 자리 잡은 모습이 보였다. 이어 어마어마한 가채를 머리 위에 올린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이 두 개의 나무패(박)로 손뼉을 치듯 소리를 내자 네 명의 소녀가 어여쁘게 차려입고 열을 지어 뒤편에서 천천히 들어왔다. 각각 10인치(25cm) 높이에 적어도 18인치(46cm) 넓이의 머리카락 뭉치를 머리위에 쌓아올려 그 무게 때문에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명은 녹색 치마를, 한 명은 어두운, 다른 한 명은 연한 푸른색 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길고 풍성했으며 뒤로 질질 끌렸다. 그리고 치맛단을 팔 아래 몸통까지 바짝 올려 묶었다. 치마 위로는 노란색 비단 겉옷을 입었다.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빨강, 파랑, 녹색, 노랑, 그리고 하얀색의 띠로 이루어진 곧고 넓은 소매가 달렸다. 길고 축 늘어진 노리개와 두꺼운 붉은 끈들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소녀들은 무척 어렸다. 16-17세가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몹시 창백한 얼굴에 그다지 예쁘지는 않았다. 

악단이 기묘한 음악을 시작하자 뻣뻣하게 팔을 내민 채 천천히 미끄러지며 몸을 돌리는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노랑, 파랑, 그리고 하얀색 비단 띠로 장식된 커다란 북이 놓였다. 그 주변으로 무용수가 움직였다. 얼마간 한 줄로 움직이다가 다시 짝을 이뤄 마주보다가 등을 졌다. 그러더니 사각형으로 움직였다. 빨간 술이 달린 북채 네 쌍이 바닥에 줄지어 놓였다. 얼마 후, 소녀들이 줄을 이뤄 북채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자세를 바꾸다가 손에 주워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북 앞에 도달했고 다시 느린 동작으로 북 주변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곧 함께 북을 치기 시작했다. 매우 천천히 미끄러지는 듯한 무용수의 춤 동작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 춤 사진에 대한 위스콘신 대학 밀워키 도서관 자료 설명에는 “South Korea, dancers performing tongyong drum dance (victory dance): 한국의 통영북춤(승전무)을 추는 무용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포크는 ”자신을 감화시키기 위한 북춤(drum dance for my edification)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궁중잔치 때 춤추었던 대표적인 춤인 ‘무고(舞鼓)’의 내용으로 외방 관아에서도 관련 기녀들이 교류되어 연주한 북춤이다. 지방에서 행해진 것 중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통영의 승전무가 대표적으로 부각되어 위스콘신 대학 설명에서 통영 승전무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확히는 조선후기 의궤(儀軌)에 기록된 ‘무고(舞鼓)’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며 조선후기 전국 지방관아 소속 교방에서 연행되던 대표적인 춤의 내용으로 ‘전라감영 무고’로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춤에 대해 포크는 “가장 동양적이고 원초적”이란 표현으로 자신이 느낀 기묘한 신비감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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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고종14) 신정왕후 조씨 칠순진찬의궤(進饌儀軌) 무고(舞鼓). 가운데 북을 중심으로 북채를 들음 4인과 춤을 추는 4인으로 구성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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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순조29) 기축년 야진찬 궁중무용 무고재현 공연(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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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 수록 권주가. 네모부분에 “한무제가 이슬받은 것이니 잡수시오”라는 부분이 동일한 분분이다.

 

△전주 한정식의 원류 전라감영 음식과 술상을 받다. 

한편, 공연이 끝나고 포크가 유리원판 사진을 찍은 후 음식을 가득 쌓은 두 개의 상이 들어와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 상은 1상에 10명이 먹을 만큼 많은 음식이 배열되어 있었고 예전에 큰 잔치때 상에 수둑히 쌓았던 당과더미 등으로 가득한 상차림이 특징이었다. 이 내용은 송영애교수(전주대)가 연구한 ‘전라감영 외국 손님 접대 상차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별도의 술상이 마련되어 앞서 춤을 추었던 기생 중 한명이 대표로 술을 권하고 나머지 기생과 함께 길게 소리높여 ‘권주가’를 불렀다.  포크가 통역을 통해 그 내용을 그대로 적었는 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고대의 황제[한 무제]는  아침 이슬을 모아서 마시고 장수를 누렸습니다. 이는 술이 아니라 불로주입니다.  마음을 다해 마시고 천세를 누리소서.” 이 내용은 <청구영언>이나 <가곡원류> 등에 전하는 십이가사 ‘권주가’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필자가 확인한 전주에서 불린 권주가와 가장 유사한 내용인 부산지역에 전승된 권주가는 다음과 같다. 

“잡수시오 이 술 한잔  한무제 이슬받은 이 술 한잔  천만년 잡수시오 잡수시오  술이 아니라 승로반(承露盤:이슬 받는 그릇)의 것이오니  잡수시면 장수하오니라”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술상을 치우자 기생 한 명이 문간으로 나서더니 다른 소녀들과 함께 길고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 잡쉈소(Ta-chap-susso)!” 외침소리는 관아의 남자들이 합창으로 받아 전해졌다. 

 포크는 이 모든 것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884년 11월 10일-12일 2박 3일간의 전라감영 도시 전주를 방문해 다양한 경험을 한 포크의 한마디 인상은 ‘경외심’이었다. 그가 전라감영에서 보고 접하고 느낀 수 많은 상황들은 그에게  “신비로운 동양적 전제국가의 문화적 위엄에 경외심을 갖게하는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내가 앉은 곳에서 보는 광경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장면보다도 더 동양적이고 원초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기묘하게 흥겨운 춤을 추는 소녀들, 우뚝한 기단 위의 관아건물(선화당), 용, 호랑이, 커다란 북, 붉은색 기둥, 창과 무기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리들, 문 옆에 초록색 옷을 입고 일렬로 선 소년들 - 이 모두가 모여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하나의 멋진 장관을 만들었다.“

포크는 전라감영 전체 공간에서 풍겨 나오는 위엄과 아우라, 그리고 동양적 신비로운 의복과 색감, 형언키 어려운 음식과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음악과 춤 그리고 각종 의전 등에 흠뻑 빠져 자신이 경험한 아시아의 대표국가 중국이나 일본 어디에서도 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었음을 극찬하였다. 

이러한 전라감영관련 기록은 포크가 이전, 이후 타 지역을 조사하며 남긴 기록들과는 엄청난 질적 내용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조선 각 지역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며 여러 부정적 내용도 그대로 기록한 사례들과 비교할 때 전라감영에 대한 감동적인 느낌을 그대로 남긴 기록은 전라감영을 복원하고 새롭게 재창조하자는 현재 우리의 목표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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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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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전라도이야기 #포크 #전라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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