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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8) 전주를 떠나 나주로 향한 포크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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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를 맞이한 원평마을의 횃불모습을 연상케 하는 수원 화성의 연거(횃불들기)행사 모습/

 

△원평마을에서 밤길을 밝히는 횃불로 포크를 맞이하다. 

1884년 11월 12일까지 2박3일동안 머물렀던 포크는 12일 오전 다음번 목적지인 250여리 떨어진 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아직 추수가 진행 중인 논 사이를 지나며 그해 비가 많이 내려 벼에 달린 알곡량이 적다는 전라감사의 말을 확인하며 금구쪽으로 향하였다. 소나무숲이 풍성한 금구초입을 지나 음식이 차려진 금구관아를 지나쳐 주막에 머무르자 뒤쫓아온 나이든 현령(김병숙)이 예를 갖춰 맞이하고 ‘좋은 술’을 가져오게 해 대접하고 술값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여정을 진행해 5시50분 어두워진 길을 지나 큰 장이 열린 마을로 진입하였다. 이때 앞서가던 길나장이들이 밤 길을 밝힐 횃불을 책임진 ‘유사’를 외치자 마을사람들이 빽빽한 초가집 사이로 횃불을 들고 나타나 포크일행을 맞이하였다. 포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 관리들의 공식행차인 경우 어두워진 밤에 길을 가야할 상황이면 마을마다 횃불을 책임지는 ‘유사’라는 존재가 있어 길나장이들이 ‘유사!’를 외치면 이들이 주민을 독려해 다음 마을까지 횃불로 이어주는 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같이 포크는 밤늦게까지 길을 갈 경우 유사를 불러내 횃불로 불을 밝히고 목적지까지 강행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특히, 이 같은 내용은 조선시대 야간 군사훈련인 야조(夜밤 야操조련할 조)진행시 횃불을 밝혀 군사이동 등을 도왔던 연거(演멀리흐를 연 炬횃불 거:횃불을 멀리까지 밝힌다) 행사와 비슷한 모습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포크는 잘못하면 화재가 날 것같은 상황에서 원평주막에서 숙박을 하였다. 이곳은 마당이 넓고 가장 깔끔한 방이 있었는 데 자신이 원하는 만큼 깨끗하고 맛있는 밥이 나왔다고 특별히 기록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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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다리 마을에서 갈재(노령)을 넘어 장성 원덕리에서 포크가 만난 첫 번째 미륵상. /필자 제공. 유리원판 사진 촬영(노출 3초 조리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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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장성지방도에 나타난 노령(갈재)길과 포크가 마난 미륵불상이 있는 원덕마을 모습. 갈재길 옆 위로 입암산성이 보인다.

 

△정읍 갈재(노령)를 넘어 장성초입 미륵불을 만나다.

11월 13일 원평을 떠나 포크는 크고 예쁜 마을인 태인을 지나며 마을 한중간에 있는 섬이 있는 연못(피향정)을 지나 길을 재촉해 저녁 6시5분 정읍의 군령다리마을에 도착했다. 포크는 이곳의 이름이 군령(軍令)다리(‘군대명령 다리’) 마을이란 점과 바로 다음 지역이 “긴 성벽의 요새”라는 의미인 ‘장성(長城)이란 점, 그리고 두 지역 중간에 있는 갓바위산 위에 있는 산성(입암산성)등의 군사적 중요거점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기록을 남겨 군인으로서의 중요한 정보파악력을 보여주고 있다. 

11월 14일 오전 현재 전북과 전남의 경계인 갈재(노령산맥)를 넘으며 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와 장성초입에 있는 원덕리마을의 미륵상을 지나며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골짜기 바닥 마을에 있는 미륵상(Miryok)을 만났다. 15피트(4.5m) 높이로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겨우 머리만이 인간처럼 보였다. 나는 긴 귓불과 이마 앞머리의 ∧∧∧문양을 보고 부처라고 판단했다.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자는 가장자리에 가리비 조개껍질 무늬가 있는 평평한 돌이었다.”

이 원덕리 미륵상은 돌기둥 모양의 석장승같은 이미지의 불상으로 수호신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불상이 있는 곳은 노령산줄기를 넘는 사람들의 숙박공간인 미륵원(彌勒院)이란 역원이 있던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장성의 [역원]에 “미륵원(彌勒院) 현 북쪽 21리에 있다. 원 북쪽에 돌 미륵불이 있는데 높이가 4, 5길이나 되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불상이 고려시대 양식인 것으로 볼 때 원래는 사찰이 존재하였던 곳을 조선 시대 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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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근 '기산풍속도첩'-넉넉한객주.  1890년대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MARKK) :국립민속박물관,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 2020. 63쪽.

포크묘사 영신역원 구조와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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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in entrance(대문)

b. kitchen(부엌)

c. open center-yard(마당)

d. guest rooms(건너방)

e. host's room(주인방)

f. anpang, wife's room(안방)

g. shed for wood(땔나무간)

h. stables(마굿간)

i. shed(헛간)

j. shelves for dishes(그릇 놓은 선반)

k. porch(쪽마루)

l. little room(쪽방)-sleep or rest

m. front porch(앞 쪽마루)

n. a shed-open for luggage & (창고)

o. back gate(뒷문)

p. cooking place heats room(부뚜막) 

 

△조선의 전형적인 주막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다.

이곳을 지난 포크는 장성 관아를 피해 장성 월평장(황룡시장)을 지나 5시경 외딴 주막에 도착했다.(위치상 영신역원으로 추정됨) 이곳은 다른 주막에 비해 꽤 크고 깔끔했으며, 포크는 여주인 방인 안방(anpang)을 차지고 통역인 전양묵과 집사 정수일은 주인 방을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의 방에 있는 작은 화장대용 상자와 약간의 비단 옷, 옷상자 따위를 본 정수일이 이 주막 주인이 보통 시골 백성들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고 ’주인의 배필‘인 안방의 주인이 아내가 아니라 분명 첩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녀가 조선의 시골 여자로서 좋은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곧이어 안방의 주인이 등장해 처음 본 서양인에 놀라 정상적인 응대를 못하는 상황이 진행되었는 데 포크는 그녀가 첩인 점을 확인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표현에 본 부인은 이곳보다 훨씬 허술한 곳에서살것이라는 말을 덧붙인 점이다.

한편, 포크는 이곳의 구조와 모양이 전형적인 조선 주막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림을 그려 주막의 모습을 도면으로 표현하였다.

이 기록은 1884년 11월 14일에 주막 현장에서 그려진 현존 주막에 대한 기록 가운데 유일한 구조도라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향후 이 그림을 근거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주막을 재현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더욱 중요하다

그 내용을 보면 주막의 공간구조는 전형적인 □자형 공간으로 이 구조는 19C말-20C초에 활동한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에 나타난 ‘넉넉한 객주’ 모습이나 ‘촌가녀막’과 기본적 구도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준근의 그림은 앞서 포크와 같은 시기 근무한 영국 외교관 칼스의 저술에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시기 상황으로 파악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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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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