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를 발급받아 여행을 다니다.
1884년 9월과 11-12월 2차례에 걸친 조선지역 조사를 위해 포크는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1882년 12월 설치된 외국과의 외교교섭과 무역거래업무 전체를 관장하는 행정부서)’에서 발급한 국내여행증명서인 ’호조(護:보호할 호 照비출 조)‘를 발급받아 자신이 방문한 지역 최고 책임자들에게 확인을 받으며 조사여행을 진행하였다. 호조(護照)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통행증명서로서 개항 이후 외국인 통행증의 개념을 지닌 증명서였다. 호조의 발행은 주로 중국 및 일본 상인을 위해 발급되었던 것인데 포크의 호조는 미국공사관 외교관의 호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가 크다. 포크는 충청-전라-경상지역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각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감사를 비롯한 관리들에게 제출하고 승인을 받았다. 이를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 갑신년 8월 발급된 호조와 갑신년 9월 발급된 호조 두 가지가 전하는데 갑신년 9월 발행 호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護照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爲 給發護照事照得 美國人海軍中尉福久氏游 歷忠淸全羅慶尙道等地 合行給照護送仰沿途 各官驗照放行毋令阝且滯該員亦不得 藉端遠留致于事究切切須至護照者 右給 海軍中尉福久氏 持憑
甲申九月 初八日 限 回日繳銷
忠淸監司 朴齊寬 忠州牧使 李鎬喆 晉州牧使 金靖鎭 全羅監司 金聲根 羅州牧使 朴奎東 |
호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미국인 해군중위 복구씨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지역을 다니는 것에 대한 호조를 발급함. 지나는 길의 각 관리들은 호조를 살펴보고 통행을 허가하며 (방해받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해당 관원은 또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머물게하여 조사를 받는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 이것을 해군중위 복구씨에게 지급하여 증빙으로 소지하게 함 갑신년 구월 초팔일 돌아오는 날을 한도로 하여 효력이 정지됨
충청감사 박제관 충주목사 이호철 진주목사 김정진 전라감사 김성근 나주목사 박규동 |
△포크의 여행경비 차용과 비용 반환기록
한편, 포크가 소지한 호조는 단순 여행 허가문서 기능 이외에 ‘여행경비 현지 차용허가’ 기능도 갖고 있었다. 즉, 포크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비용을 지급했는데 당시 매일 지급한 기본비용은 조사단 18명의 매끼 식사비(20-30푼), 짐 운반 말 사용료 10리 당 50-60푼, 12명 가마꾼 10리당 50푼 등으로 포크가 계획한 1일 90리를 갈 경우 매일 지급되어야 할 비용이 식사비 1620푼, 말 3마리 임대료 1,350푼, 가마꾼 12명 일당 5,400푼으로 총 8,370푼이었다. 당시 포크는 비용지급을 위해 조선화폐인 상평통보 1푼과 당오전 5푼을 지참하고 관련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1푼짜리 1,000개의 무게가 3Kg 이상이란 점을 고려할 때 8,370푼의 무게는 하루 25Kg에 달하는 무게로 엄청난 무게의 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같은 과중한 무게의 경비는 한꺼번에 준비해 50여일에 가까운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에 포크는 조사 기간 동안 경유하는 지역의 감영과 목 지역에서 관련 비용을빌려 쓰고 이후 서울 복귀 후 변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크는 자신이 여행하는 도중 갑신정변(1884.12.4.-6/양력)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실패한 사실을 12월 8일 경상도 상주로 가던 도중 점심 무렵에 듣게 되었다. 특히, 자신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민영익의 피습(생존여부 불명) 소식은 이후 조선의 민심이 급변한 상황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조선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활동을 마치고 12월14일(양력) 서울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미국공사 후트에 의해 일주일만인 12월 21일 임시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이같은 혼란 상황 속에서도 포크는 12월 24일 갑신정변 실패 후 친청 수구파로 재구성된 조선 정부의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에게 전라감영 등에서 빌린 차용금을 반환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미안美案]에 남아있다. 내용은 영문과 한문으로 되어 있는 데 영문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내륙지방 여행을 시작하기 전인 10월 28일에 폐하 외무부로부터 받은 신용장과 함께 이 자리에 다시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서신을 제시한 후 아래와 같은 금액을 지급 받았습니다
충청도 | 공주-충청감영 | 10000 푼 |
전라도 | 전주-전라감영 | 5000 〃 |
전라도 |
나주-나주목 | 10000 〃 |
경상도 | 진주-진주목 | 20000 〃 |
충청도 | 충주-충주목 | 5000 〃 |
총액 | 62000 〃 |
각 지역의 금액과, 저에게 돈을 선불한 지방 및 지역 이름과 함께 직원이 직접 작성한 확인내용이 신용장 뒷면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신용장의 조건에 따라 돈을 제공한 각 관리에게 나는 영문으로 된 영수증을 주고 금액도 한자로 표시했습니다. 신용장을 가지고 저는 총액 62,000푼을 폐하의 외무부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영수증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이 서신을 마치면서 저는 여행하는 동안 저에게 매우 귀중한 신용장을 제공해주신 폐하의 외무아문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뜻을 받들어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C. 포크 미 해군 중위 미국 해군성
조병호 외무독판 각하께
차용금액 단위를 영문에서는 ‘푼(pun)’으로 표시하였는 데 한문으로는 ‘량(兩)’으로 표기해 100푼(分)=1兩 단위 환산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포크의 조사일기에는 앞서 공주에서 받은 5푼 동전 10000푼 중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전주이남 지역에서 5푼 동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5푼 동전 4000개를 1푼 동전으로 바꾸고 역시 추가로 전라감영에서 5000푼을 더 요청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5푼 동전은 1883년(고종 20) 2월에 주조된 당오전(當五錢)을 말한다. 주목되는 것은 포크가 전주에서 들은 내용인 “전주 이남지역에서 5푼 동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당오전은 비록 명목 가치가 상평통보의 5배로 결정되었으나, 경기도·황해도·충청도 등 정부의 행정력이 비교적 쉽게 미칠 수 있는 지역에서만 통용되었던 상황을 반영한 사실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년후인 1885년 전라감사 김성근이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의해 비리가 지적되었는 데 그 가운데 서울로 보내는 엽전을 모두 당오전으로 바꾸어 보낸 사실 등이 문제되어 벼슬이 박탈되는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앞서 포크의 당오전 20,000푼을 1푼전으로 바꿔준 사실이 이 같은 문제와 연결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감안되었는 지 전라감사 김성근은 1년 뒤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복귀되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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