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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⑮포크가 만난 전라관찰사,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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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9월 8일 덕수궁 준명당에서 찍은  퇴위한 고종 탄생일 기념사진속 김성근(붉은 원). 왼쪽부터 원로 각료인 이정로(남작), 심상한, 김윤식(자작), 김성근(자작), 이용원(남작), 고종, 김병익(남작), 민종묵(남작), 서정순, 이주영(남작), 김영전. 괄호 안은 1910년 10월 총독부로부터 받은 조선 귀족 작위. 김윤식은 3·1운동에 참가해 박탈됐다.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김성근도 자작 작위가 수여되어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근거가 되었다.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 촬영. /한미사진미술관 

 

1884년 11월 10일 전주에 도착한 포크는 전라감영을 방문해 당시 50세였던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을 만났다. 김성근은 안동 김씨로 헌종1년(1835) 한성(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철종 12년(1861)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9년(1872) 성균관 대사성(정3품 성균관 전임 관원) · 좌승지(정3품 승정원=비서실, 호조담당)를 역임하였다. 1874년 이조참의(판서(장관)-참판(차관) 다음의 정3품 관직(차관보)를 맡았고, 1879년부터 예조 참판(종2품, 차관급) · 호조 참판 · 한성부 부윤(종2품 시장)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1883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서재필의 외숙(外叔)으로 서재필박사가 어린시절 한양 김성근 집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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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용안동헌에 있는 김성근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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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전라도관찰사 인사발령부인 <호남도선생안>(고종12년, 1875)에 추기된 김성근 관련 기록

 

전라감사 김성근은 부임 후 흉년으로 피해가 큰 백성에 대해 휼전을 부과하고 신역을 탕감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수재나 화재 발생시 구휼조치를 시행하였고, 특히 나주 등 10개 고을의 진결(묵힌 토지)에서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폐단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또 1884년 초에 발생한 가리포민란을 조사하여 흉년에 탐관오리의 탐학이 더해지면서 민란이 발생하자 가담자와 부정관리 모두 법규대로 처리해고 하는 등 지방관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데 힘쓴 것으로 평가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임기가 만료되어 1884년 12월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고, 1885년 2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그런데 1885년 전라도 좌,우도암행어사 모두 김성근의 전라도 관찰사 재직시 규례위반과 공금 유용 혐의로 징계를 올려 의금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 결과 어사의 규탄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임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복직되어 공조, 형조, 이조, 예조 등의 판서직을 두루 거쳤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5월24일 예조판서로서 조경묘와 경기전 어진 배봉문제로 전주에 왔었다. 1903년 탁지부(재정부) 대신을 거치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후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성근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관련 행적이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김성근의 말년 행적은 전형적인 조선지배세력 중 일제에 투탁한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여준 사실을 보여주었다.  1913년 다나까 세이고우(田中正剛)가 편찬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서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풍채가 훌륭함, 높고 귀한 관직을 두루 지냈으되 청렴함으로 스스로를 지켰고 필법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나이가 현재 팔순인데도 여전히 완력이 웅건한 까닭에 높은 명성이 일세에 뚜렷이 드러난다고 평하였듯이 서예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 <근역서화징>에 글씨가 전한다. 1919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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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가 만난 전라도관찰사 해사(海士) 김성근이 78세에 쓴 부산 ‘금정산 범어사’편액. 김성근은 자신의 환생 이야기와 관련된 해봉(海峯)스님의 바다 해(海)자와 선비 사(士)자로 자신의 호를 ‘해사’라 하고 많은 불교사찰 편액들을 남겼다. 범어사편액은 ‘해인당(海垔堂)’이라 썼다.

 

△전라감사 김성근, 자신의 환생관련 이야기를 포크와 나누다.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다시 만난 전라감사 김성근은 포크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되어 전주의 승려가 환생하여 자신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포크에게 전했다. 

”꽤 많은 대화가 이어졌고 점점 동양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그는 얼마 전, 전라도의 어느 산속 동굴에서 발견된 50년 된 종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는 “나는 불교 승려 ○○이다”라는 글에 이어 50년 전 날짜가 쓰여 있었고 이어서 “나는 (그 날짜)에 태어나서 전라도의 감사가 됐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쓰인 날짜가 그의 계산에 따르면 자신의 생일 해당 월과 일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말했다. ... 그는 오래되어 노랗게 변한 종이를 내어놓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번역해 주었다. 그는 이런 일이 불교적인 환생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미국)에도 이런 일이 있는지 등, 내 생각을 물었다.“

이 내용은 매우 독특한 기록으로 포크의 기록과는 별개로 당시에도 이미 불교 환생담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즉, 앞서 소개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 1913년에서 김성근에 대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김성근)씨는 출생전에 전주군 원암산 원등암(遠燈菴)(현 완주군 소양면 청량산 '원등사') 석함속에 보관된 글 가운데 원등암의 승려 해봉(海峯)은 이름이 성찬(聲贊)인데 모년 모월일에  한성의 재상 김모로 태어나리라고 하였다. (김성근)씨는 호를 해(海)자를 사용하였고 이름에는 성(聲)자를 사용하였으니 기약치 않았으나 서로 부합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왕수인(王守仁)고사와 비교해 말한다.

(氏出生前 全州郡猿岩山遠燈菴石盒中 有藏書曰本菴僧號海峯名聲贊某年月日書 後身爲漢城宰相金某云 氏號海字 名聲字 不期相符 世人以此比王守仁故事)

이 내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서예가로서 활동한 김성근의 독특한 환생담을 일본인들도 흥미로와하며 기록한 것이다. 이 내용이 남겨질 정도로 이미 당시에도 많이 회자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유사사례로 소개한 왕수인(王守仁)고사는 중국 명대(明代) 대표적 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양명학을 정립한 왕양명의 환생담이다. 즉, 왕양명이 제자들과 함께 중국 절강성의 진강(鎮江) 금산사(金山寺)를 방문하였다가 50년전에 돌아가신 스님이 자신으로 환생하였다는 게송(偈頌;스님이 돌아가시며 남긴 글귀) 기록을 발견한 사례와 김성근의 환생담 내용이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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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활동에 적극 참여한 80세 김성근 관련 신문기사. 서울 인사동 자택에서 3.1 독립선언때  민족 대표 33인중 한분인 백용성 스님을 모시고 수불繡佛(자수로 표현된 부처) 봉안식을 거행한 내용소개.   매일신보 2면5단(1914.11.03.)

전라감사 김성근이 포크에게 보여준 50년전 종이 기록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원암산에 원등암(遠燈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곳에 해봉이라는 주지가 있었다. 해봉 스님이 1834년 입적하면서 원등암 석굴에 조그만 석함을 두면서 “이 석함은 전라 감사로 부임하는 사람만이 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이 원등암을 찾아 석함에서 7언 4구절로 된 한시가 적혀 있는 서한봉투를 얻었는 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원암산의 붉은 해가 서울 도성에 떨어져 재상의 몸을 받게 되었으니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스님이지만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이 되도다

(遠岩山上 日輪月  影墮都城 作宰身 甲午以前 海奉僧  甲午以後 金聲根)

도광 14년(1834) 갑오 5월 15일 해동 사문 해봉 성찬이 원등암 16 굴 중에 향피고 묻어두다.

이후로 해봉스님의 이름을 따고 선비 정신을 기리는 뜻을 담아 호를 해사(海士)라 했으며.  많은 절을 찾아 다니며 부산 금정산 범어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구 팔공산 범어사 등 수많은 사찰의 편액의 글씨를 남겼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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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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