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는 44일동안 조선의 남부지역을 지나며 다양한 조선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기록이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자신을 위해 북춤을 추고 권주가를 불렀던 전주 기생(妓生)[Kisang]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전주를 떠나기 전날 그의 일기 마지막에는 서울과 전주에서 보고 들었던 기생들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이곳 감영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자와 매춘부, 기생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관아에 복무하는 존재였지만 민가에 나가는 것도 허용되었다. 서울의 궁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라감영에 존재한 많은 여자들 가운데 매춘부와 기생을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나타난 ‘기생(妓生)’의 ‘기(妓)’란 ‘여악(女樂)’ 즉, ‘여자음악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기녀를 창기(娼妓)로 불렀던 사실은 고려, 조선시대에 나오는 데 <성종실록>에서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기(娼妓)는 본래 어전(御前)의 정재(呈才:대궐에서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와 대소의 연향(宴享:국빈을 위한 잔치)를 위하여 마련된 것인데 ...” ( 성종 9년(1478) 11월 23일)
라고 하여 결국 왕실과 국가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여성 음악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런데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배우는 단계에 있는 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생(生)’자를 붙였다. 결국 생(生)이란 배우는 자라는 의미의 생도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생은 여기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생이란 의미로 나타난 표현이 일반화된 표현으로 파악된다. 이같은 사정은
성종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보낸 글 가운데 여기(女妓)를 양성하는 창기소(娼妓所)가 서울과 지방에 분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경외(京外)의 창기소(娼妓所)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宴享)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 “(성종 17년 10월 27일 )
그리고 이 같은 양성기관이 교방이었다. 전라감영 교방에는 19세기 후반 호남읍지등에 전주부 교방에 34명의 기생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앞서 포크를 위한 북춤을 추고 권주가를 불렀던 4명의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들은 그야말로 전문 음악인인 ‘창기’가 되기위해 전라감영 교방에서 수련을 쌓고 있던 ‘기생’들이었다. 그리고 4명의 무용수들에 앞서 등장한 2명의 나이가 들은 여인들은 이들을 ‘교육하는 창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훈몽자회>(조선 역관이자 중국어학의 대가인 최세진이 1527년(중종 22)에 쓴 한자 학습서)에서 창(娼)을 녀계 챵, 기(妓)를 녀계 기로 설명하고 있는 데 이들 ‘녀계’가 음악과 춤을 담당한 여자들에 대한 총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녀계’의 남편들이 모두 ‘악공(樂工)이라고 기록해 이들 ’녀계‘의 성격이 전문 여성 음악인에 대한 총칭이었고 같은 음악을 하는 악공과 가정을 이룬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녀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여성음악 전문직이었다.
그런데 포크일기를 정리해 처음 책으로 간행한 사무엘 훨리 교수는 포크의 11월 11일 전주기록에 연이어 포크가 자신의 조사일기 중 맨 마지막 부분에 [일반사항]이란 제목으로 ‘조선의 매춘부’라고 제목을 달고 별도로 기록한 다음 내용을 첨부하였다.
[일반사항] 조선의 화류계 여인들
외입쟁이(We-ip-chang-i) : iro otoko (이로 오토코 いろおとこ:色男) (정부(情夫), 호색한을 뜻하는 일본어)
은근짜(Unkuncha) : 은밀한 매춘부, 버려진 메카케(めかけ) (일본어로 첩을 의미)
더벅머리(Topongmori) : 공개된 매춘부, 하지만 메카케.
통지기(Thongjiki) : 서방질을 잘하는 계집종.
사당(Satang) : 남자의 등에 업혀 다니는 시골 여자들, 주막의 가수이자 협잡꾼이다. 큰 고을에는 없다.
색주가(Sakchuka) : 술을 파는 여자, 선술집의 협잡꾼, 집에서 몸을 파는 창녀로 보면 된다. 집에 머문다. 대개 이런 집들은 많은 수가 가까이 모여 있다. 각 집에 창녀가 한 명씩이다. 서울의 서문 밖에 많다.
기생(Kisang) : 별감 가마꾼의 첩, 승지 사령의 첩. 이들은 두 종류의 길나장이가 빌려준다. 이 남자들은 기생 외입쟁이(We-ipchangi)이다. 서울의 기생 외입쟁이는 가끔 여자들 문제로 큰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대략 종로나 남대문으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곤봉 따위로 싸우며 기생 구역을 다툰다.
이 기록은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존하는 조선의 화류계 여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 가운데 가장 앞선 기록으로 파악된다. 종래 ‘조선의 화류계 여인’에 대한 가장 자세한 첫 기록은 1927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이다. 여기서 ‘해어화(解語花)’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당나라 현종(玄宗)이 양귀비를 ‘해어화’라 지칭한 것에서 유래했는 데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한국기록에서는 연산군,광해군 기록에서 실제 특정 기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어 ‘해어화’가 기생을 부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이능화가 이를 책이름에 사용하여 ‘해어화=기생’이란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능화는 이 책에서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내용을 상세히 밝혔다. 책은 모두 35장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8장에서는 조선에서 기생제도를 설치한 목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잔치에 흥을 돕기 위해서이고, 둘째, 의녀나 침비 같은 기능직을 맡기기 위해서이며, 셋째, 변방의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고, 넷째, 지방의 관청에서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마지막 35장에 갈보종류총괄(蝎甫種類總括)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조선의 화류계 여성들에 대한 종류를 소개하였다. (갈보는 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갈보(蝎鋪)’라고 빈대를 적은 대목이 있다. 이능화는 ‘피를 빠는 곤충’에서 갈보에 빗대어 이들 여성을 설명하였다.)
기생(일패)은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지방 관아의 교방에서 가무교습을 받은 여악(女樂)으로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30여세에 관기를 은퇴하여 술집을 열거나 전업하였다.
은근짜(隱君子(이패)는 은근자(殷勤者)로도 불렸는데 남들 몰래 매춘(賣春)을 하는 부류
탑앙모리(搭仰謀利=더벅머리?, 삼패)는 잡가정도를 부르며 매춘 자체만을 업으로 삼는 부류를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삼패에 속하는 자로 사찰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각지로 돌아다니며 묘기와 몸을 파는 여사당패(女社堂牌),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色酒家)였는데 작부(酌婦)로도 표현.
이같은 이능화의 분류 내용과 설명은 현재 ‘표준국어대사전’등 대부분의 자료에 이들 내용이 거의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1884년에 이미 포크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이들의 명칭과 성격을 나누어 체계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조선의 실상을 세밀히 조사하는 군사정보원의 역할을 수행한 포크의 정보 수집내용의 양상과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포크의 소개자료에서 주목한 것은 맨앞에 언급된 외입장이와 기생과의 관계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능화가 사용한 일패, 이패, 삼패같은 등급화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최근 이능화의 이같은 조선 기생에 대한 일패, 이패, 삼패 라는 왜곡된 기생의 정의와 분류법과 설명에 대해 여악의 전통을 계승해온 전문예인인 기생을 조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까지도 몸을 파는 조선의 창녀 매춘부 가운데에서도 가장 하위계급의 집단인 갈보로 왜곡시켜 놓았고 존재하지도 않던 일패라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냈고 당시 일반 시정에서 매음을 병행하며 잡가 정도만을 할 수 있었던 삼패를 가무를 전업으로 하던 전문 예인집단인 기생의 범주에 자의적으로 끼워넣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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