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어느 늦은 봄날.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대로변 어느 건물 3층. 또렷한 춘향가 중 사랑가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짧은소리와 더불어 불호령 같은 선생님의 외침. “틀렸잖아. 그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냐.” 문 앞에 다가섰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조용한 틈을 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찾아온 손님이 무색할 정도로 소리 지도에만 몰두한 50대 초반의 무서운 선생님. 모질게 야단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소리를 받는 어린 소녀. 거실을 정리하고 있지만,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오직 소리에만 빠져있는 한 청년. 그 시절 옛 모습은 판소리를 배우겠다고 전주로 낙향 후 처음으로 바라본 이일주 명창, 송재영 명창, 장문희 명창의 모습이다.
지난 5일 판소리 거장 이일주 명창이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터지는 듯한 마음을 추스르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필자에게 이일주 명창은 국악을 처음으로 알려주시고 평생 업으로 시작하게 해주신 큰 스승님이셨다. 경제적 여건이 좋은 타 이과 공부를 포기하고 전주로 낙향한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셨는지 이일주 선생님의 첫 만남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며칠하다 갈꺼면 배우지 마시여.” 필자에게 하신 첫 말씀이 그랬다. “아니에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받아주세요.” 그제야 선생님은 마음을 여시고 이야기를 푸셨다. “소리는 어려워. 단단히 맘먹고 해야 해. 전주까지 내려왔으니 그냥 내 집에 살아. 살면서 공부해. 옛날엔 다 그렇게 했어.” 당황한 필자를 바라보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그 모습. 필자는 그렇게 이일주 선생님과 송재영 명창, 선생님의 조카 장문희 명창과의 동거에 들어갔고 3년간 함께 생활하며 소리 속을 익혔다.
생전의 이일주 선생님은 곧으시고, 정직하셨다. 오로지 소리밖에 몰랐다. 음식도 잘 못 만드셨고 돈도 선생님에게 큰 중요한 삶의 요건이 아니었다. 소리에만 한평생을 바치셨던 진정 예술가였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제자 중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많다. 우리 예술가는 평생 자신의 예술을 위해 인생을 바친다. 하지만 세상의 허무에, 세속의 야속함에, 생활의 배고픔에 많은 포기를 한다. 그렇게 넘어지고 쓰러질 때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셨던 분이 필자에겐 바로 이일주 선생님이셨다.
이제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선생님이 남기신 소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소리만 생각해라. 용호야.”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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