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서 자백을 하고 말았다. 이제 시간이란 말보다 세월이란 말이 좋다. 나는 서른 중반에 다다른 노총각이다. 농익은 가을이 오면 노총각들은 자전거가 아닌 가을을 탄다. 불타는 단풍을 보며 가슴이 타들어가며 가을을 타는 것이다. 내친 김에 시도 한 수 읊어본다.
'싱'하고 가을바람 부니
'숭'하니 가슴에 구멍 뚫린다.
'생'하고 처녀가 외면하니
'숭'터(흉터)만 가슴 속에 커져간다.
처녀 마음 설레게 하는 게 봄이라면 노총각 마음 뒤흔들어 놓는 것은 가을이다. 이 가을, 몸 던질 절벽이라도 어디 없을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에 앞서 이름도 새로 지었다. 이제부터 내 이름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여행의 동반자로 부부의 연으로부터 아직은 자유로운, 다른 영혼들을 섭외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벌써 20년 된 친구들이다. 박국희(전주시 동서학동), 최윤근(전주시 효자동)이 이번 여행에 흔쾌히 동참했다.
가을산은 노란색부터 빨강을 거쳐 짙은 녹색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색의 스펙트럼을 다 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눈이 내린 듯 산등성이를 두른 하얀 억새가 절정에 치닫고 있다는 장수군의 장안산 억새밭 소문을 들었다. 가는 김에 장수군 계북면 토옥동계곡, 장계면 논개생가도 함께 들리기로 했다. 드디어 여행의 코스가 완성됐다.
주말인 지난 24일 낮 12시 세 친구가 모였다. 익산~포항고속도로 소양IC에 들어서 장수IC로 빠져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 통행료 2500원을 지불하고 나니 드디어 산과 들녘이 아늑하게 펼쳐져 있는 장수군에 도착했다.
19번 국도를 타고 계북면 방향으로 자연을 즐기며 20여분 달렸을까? 양악호 제방이 눈에 들어왔다. 제방 높이가 30여m에 달하고 물을 담는 면적이 394ha에 이르는 비교적 큰 호수. 최근 강수량이 적은 탓인지 수위는 무척 낮았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산세와 어울린 저수지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제방길에는 갈대가 늘어서 있고 제방 아래로는 계곡과 들녘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양악호를 타고 굽지고 경사 높은 도로를 꾸역꾸역 올라가 토옥동계곡 입구에 이르렀다. 일군의 등산객은 짙붉은 단풍을 즐기며 산행을 준비했다. 20개의 골짜기가 얽히고설킨 토옥동계곡은 여름철 휴양지로 손꼽히기도 하고 한 민박집에서 파는 깨끗한 계곡물로 양식한 송어회도 일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골짜기를 갈까 산행을 할까하다 일정에 쫓겨 논개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온 길을 거슬러 장계읍을 지나 743번 지방도를 타고 가는 길은 가히 추천할 만한 드라이브 코스다. 도로변에 대곡호를 끼고 짙게 단풍 든 가을산의 정취를 느끼며 30여분간 차를 몰아 장계면 대곡리 '의암 주논개 생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무지가 땅을 뚫는 노총각 3명은 논개의 성이 '주씨(朱氏)'이며 조정에서 '의암'이라는 사호를 내렸고 기생이 아닌,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병사가 돼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최경회 장군의 아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주논개가 19살 나이에 관기로 위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했다는 점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논개의 영정 앞에 섰다.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은 여성의 영정 앞에만 서면 오래된 트라우마에 괴로워진다. 짝사랑을 전공하던 대학 1학년 무렵 광한루에서 정신적 외상은 비롯됐다. 당시 두 여학우를 흠모하던 '자유로운 영혼'은 절개의 상징인 춘향의 영정 앞에 섰다. 춘향사당에서 연인과 관련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말에 "A양 안되면, B양이라도"라고 속으로 되뇌었던 게 화근이 된 듯, 그 이후로 14년이 되도록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하간 이번에는 세 노총각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주논개의 명복을 빌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장안산으로 향했다. 큰 길을 따라 10여분 차를 몰아 무룡고개에 도착했다. 용이 춤춘다는 뜻의 이 고개는 예전에는 춤추는 용이 사는 집이라 하여 무룡공재로 불리기도 했다. 산 밑에서 장안산 정상까지는 3km 남짓. 아주 우스운 거리 같지만 등산 초보들이 얕잡아 볼 코스는 아니라는 충고를 진지하게 건네고 싶다.
내리막은 별로 없었고 산세는 아름다운 듯 하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땅에 처박느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주말인지라 부모와 함께 온 초등학생들이 '자유로운 영혼'을 앞질러 가기도 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페이스를 지키기로 했다. 시간을 재 봤더니 40분쯤 걸렸다. 정상까지 1km 남은 곳에 억새밭이 펼쳐져 있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산등성이를 타고 펼쳐져 있는 억새밭은 가을바람에 살랑거리며 인사를 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려하고 있어 운치를 더 했다. '야호'라고 외칠까 했지만 노총각들은 나이를 생각해 그만 두고 잠시 억새밭을 둘러봤다. 백두대간의 기운을 전라도와 충청도에 전하는 호남의 종산(宗山)이라는 장안산. 저만치 영취산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정상에 오르는 대신 하산을 하기로 했고 30분 만에 다시 무룡고개에 돌아왔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재미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무룡고개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양관식씨(58)가 그런 사람이었다. 양씨가 운영하는 무룡고개 공식 매점 '즐거운 휴식공간'에 자리를 잡고 번암주조에서 약재를 넣어 만든 동동주 '명주'와 도토리묵, 파전을 시켰다. 장수 특산물인 오미자차는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었다. 양씨는 무지한 노총각들에게 주논개 일가의 역사와 황희 정승의 선조가 대대로 장수에서 살았으며 황희 정승의 탄생과 관련한 설화 등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얘기 속에 묻혀 해가 지고 바람이 거세졌다. 숙소인 계북면 양악리 무병장수마을체험관(숙박비 8만원)에 가기 앞서 초원가든에서 계북초 노인한글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김영미씨(41)를 만났다. '장수골 영미아줌마네'라는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오미자 원액 등을 판매하는 김씨와 함께 오미자주를 거나하게 마셨다. 모처럼 만의 여행으로 노곤해진 몸은 맛있는 오미자주에 스르르 녹아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눈을 뜬 세 노총각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왔던 길을 거슬렀다. 익산~포항고속도로 진안 부근에 다다랐을 때 마이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짙은 날이면 구름 위에 두둥실 뜬 두 개의 큰 바위덩어리같은 마이산을 볼 수 있지만 이날은 시계가 너무 좋아 아쉬웠다.
여행은 끝났다. 자유로운 영혼은 이제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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