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가 꼭 재미있고 즐거운 일만을 기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에 가보면 무엇이 볼 만하고 음식은 어떻고 …'이러한 추천의 이야기들로 독자들에게 '나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할 것이지만 '어디를 어떻게 가면 개고생중의 개고생이니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에 장갑을 끼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체력으로 5시간여의 내변산 등산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힘든지 느껴 보시라.
그러나 나에게 올해 설날 전날의 내변산 등산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추억과 절경중의 절경을 남겨 자랑스러움과 보람으로 오래토록 여운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재백이고개를 향해 산행(山行)이 아닌 등산(登山)이 시작됐다. 1.5㎞를 오른다. 산이 깊어 휴대폰이 안터진다 했더니 '이동전화 가능장소'가 몇백m 앞이라는 안내말뚝이 나온다. 위치가 절묘하다.
재백이고개 정상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바다가 보인다. 서해다. 산 위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총 10.5㎞중 3.7㎞를 왔다. 6.8㎞ 남았다.
관음봉쪽 안내판을 보며 '오늘 제대로 가보자'고 했더니 아들은 지금까지 충분히 힘들었다며 '오늘 제대로 가지말자'고 응답한다.
몇분 지나니 거대한 바위가 나온다. 바위위에서 잠시 또 한번 안쉴 수 없다. 집에서 가져온 귤을 한 개 통째로 입에 무니 시원할 바 비할데가 없다.
텔레비젼 예능드라마에서 방송 분량을 걱정하듯 '취재 등산'이다 보니 원고지 분량이 걱정된다. 그러나 불필요한 기우였다. 고생담이 시작된다.
재백이고개에서 관음봉~세봉은 극기훈련·지옥훈련이 따로 없었다. 개고생 그 자체다. 섬뜩하고 아찔하다. 눈이 남아있어 미끄럽다. 내리막은 급한 곳이 많아 앉아서 조심조심 내려올 수 밖에 없다. 장갑이 없어 손은 얼어붙었다. 아들의 손을 내 뺨에 부벼주며 "추위와 고통을 이겨야 한다"고 다독였다.
아들은 힘들고 위험하다면서 "오기 싫다고 했는데 왜 데려 왔어요오오. 누나랑 와요오오. 다시는 산에 안올거에요오오"라고 울먹이면서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관음봉 삼거리에서 내소사쪽으로 내려가려는 정유나양(서울 백산초 6학년)을 만났다. 아빠를 따라왔다며 소감을 묻자 "등산이 처음인데 너무 힘들어요. 십년감수를 몇 번 했는지 모르겠어요. 기분이 안좋아요"라면서 "등산 보다는 공부가 쉽다는 걸 알았어요. 공부를 열심히 할 거에요"라고 숨을 헉헉거렸다.
세봉에서는 '생사의 갈림길'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큰 바위를 내려오면서 한 걸음을 떼는데 수십초가 걸렸다. 미끄럽고 발 놓을 곳도 없고 옆은 절벽이고…. 돌아갈 수도 없고. 때마침 눈보라까지 불어 분위기 '최상'이었다.
부자(父子)는 소리쳤다. "살아서 집에 가자"
조금 더 내려가 작은 봉우리 바위 위에 올랐다. 자연중의 자연, 절경중의 절경이다. 시야가 확 트였으나 보이는 곳 끝까지 인공은 하나도 없다. 오직 자연만 있다.
콘크리트·아스팔트·전깃줄·철탑·건축물 … . 사람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수십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사방팔방으로 저마다 빼어난 자태로 서있다. 날이 맑아져 보이는 것은 하늘과 땅. 태양과 구름, 산과 나무, 흙과 모래, 돌과 바위 뿐이다.
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내변산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이러한 '웅장미''자연미'를 보기 위해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숨이 차올랐나 보다. 호흡이 가빴나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감탄했을텐데 이제야 왔으니…, 이제라도 와봤으니 다행이고.
가마소삼거리쪽으로 또다시 오르막이었으니 발길은 천근만근억근 무겁기만 하다. 아들이 베낭을 들어주면서 "아빠, 힘 내. 다왔어"라고 의젓한 모습을 보인다.
가마소 삼거리에서 내변산탐방지원센터(출발점) 쪽으로 가려면 냇가를 건너야 하는데 물이 많다.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여. '후딱' 대책을 세워주라.
내변산 등산기는 4개의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코스다. 날씨가 좋은 날엔 그리 힘들지 않으리라. 눈이 없으면 미끄럽지도 않고 그저 경사가 급한, 연인끼리라면 손을 잡기에 좋은, 재미있는 길이리라.
수차례 난관을 만나 3차례 넘어져 울기도 했지만 훌훌 털고 일어난 아들이 자랑스럽다. 녀석도 스스로 자랑스럽단다. 5시간여의 등산으로 부자간의 정이 더욱 도타워진다. 나도 아들에게 물었다. "공부가 쉽니. 등산이 쉽니" 아들은 즉각 "공부가 쉬워요"대답한다. 내가 학교성적에 목매는 아빠가 아닌데도 인생공부를 잘 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직소폭포~재백이고개~관음봉~세봉~가마소 코스는 탐방센터를 출발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왕복코스가 아닌 순환코스다. 그래서 질리지 않는데다 천연미가 어마어마하다.
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필행(必行)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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