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떠났다.
집을 나서자니 귀찮고, 저 멀리 여행을 떠나자니 버거웠다.
그렇다고 집안에 틀어 박혀 있기에는 억울한 늦가을 그리고 초겨울의 운치와 뜻 모를 기운.
서천 신성리 갈대밭은 이를 단방에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막 꽃이 지던 때라 화려함은 없었지만 갈대의 진면목을 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염없이 흔들어대는 갈대와 강, 철새, 노을이 잘 어우러진 곳.
특히 갈대, 새, 바람이 얽혀져 만들어낸 소리는 어느 훌륭한 오케스트라에 뒤지지 않았다.
우리는 갈대밭을 그냥 들었다.
▲ 신성리는 소리 여행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동서천 IC를 빠져나간 뒤 한산 방향으로 10분 쯤 달렸을까? 어디에선가 '사라락 사라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번도 갈대밭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지만 익을 대로 익은 갈대가 서로 부딪쳐내는 이 스산한 소리에 아직 어린 두 딸도 갈대밭 인근에 도착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약간의 고단함도 잊은 채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아이들처럼 둑방길로 내달렸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폭 200m, 길이 1km에 무려 33만㎡ 규모로 여의도공원의 두 배에 달하는 거대한 갈대밭이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든 장엄한 울림을 또다시 소리내고 있었다.
소리는 계속됐다. 최근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산책 데크를 따라 갈대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또 다른 울림이 뭉쳐왔다. '쉬이익 쉬이익' 하면서 갈대 사이를 해 짚고 나는 바람소리, '짹짹' 거리며 새들이 허공을 가르며 내는 소리는 신성리 갈대밭의 효과음으로 충분했다.
실제 금강하류에 바짝 자리 잡은 신성리는 갈대밭만큼이나 바람이 센 것으로 유명하다. 또 갈대가 철새의 먹이와 서식지를 제공, 전국적인 철새 도래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금강하구에는 겨울이면 고니와 청둥오리 검은머리물떼새 등 희귀조류 30여 만 마리가 날아와 겨울을 난다.
▲ 신성리는 풍경 여행이다.
아름다운 소리여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 가족은 점심식사를 마친 뒤, 뒤늦게 출발했다는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겨울해가 짧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겨우 오후 4시를 넘어가는 순간 주변 사물이 아른아른 보이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
그러나 우리는 금세 지각여행(?)에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는 해가 물들여놓은 붉은 색 금강에 그대로 비친 갈대밭 풍경에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혼에 비친 갈대밭 풍경은 그 어느 풍경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수채화 같았다.
갈대밭에 정신을 빼앗겨 그냥 발길을 옮기던 중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갈대 키가 너무나 커 조금만 비켜서도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신성리 갈대는 아름답기도 아름답지만 크기가 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곳 갈대는 키가 1∼2m에서 크게는 2∼3m를 훌쩍 넘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이 갈대숲에 들어서면 찾기가 힘들다.
신성리의 유혹은 계속됐다. 이미 꽃이 진 뒤라 검불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약 1km의 갈대숲을 성곽처럼 둘러싼 강둑, 비포장 길 뽀얀 흙먼지, 그 사이로 아른거리는 웅포대교와 금강하구둑, 철새 등등. 이들이 하염없이 갈대숲을 바라보고 있는 신성리는 살아있는 자연 백화점이자 풍경 백화점이다. 정부는 얼마전 신성리를 금강8경 사업 대상에 선정했다고 한다.
▲ 신성리는 영화 여행이다
소리와 풍경에 취해 정신없이 두어 시간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강둑 끝이 도달하게 됐다. 갈대밭이 모두 진흙과 개흙이어서 유일한 짐(?)인 아이들이 있는 것조차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인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여행의 종착역에 도착한 것.
그러나 그 아쉬움도 잠깐, 우리 가족은 무엇인가가 또다시 눈에 들어왔다.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장소였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 영화는 물론 다른 영화나 드라마를 찍었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과 홍보물 등도 간혹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아름다운 갈대밭의 풍경이 아름다운 영화를 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수려한 풍광 덕에 수많은 영화의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대 체험부스와 전망대, 갈 숲 속 기행, 갈대소리길 등으로 나눠져 있는 갈대숲을 들어가다보면 영화 촬영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쌍화점이 촬영됐다. 드라마 '자이언트'를 비롯해 '추노' '이산'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도 이 곳에서 핵심신을 찍었다. 그리고 현재도 각종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다수의 촬영팀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성리 갈대밭은 시시각각 느낌과 풍경이 달라진다. 이른 아침 햇빛에 여울지는 금강의 물결엔 가슴이 벅차오르고, 황혼 무렵 역광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는 갈대밭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다. 신성리는 영화 같은 여행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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