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할 땐 악조건은 다 갖췄었죠. 우리집은 물론 처갓집에서도 말렸고, 돈을 벌지 못하던 3년 동안은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생활했어요."
2004년 경매로 익산낭산농공단지의 커다란 공장을 인수한 위캔글로벌 김준환 대표(50·사진)는 3년 동안 처갓집을 한 번도 못 갔다.
기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농기계 제조회사를 설립한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죽기살기로 극구 말렸다.
사실 김 대표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지휘자였다.
"음악해서는 먹고살기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한 게 농기계사업이었는데 집에선 음악할 때보다 훨씬 더 말렸었죠."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정도가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고 이젠 반드시 수출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처음 3년간은 전기세를 못내 회사 전기가 끊어지는 게 부지기수고, 통장에 압류가 들어오기를 수차례.
그런 김 대표가 내놓은 첫 번째 성공작은 연료 40% 절감 로터베이터였다.
"기름 값이 급상승했고, 농기계도 여파가 상당했어요. 기계의 무게를 줄이고, 국내 여건에 맞도록 설계해 시장에 내놓았는데 여기에서 기술력과 제품력을 인정받았어요."
설마하던 농민들이 위캔글로벌의 로터베이터를 사용해 보고,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몰리기 시작했다.
좁은 국내 시장에 제품을 내놓으면서 김 대표는 곧바로 수출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미국의 브림사를 시작으로 영국과 그리스, 시리아 등에서도 위캔글로벌의 로터베이터의 제품력을 인정하면서 주문을 시작했다.
"한국 제품에 대한 인지가 부족한 해외시장에선 굉장히 배타적이고,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수출에 어려움을 겪었었죠. 무조건 만나고 설명하고, 이용하도록 해보는 방법뿐이었어요."
이젠 30여개국의 수출국을 100곳 이상으로 넓히고, 제품의 다양화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특히 대형 로터베이터는 국내 독보적 생산 업체로 자리매김하면서 목표도 매출 1조원이라는 큰 꿈을 꾸고 있다.
김 대표는 "8년만에 급성장했다고 하지만, 겪어야 할 시련과 고통을 함축했던 것 같다"며 "위캔글로벌이 오늘에 최선을 다하면서 세계시장에서 당당히 인정받는 회사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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