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蘭)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전문, 1936
처녀 시집 『촛불』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이 시에서의 화자는 이미 인간이 아닌 짐승 그 자체가 되어 있다. '하늘'과 '바다'를 원경으로 작은 짐승들처럼 언덕에 앉아 있는 풍경은 평화와 순수 그리고 원시적 자연의 모습 그대로이다. 타고르의 시에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그것은 천진난만의 세계요, 거칠고 각박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아니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낙원에 대한 회복과 동경이기도 하다. 3연 후반부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의 황홀한 풍경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원시적 생명감에 대한 원초적 갈망이 아닌가 한다.
비 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少年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셔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海風 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왔었다.
-「어머니 記憶ㅡ 어느 少年의ㅡ」 에서, 1967
어머니의 부재에서 오는, 어린 시절 화자의 외로움과 청맥죽을 마시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청개구리처럼 외롭고 애틋하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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