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은
하나씩 털갈이를 시작한다.
통통하게 살찐 몸에서
고소한 살결 냄새가 난다.
햇볕이 배어들어
빨갛게 익은 고추잠자리가
몸통을 드러내놓고 떠다니는 하늘은
가야금 퉁기는 소리가 난다.
산정을 내려오는 스산한 바람은
솔밭을 더듬어
억새밭을 기웃거리다가
더러는 나뭇가지에 걸려
알알이 고염처럼 익어간다.
- '나무들은'에서, 1999
시인은 이미 하나의 나무가 되어 때때로 '털갈이'도 하고 간간이 '햇볕이 배어들어' 텅 비운 가슴에서 '가야금 퉁기는 소리가 나는'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어 산을 내려오곤 한다.
방금 품다 날아 간
등걸 옆자리
꿩알이 있다.
한 알 만져보니
어미의 사랑과 정성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체온
정월 대보름 아침
맨 먼저 취나물을 먹으면
꿩알을 줏을 수 있다시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단란한 가족들이 보인다.
어렸을 때 같으면
억수로 재수가 좋은 날이겠지만
생명체 하나가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물 마르자마자
어미 뒤를 따라 나설
앙징스러운 그 모습 보인다.
- '꿩알'에서, 2009
산에서 자라고 산에서 배워 어느새 산인(山人)이 다 된 자애롭고 어진, 그리하여 풋풋한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도가풍(道家風)의 선미(禪味)가 깃들어 있다. 그의 시의 소재와 특징은 이처럼 대부분 동양적 자연관과 정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아가는 누운 채
제 발을 가지고 논다.
새살도 하고
칭얼거리기도 하며
장난감인 양
여리디 여린 저 발을.
시간이 얼마가 흐른 뒤엔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고
강가도 가며
부르터 공이가 생길 발.
누군가를 찾아 어디선가
부지런히 만나야 되고
그러다 보면 헤어져
쓸쓸히 돌아서야만 하는
허전한 발걸음.
아는지 모르는지
아가는 제 발을 가지고
열심히 놀고 있다.
- '아가의 발' 전문, 2011
부분과 현상을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이를 통째로 꿰뚫어 사물의 본질을 한 눈에 포착하는 선적(禪的) 깨달음, 그것은 곧 새싹처럼 피어나 천진난만하게 노니는 아가의 옹알거림 속에서 앞으로 펼쳐질 생(生)의 고단함을 동시에 읽어내는 시인의 남다른 통찰력과 따뜻한 인간애가 아닌가 한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끝자락에서도/ 햇살을 끌어 모으고/ 지열을 뽑아 올려/ 촘촘히 밝힌 꽃불' ('깜밥나물꽃')처럼 장태윤 시인은 오늘도 하나의 산이 되어 햇살을 끌어 모으고 지열을 뽑아 한 촉의 난꽃을 피운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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