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이 ‘사랑의 말 한 마디’가 그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 인도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고, 영국의 총칼에 눌려 실의에 빠진 인도인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습니다. 모든 인도인들이 일어나 독립을 외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 위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그 속에 진실한 사랑이 담겨있으면 두고 두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혀가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큰 낭패입니까?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새벽 바닷가에서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참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고, 베드로의 아픈 상처를 깨끗이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책망부터 하실 수 있었습니다. “너,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하며 통쾌하게 한 방 날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정이 넘치는 말로 격려하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까지 충성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 저주의 말은 ‘독약’이 되지만,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은 ‘명약’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독이 든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의 말을 하고, 격려의 말을 합니다. 그것이 거두는 열매를 알기 때문입니다.
소련의 장수학자 ‘구리아닌’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단명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자들이 일찍 죽는다.” 그렇습니다. 사랑과 위로의 말은 희망과 용기를 낳지만, 부정적이고 악한 말은 불화와 파멸을 생산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슬픔과 시련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용기를 주시고, 말씀으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분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들에게 사랑을 노래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사랑의 말, 격려의 말로 서로를 세워주고, 절망의 세계를 소망의 세계로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의 말 한 마디’가 수많은 영혼들을 넉넉히 위로하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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