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매해 연말마다 각종 매스컴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언급되는 까닭은 노벨상 수상자의 비율이 20%를 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경제학 등 머리가 우수해야 받는 상으로 한정하면 25%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정신력이나 교육철학이 조명되고 존경을 받지만, 주변국에 대한 지나친 배타주의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인한 응징은 손가락질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 가 보면 800km에 이르는 분리 장벽은 성지에 대한 설렘을 넘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들의 단결력과 정신력은 존경하지만 그들이 지구상에서 여전히 건재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숨 막힐 듯한 전쟁의 위협과 계속되는 자살 테러 등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얼마 전 1948년 독립국가 건국부터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국가이자 민주국가’라는 조항을 ‘이스라엘은 유대인 민족국가’로 개정하는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의회에 표결 처리를 요청했습니다. 여론 악화로 잠시 보류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불거질 것입니다. ‘민주국가’라는 정의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유대 민족 국가법’이 의회를 통과하면 20%를 차지하는 아랍계 팔레스타인 국민은 졸지에 2등 국민 내지는 이방 나그네로 전락하고, 민주주의 원칙은 훼손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주변 국가는 물론 서방 언론이나 심지어 미국에 사는 유대인에게조차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데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고 배타주의를 고집할까요?
실제로 그들은 많은 민족 중에서 그들이 선민인 것만 내세웠지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혈통만 내세울 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축복하신 뜻을 오해하고 자기들만 축복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 민족주의로 전락하고 배타주의가 오히려 애국심으로 인정받는 망할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도 그 죗값을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돌리라고 큰소리쳤으니 그 대가가 혹독했음을 유대인의 역사가 증명하고, 지금도 세계 최고의 위험 국가와 민족인 것은 축복을 축복으로 선용 못한 논리적 필연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라 하셨거늘 그들은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 것을 마다하고 자기들끼리만 복을 누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선민, 성경을 알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선민의 비극은 마침내 예수님을 거절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성탄절이 다가오는 계절에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지도자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는 맛을 내며 살고 있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살맛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번 성탄절에는 서로에게 살맛을 나게 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해 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 살맛이 생겼다고,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의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였다고 평가받는다면 당신의 수고는 하늘에서 해같이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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