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열녀(烈女) 전주 이(李)씨에 대한 조정의 포장이 뒤늦게 후손에 의해 알려져 향토사학적 가치에 관심을 끌고 있다.
14일 남원 양씨 문중에 따르면, 1869년 임실군 관촌면과 완주군 상관면 일대에 거주하는 최주하 등 33인이 관찰사에 청원을 냈다.
이들은 임실군 하회촌( 현 관촌면 회봉리)에 거주하는 전주 이씨가 효(孝)와 열(烈)을 지켰다며 포상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기록에 따르면, 부인 이씨(당시 69세)는 남원 양공재도의 아내로써 32세에 딸 셋을 두었고, 임신 상태에서 36세에 부군과 사별했다.
하지만, 유복자가 아들(하권)로 이어져 대를 이었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엄격한 자식 양육으로 가정을 돌봤다.
또 부군의 사후에는 고기와 양념된 음식을 먹지 않고 3년상을 치렀으며, 삯바느질과 방앗품 등으로 생계도 이끌었다.
아울러 이씨는 가문의 문적과 위토, 선산 등을 타인이 가로챈 것을 알고 남원부에 소송을 제기해 문중의 명예를 지켰다.
청원한 사람들은 ‘부인의 몸으로 효도와 열 등 2가지 절행을 행하기란 극히 어려운 것인데, 그것을 행(行)한 사람이다’라고 전했다.
이후 1870년 임실의 유생(儒生)인 오흥수 등 11인도 전라관찰사에 상소, 조정에 효열 포장을 상신한 결과 효열비가 내려졌다.
이씨는 1800년생으로 전주 이씨 회안대군 12세 손인 장의의 딸이며 하권의 아버지 휘재도는 남원의 병부공 후예다.
홍문관 대제학이며 한림학사 준(俊)의 20 세손으로서 5대에 걸친 진사 등 남원 석유(碩儒)의 명망 있는 집안이라고 전했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 말기 어지러운 정치현실로 인해 묻혀졌다가 종중에서 가재를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선문화제전위 양영두 위원장은 이씨의 5세 손으로서, 이날 관촌면 회봉리 자택에서 지인들과 효열비 현판식을 가졌다.
비문은 계남 송기상 선생이 제공했고 무형문화재 김종연 선생이 서각했으며 현판 봉헌은 양영두 위원장이 봉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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