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 비단은 500년을 가고 한지는 1000년을 간다.
이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한지(韓紙)는 한문화 발달의 바탕이 됐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문화를 갖게 된 것도 천년을 견디는 한지 덕분이었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은 한지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서기 751년 불국사 중창 때 봉안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지에 담은 글들이 탑 속 사리함에서 약 1300년을 견뎌낸 것이다. 한지를 천년지(千年紙)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북은 조선시대 전국 한지의 40%가량을 생산했던 한지의 본고장이었다. 특히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전주한지는 고려시대 중기 이래 조선시대 후기까지 왕실의 진상품으로 올려졌고, 조선시대 때는 외교 문서로도 사용됐다.
예로부터 전주한지가 유명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주 근교에서는 닥나무가 많이 생산돼, 이를 원재료로 한 한지 제조업이 성황을 이뤘다. 고려시대부터 지방관아에서는 닥나무 재배를 제도화했을 정도다. 또 철분 함유량이 적은 깨끗한 물도 한지의 품질에 한몫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한지의 명맥을 이어온 장인들이 있었기에 전주한지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렇듯 한지산업이 발달했던 전주에서는 한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출판, 서예, 공예 문화가 발달했다. 이에 본보는 전주의 찬란한 문화를 이루는 '원류'로서 한지의 역사성과 상징성, 확장성 등을 기획 '전주한지로드'로 풀어낼 예정이다. '전주한지로드'는 한지에서 출발하는 '확장성의 길'이자 한지가 뻗어나갈 '가능성의 길'을 의미한다.
한지의 기원과 발전
인류의 문화 발달은 종이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종이라는 말은 본래 '저피'에서 나온 말로 저피가 조비-조해-종이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인 한지는 예로부터 주변 국가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닥나무와 닥풀(황촉규 뿌리)을 주원료로 만들어 순우리말로 '닥종이'라고도 불렸다.
우리가 쓰고 있는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시대 채륜이 나무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최초로 종이를 만들었다는 설이 대두되다가, 그 이전의 서사 재료들이 발견되면서 채륜이 종이를 개량했다는 설이 유력해졌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도 종이와 비슷한 재료가 발견됐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채륜에 의한 개량 시기에 앞서 종이가 제조됐으리라 추측된다.
610년은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먹 등을 전해주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삼국시대는 한지의 태동기로, 우리나라는 이 시기 이후 독창적인 한지를 생산했다. 우리나라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라 불렀다. 송나라 손목은 <계림유사>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조지서'를 설치해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 등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왔다. 이 시기는 지질의 종류가 제일 많고 다양했다. 서책 간행량도 가장 많았다.
이러한 한지는 닥나무와 닥풀을 주재료로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등 수십 번(아흔아홉 번)의 손길을 거친 뒤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해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했다.
한지는 예로부터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색깔이나 크기, 생산지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른다. 대표적인 구분은 재료, 용도, 색채, 산지, 크기와 두께 등에 따라 나눠진다. 이에 따른 종이의 종류는 대략 200여 종에 이른다. 이처럼 다양하게 생산된 종이는 주로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한 용도로 가장 많이 소비됐다. 일반 민중들은 다양한 용도의 생활용품과 장식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예술작품으로도 활용했다.
전주한지의 역사
예로부터 전주 근교인 완주군 구이·상관·소양면, 임실군 덕치면, 남원시 산내리 등에서는 한지의 주재료인 닥나무가 많이 생산됐다. 이로 인해 닥나무 생산이 많은 전주에서 한지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닥나무 수요 감소로 2018년 이전까지 40곳 이상이었던 농가 수는 2018년 11곳으로 급감하고, 생산량 또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부족량은 태국과 중국, 베트남, 라오스 등 전체의 80%가량을 수입닥으로 대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주한지산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닥나무 수급 안정화가 절실하다.
전주가 한지의 주생산지였다는 것은 조선시대 말(19세기) '완산십곡병풍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완산십곡병풍도를 보면 왼편에 '지소'가 있다. 지소는 현재 위치로 전라감영 복원 서편 담장 밖 정도로 추정된다. 지소는 고려·조선시대에 지장이 모여 살며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종이를 만들던 구역을 일컫는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우리는 전주가 한지 원료, 제조산업 뿐만 아니라 한지 유통산업의 중심지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주는 1800년대부터 풍남동을 중심으로 한지를 제조했다. 그러나 도시화로 수질이 나빠지면서 1940년대 서서학동 흑석골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한지골'이라 불리는 흑석골에서 한지를 제조했다. 이후 하천수 오염과 부족 문제, 닥나무 수요 감소에 따른 생산량 감소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93년 전주한지 활성화를 위해 집단화를 추진했고 도내 31개 업체 가운데 22개 업체가 전주공단 협동화단지에 입주(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결성)하게 됐다. 그러나 전국적인 한지산업 축소로 지난해 기준 전주지역 한지 제조업체는 수록한지 업체 6개, 기계한지 업체 2개 등 모두 8개로 조사됐다.
전주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주시 한지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에 따라 전주한지장을 지정해 지원하고 있다. 전주한지장은 전주한지 제조·생산 등에서 숙련된 기술과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한지산업에 20년 이상 장기간 종사한 인물을 말한다. 전주한지장은 최성일(성일한지), 김인수(용인한지), 김천종(천일한지), 강갑석(전주전통한지) 등 4명이다.
이밖에 전주시는 한지산업지원센터와의 협력으로 26회째 전주한지문화축제를 개최하고 한지 교과서 제작, 닥나무 수매 등 한지 수요 확대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올해 4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집적화된 한지 생산지였던 흑석골 일대에 지어진 '전주천년한지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전주천년한지관은 국비 등 총 83억 원을 투입해 한지 제조공간과 체험공간, 기획전시공간 등을 구축할 계획이다.
최근 전주한지는 산업화·세계화 길도 열어가고 있다. 특히 전주한지는 미술품이나 서적 등의 보수·복원 재료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 8월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보존중앙연구소(ICRCPAL)는 전주한지가 부드러우면서 잘 찢어지지 않는 강한 내구성을 갖고 있어 문화재 보수·복원용으로 적합하다고 판정한 바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성 프란체스코의 친필 기도문, 6세기 비잔틴시대 복음서, 화가 피에트로 다 카르토나의 17세기 작품 등이 한지로 복원됐다.
전주시는 타 자치단체와 협력해 전주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해 4월 29일 '전통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추진단'을 발족한 이래 안동, 문경, 전주, 서울 종로에서 릴레이 학술포럼을 열고 전통한지의 가치를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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