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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지로드]⑩에필로그: 전통·산업 두 마리 토끼⋯한지의 고장 명성을 지켜라

한지는 전주 출판, 서예, 공예 문화의 원류이다. '전주한지로드'는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앞선 보도에서는 한지의 역사성과 우수성, 확장성 등을 차례대로 짚었다. 이 과정을 통해 한지산업이 직면한 과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전문가의 조언을 얻어 한지가 나아갈 미래 방향을 살펴봤다. 조선시대 전국 한지의 40%가량을 생산했던 한지의 본고장 전주. 그 명성은 여전히 유효할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산업적 측면에서는 그렇다. 다만 전통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지의 고장 명성 '흔들'⋯전통한지 보존·계승 힘써야 전주한지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산업화 측면에서 발전을 이뤘다. 이 산업화는 한지의 품질 균일화, 대량 생산을 말한다. 생활 양식이 바뀌었고 전주는 품질, 용도에 따른 다양한 한지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면에서 전주한지는 타 지역에 비해 앞서 있다. 여전히 한지제조업체 수도 전국에서 가장 많다. 그러나 산업화에 치중하다 보니 전통한지 계승 측면에서는 타 지역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인터뷰에서 문경전통한지 김춘호 전수조교가 "지금은 대부분 한지를 판매하는 데만 열을 올리지, 좋은 한지를 만드는 데는 열을 올리진 않는다"며 전주에서부터 천연재료,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전통한지를 늘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임현아 한지산업지원센터 연구개발실장은 "전통한지 계승 차원에서는 약간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한지 제조기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최근 문화재 보존용지로 전주한지를 사용하면서 전통한지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임 실장은 "전주한지의 명성에 맞지 않게 장인(국가·도 무형문화재)이 부재하고, 산업화 용도에 맞춰 수입산 원료(닥나무)를 사용하면서 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있다"며 "문화재 보존용지는 장인과 함께 국내산 원료, 전통 제조방식에 가치가 부여되지만 다른 용도의 한지는 이와 같은 조건이 필수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이 전주한지의 오점으로 남는다면 이에 대한 개선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통 측면에서는 장인들이 전통한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국내산 원료 확보, 판로 확보, 제조 기술 보존 등 국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 산업 측면에서는 새로운 제품 개발 등 민 차원의 대응이 요구된다. 특히 장인들은 판로 확보와 관련해 국가 차원의 전통한지 수요처 발굴, 수매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산 원료 확보와 관련해서도 현재 전주시가 선도적으로 닥나무를 계약재배하고 있지만, 이는 아주 적은 규모다. 이와 관련 국민대 김형진 교수는 한지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닥나무 생산 향도마을 지정, 닥나무 수집 조합 설립(농협 하부조직 검토), 닥나무 은행제도 도입 등 장기적인 정책 시행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전통·산업 두 마리 토끼 잡아야⋯전통한지 정의·법률 필요 임 실장의 말처럼 지금 전주한지는 전통과 산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과 산업을 정확히 구분해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전통한지에 대한 정의, 전통한지에 대한 법률이 부재하다. 전통한지와 기계한지의 구분을 위해서라도 전통한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전주시 '한지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에서는 전통한지란 국내산 닥나무를 주원료로 이용하고 반드시 목재, 기타 펄프는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전통 제조 방식에 따르되 고해와 건조 공정만 동력을 이용해 제조한 한지를 뜻한다고 정의한다. 사람마다 기관마다 내리는 정의는 다르지만, 국내산 닥나무를 사용해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전통한지를 규정하는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이다. 현재는 유명무실해진 '한지품질표시제' 역시 미비점을 보완해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한지품질표시제는 한지 생산자, 제조 방식, 재료 원산지 등 한지품질을 좌우하는 제반 사항을 표기해 한지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한지 보급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추진됐다. 구매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전통한지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박후근·배관표 씨가 발표한 논문 '전통한지 정책의 현황과 문제 분석: 입법방안 도출을 위해'에 따르면 한지품질표시제 등록업체 수가 2017년과 2018년에는 각 41개, 2019년에는 12개였지만 2020년과 2021년에는 정보 자체가 없었다. △전통한지·기계한지 영역 구분⋯한지, 새로운 용도 개발 중요 한지는 용도에 따라 전통한지와 기계한지의 영역 또한 구분된다. 그리고 이 영역에 따라 품질, 가격 차별화가 이뤄져야 한다. 전문가들이 "모두가 전통한지를 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다. 다만 모든 한지가 전통한지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현진 한지연구소장은 "전통은 전통대로 흘러가고 현대는 현대대로 흘러가야 한다"며 "전통한지는 대중성, 소비성이 있는 소재가 아니다. 전통한지만으로 한지의 저변을 확대하기엔 제약적 요소가 많다. 보다 넓은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 소장은 "이제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용도 개발을 통해 실용성과 편리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통한지와 기계한지에 맞는 분야 즉 각각의 분야에서 한지가 아니면 안 되는 분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분야, 이 분야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했다. △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속도내야 현재 한지와 관련된 가장 큰 현안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다. 한지 관계자들은 "장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등재되지 않으면 기술이 없어질 수 있다"며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지살리기재단 이사를 맡고 있는 국민대 김형진 교수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기록유산이 후세까지 길이 보전돼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록유산의 주체인 한지 초지술이 계승돼야 한다"며 "또 한지가 지니는 무형의 가치, 문화가 후대에 전승돼 한민족의 정신과 정기를 유구히 남기기 위해서도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김 교수는 "한지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할 뿐만 아니라 한지의 소비 진작을 통한 근원적인 육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11.16 18:50

[전주한지로드]⑨세계 속 한지 이야기: 동양 종이, 서양 예술품 복원에⋯"한지 주목하는 나라 늘어날 것"

한국의 전통종이인 한지를 주목한 곳은 이탈리아 바티칸박물관 이외에도 또 있었으니,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다. 그곳에서는 부서지고 빛바랜 고미술품, 고가구, 고서적 등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보관하는 데 한지를 쓰고 있다. 동양의 종이가 서양의 예술품 복원에 활용된 것으로, 복원용 종이로서 한지의 유럽 내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지는 2016년부터 루브르박물관에 수출되기 시작해 2017년 신성로마제국 시대 막시밀리안 2세가 쓰던 책상의 부서진 손잡이를 복원하는 데 사용됐다. 특히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책상을 복원하는 데 전주한지가 활용된 것이 알려지며 더 화제가 됐다. 이 밖에 한지는 로스차일드 컬렉션 판화 일부를 복원하는 데도 긴요하게 쓰였다. 프랑스 풍속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작품 14점과 샤를 르모니에의 작품 4점 등 총 18점도 한지를 이용해 복원했다. 종이는 문화재 복원 작업의 필수 재료로 그림, 가구, 조각 등에 있는 구멍이나 흠집을 메우고 보존하는 데 폭넓게 활용된다.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등 전 세계 복원용 종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종이는 일본의 화지이다. 몇 년 사이 한국의 한지도 복원용 종이로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추세다. 현재 전 세계에서 복원용으로 사용되는 종이의 시장 규모는 약 4조∼4조 6000억 원대로 추산된다. 한지가 차지하는 시장 점유율은 1% 수준으로 알려졌다. 한지의 세계 시장 인지도와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은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그나마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서 한지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우수한 품질 덕분이다.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한지의 강점은 '내구성'과 '안정성'이었다. 루브르박물관은 그림의 여백을 복원하거나 망가진 부분을 복원할 때 얇고 튼튼한 한지를 덧대 작업한다. 한지의 안정성이 높아 원본이 손상될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내구성, 안정성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전통한지의 제작 방식인 '외발뜨기(흘림뜨기)'이다. 전통한지는 닥나무를 쪄서 껍질을 벗기고, 이를 잿물로 삶아 으깬 반죽(닥 섬유)을 황촉규(닥풀) 물에 푼 다음 대나무발을 이용해 종이를 떠낸다. 이때 외발뜨기로 닥 섬유를 가로, 세로로 교차시킨다. 우물 정(井)자 방식으로 한지를 뜨기 때문에 섬유질이 촘촘해 질기고 단단한 내구성을 자랑한다. 반면 쌍발뜨기(가둠뜨기)로 세로로 뜨는 화지는 한쪽 방향으로 잘 찢어지는 단점이 있다. 또 전통한지의 원료인 국내산 닥나무는 섬유의 길이가 길어 다른 나무보다 강도가 높다. 이러한 한지의 내구성과 안정성은 보존이 중요한 예술품 복원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실제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특정 방향으로만 물질을 하는 개량 방식인 가둠뜨기 한지에 비해 여러 방향으로 물질을 하는 전통적인 초지 방식인 흘림뜨기 한지가 방향별 강도 차이가 작은 것으로 나타나 전통한지가 강도와 치수 안정성에서 우수한 종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주원료가 수입산 닥인 한지보다 국내산 닥인 한지가 대체적으로 강도가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 문화부 산하기관인 국립기록유산보존복원중앙연구소(ICRCPAL) 에우제니오 베가(eugenio veca) 부소장도 복원용 종이로써 한지의 우수성을 알아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전통한지가 뛰어난 이유로 일일이 손으로 떠서 만드는 '수초지', 화학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천연재료로 만드는 '중성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복원용 종이는 어떤 화학제품도 섞이지 않아야 한다"며 "연구소에서는 재질보다 산도(PH)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산도가 높으면 종이가 빨리 망가져 원본에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이를 하얗고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화학제품을 사용하면 산도가 높아진다"며 "천연재료를 활용해 수제로 만드는 한지는 화학 반응을 쉽게 일으키지 않는 산도 7.8 정도의 중성지로써 보존·복원용으로 적합하다"고 말했다. 전통한지는 화학제품인 양잿물이 아닌, 콩대·볏집대·고춧대·메밀대·깻대 등으로 자연산 잿물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는 "첫 번째 테스트는 종이를 아주 뜨거운 온도로 부식시켜 종이의 색깔, 구김 정도를 본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면 복원가가 종이를 직접 사용하면서 접착성, 편의성 등을 검사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과학적 시험·평가를 통과하면 인증을 받게 된다. 연구소 내에는 종이박물관이 있는데 종이의 역사와 고문서의 복원 과정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에우제니오 베가 부소장은 "1966년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이 대홍수로 범람해 박물관과 성당 등에 전시·보관된 수천 점의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손상됐다. 그 당시 수해를 입은 문화재 복원에 일본 화지가 쓰였다"며 "이러한 영향으로 이탈리아에서 문화재 보존·복원과 관련된 제도, 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는 한지의 우수성이 알려지며 그 수요도 점차 늘고 있다"며 "한지가 이탈리아, 프랑스를 넘어 스페인, 영국, 독일 등의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에도 공급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지 대중화를 위한 제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공공이 아닌 민간 영역 복원가들은 한지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판로가 확대되려면 공공뿐만 아니라 민간 영역까지 범위를 넓혀야 한다"며 "한국이 유럽 보존·복원시장에 관심을 갖고 유통망 구축에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고 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11.09 18:36

[전주한지로드]⑧세계 속 한지 이야기: 이탈리아 문화재 보존·복원 시장서 인정⋯"미래 생각한 복원, 한지 매우 유용"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큰 나라 바티칸. 바티칸은 면적으로는 지구상 국가들 중 가장 작지만, 전 세계 12억 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와 교회, 교구를 통솔하는 바티칸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바티칸박물관은 미술관, 도서관, 기념물 등을 포괄하는 공간으로 르네상스 시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작품을 비롯해 고대 로마·이집트 유물, 역대 교황이 수집한 미술품과 고문서 등 모두 7만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한 세계 최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다. 바티칸박물관은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기도 한다. 바티칸 시국은 1984년 국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유산의 보고다. 바티칸박물관은 이러한 보물의 집합소이다. 그만큼 오래된 유물이나 작품이 많다. 특히 고문서는 훼손되는 경우가 더 흔하고, 이를 보존·복원하기 위해 여러 종이가 사용된다. 이 문화재 보존·복원 시장은 일본 화지가 선점한 상황이다. 한국의 한지가 그 틈새를 뚫고 바티칸박물관 등 유럽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은 우수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지가 이탈리아 문화재 보존·복원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건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2014년 수교 130주년을 맞은 한국과 이탈리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로마에서 문화유산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앞서 같은 해 6월 밀라노에서 열린 한지 워크숍에 참가한 이탈리아의 복원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한지연구동호회 '그룹 130'을 결성하며 유럽에서도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이탈리아 교황 요한 23세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교황 요한 23세 지구본' 복원에 한지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화제가 됐다. 교황 요한 23세 지구본은 바티칸 접견실에 두고 외빈을 접견할 때마다 활용하던 교황의 애장품이다. 둘레 4m가 넘는 거대한 지구본으로 가톨릭사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는다. 2016년에는 신현세 장인이 만든 경남 의령한지 2종이 이탈리아 문화부 산하기관인 국립기록유산보존복원중앙연구소(ICRCPAL)로부터 기록유산 보존·복원 용도로 적합하다는 공식 인증서를 받았다. ICRCPAL은 한지를 활용해 이탈리아의 기록유산인 성 프란체스코의 카르툴라, 로사노 복음서, 사르데냐 가문의 문장집, 243 음악책,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그림 등 5종을 보존·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2018년 ICRCPAL과 바티칸박물관은 한지를 이용해 기록유산 2개, 카타콤베 벽화 복제화 5점, 성 루카 아카데미 그림 1개를 추가로 보존·복원했다고 발표했다. 2019년에는 마이모니데스의 의심 가득한 자들을 위한 지침서, 시리아 가톨릭 성서, 카말돌리 수도사 도서관의 플라비오 비온도 활자 인쇄본 2권이 한지를 활용해 보존·복원 처리됐다. 2020년에는 전주 성일한지 2종이 ICRCPAL에서 기록유산 보존·복원용 종이로 인증받았다. 또 2017년 11월에는 전주한지로 복본한 고종황제 서한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달되면서 전주한지에 대한 국내외적인 관심 또한 커졌다. 당시 김승수 전주시장과 김혜봉 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의장은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수요 일반 알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전주한지로 복본한 고종황제 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은 1903년 즉위한 비오 10세 교황이 고종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대한 답장으로, 1904년 주불공사 민영찬이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한은 비오 10세 즉위를 축하하고, 건강하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주시는 고종황제 서한과 함께 당시 뮈텔 조선교구 교구장이 보낸 서한 등 50여 장도 전주한지로 똑같이 재현해 기증했다. 서한에는 러일전쟁과 한국 천주교 규모 등 당시 조선 상황 등이 담겨있다. 복본은 교황청 비밀문서고에 원본과 함께 소장돼 있다. 바티칸박물관에서는 현재도 한지를 활용해 문화재를 복원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티칸박물관의 키아라 포르니치아리 종이복원팀장이다. 키아라 포르니치아리 종이복원팀장은 2014년 밀라노 한지 워크숍에 참여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도 한지를 사용해 로마 카타콤베 그림들을 복원하고 있다. 그는 "카타콤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화려하지 않은 작품처럼 보일 수 있지만 기록으로 남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며 "그림이 139개나 있다. 현재 약 20∼30개를 복원했고 나머지 100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아주 긴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복원은 대개 원본 종이와 캔버스 사이에 한지를 넣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의 원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라며 "내가 복원한 결과물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제거 가능한' 소재를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더 좋은 기술이 나왔을 때 재복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옛날 복원 방식은 종이를 붙인 다음 색깔을 다시 덧칠해 입히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때가 묻어서 색깔이 변한다. 그래서 먼 미래를 생각하고 복원하는 게 중요하다"며 "한지의 경우 아주 얇지만 매우 튼튼하기 때문에 복원에 매우 유용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도 500여 년간 여러 차례 덧칠됐다. 1982년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대대적인 복원 작업 끝에 그림을 덮고 있던 먼지와 때, 덧칠 등이 제거되면서 본래의 화려한 색채와 형태가 되살아났다. 키아라 포르니치아리 종이복원팀장은 "이탈리아에는 수많은 고문서, 고서화가 있다. 한지를 활용한 문화재 복원 수요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지는 산화도(ph) 정도에 따라 최대 8000년까지 지속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만큼 내구성과 보존성이 뛰어나다. 그는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한지장들은 소중한 존재"라며 "이탈리아에는 더 이상 그런(전통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이 없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도 전통종이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의 위대한 전통이 잘 보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11.02 18:20

[전주한지로드]⑦국내 한지 이야기: 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전국 시군 힘합쳐

우리나라의 전통 종이인 한지(韓紙)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해 4월 29일 '전통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추진단(현 한지살리기재단)'이 발족하면서부터다. 발대식 이후 한지살리기재단은 안동(2021년 6월 25일), 문경(2021년 9월 30일), 전주(2021년 11월 25일), 서울 종로(2022년 3월 24일)에서 릴레이 학술포럼을 열고 전통한지의 가치를 조명하며 세계유산 등재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다음 달 25일에는 완주에서 제5회 학술포럼을 개최할 계획이다. 지난 10일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한지의 날' 제정 선포식을 열었다. 한지의 날은 매년 10월 10일이다. 한지는 아흔아홉 번의 손길을 거친 뒤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고 해서 백지라고 부른다. 한지의 날을 10월 10일로 정한 것도 '10×10=100'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날 행사에선 한지도시협의회의 공동체 선포문 낭독도 이어졌다. 선포문에는 '세계 제일 우리 종이, 한지의 세계화를 위해 한지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린다', '한지의 세계화를 위해 한지 산업 진흥과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앞장선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지살리기재단 이배용 이사장은 "전통한지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자산이며 세계적 문화유산이지만, 아쉽게도 이 사실을 많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한다"며 "이제 우리 모두 한지의 우수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전파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배용 이사장의 말처럼, 사실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는 늦은 감이 있다. 중국의 전통 종이인 선지(宣紙)는 2009년, 일본의 전통 종이인 화지(和紙)는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한지의 우수성, 전통성 등을 생각했을 때 아쉬운 대목이다. 한지살리기재단은 내년 3월께 문화재청에 한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서류를 제출할 계획이다. 등재 목표는 2024년 또는 2026년이다.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 가곡, 대목장, 매사냥, 줄타기, 택견, 한산모시짜기, 아리랑, 김장문화, 농악, 줄다리기, 제주해녀문화, 씨름, 연등회 등 21개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탈춤을 신청한 상태로, 한지가 그 뒤를 이을 전망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의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활용하기 위해 선정하는 세계기록유산은 1997년부터 2년마다 선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은 훈민정음(1997년), 조선왕조실록(1997년), 직지심체요절(2001년), 승정원일기(2001년), 조선왕조 의궤(2007년),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년), 동의보감(2009년), 일성록(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2011년), 난중일기(2013년), 새마을운동 기록물(2013년), 한국의 유교책판(2015년),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2015년),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년), 조선통신사 기록물(2017년, 한일 공동) 등 16건이다.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등 세계기록유산 대부분은 한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질기고 견고한 한지가 있었기에 수많은 기록유산이 보존·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많은 기록유산이 등재된 것은 한지의 질적 우수성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한다. 이 이사장은 "모든 역사의 기록, 예술, 문화는 한지가 있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하며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기록 정신이 새겨진 한지가 현대화, 기계화에 밀려 지키기 어려운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더 이상 시기를 놓치지 말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전국 자치단체도 한지살리기재단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한지 세계유산 등재에 공동 대응해 나가고 있다. 한지살리기재단 한지도시협의회에는 현재 전북 전주·완주·임실, 경북 문경·안동·청송, 경남 의령·함양, 충북 괴산, 경기 가평, 강원 원주 등 11개 시·군이 참여하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은 다섯 가지 등재 기준이 있다. 무형유산협약 제2조에서 규정하는 무형문화유산에 부합해야 하고, 세계 문화 다양성 반영과 인류의 창조성을 입증해야 한다. 신청 유산에 대한 적절한 보호 조치도 마련돼 있어야 한다. 관련 공동체·집단·개인들이 자유롭게 사전 인지 동의하면서 최대한 폭넓게 신청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신청 유산은 당사국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포함돼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한지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원료, 도구, 초지 방법 등에서 중국, 일본과 차별화된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수급하기 위해서는 재배부터 수확, 가공까지 지역민의 집단화된 노동력이 필요하다. 한지 제조에 공동체 문화가 담겨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 임돈희 동국대 석좌교수는 학술포럼에서 "한지가 등재되려면 유네스코가 공동체 중심의 무형문화유산을 중시한다는 점에 착안해 공동체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밝혀내야 한다"며 "한지의 고유성과 특별성을 부각하고, 역사성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주민에 의해 향유되는 무형문화유산임을 강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10.19 18:52

[전주한지로드]⑥국내 한지 이야기: 원료 직접 재배·수작업 제조⋯시간·정성의 결과물

"종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종이가 전통의 종이라 강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 종이를 아는 사람들이 날 찾아주면 그게 행복한기라요." (문경전통한지 삼식지소 中) 지난해 7월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로 김삼식, 신현세, 안치용 씨를 인정했다. 기존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는 홍춘수 씨뿐이었는데, 3명이 늘며 총 4명이 됐다. 김삼식 한지장은 9세부터 한지 만드는 일을 했다. 올해 만으로 79세이니 70년이 다 됐다. 문경전통한지는 10월부터 3월까지만 한지를 생산한다. 한지를 만든다는 것은 닥나무를 재배하는 것, 잿물을 내리는 것도 한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한지의 원재료인 닥나무와 부재료인 황촉규를 직접 재배해 사용한다. 2004년부터 3000평 규모에 닥나무를 심어 직접 재배하고 있다. 닥나무는 1년생만 사용한다. 1년 생산량은 그해 기후에 따라 달라지지만 평균 6000㎏ 정도이고, 이는 한지 1만 3000장∼1만 5000장을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황촉규는 200평 규모로 1년 생산량은 약 500㎏이다. 수입닥, 양잿물, 화학약품 등 손쉽고 값싼 방법이 있지만 장인은 한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닥나무, 황촉규, 고춧대 등을 모두 손수 재배한다. 닥나무 껍질도 직접 긁는다. 전통 방식 그대로다. 고된 몸과 지난한 시간이 그 비용을 다 치러낸다. 문경전통한지가 자리한 경북 문경시 농암면은 밭농사가 많은 시골로 닥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겨울이면 닥나무 주인이 닥을 거두어 주니 한지를 만들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농촌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닥나무 수급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닥나무를 기르고 수확하고 삶고 껍질을 벗겨 백피를 만드는 일련의 작업은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지난달 말 경북 문경전통한지에서 만난 김삼식 한지장의 아들 김춘호 전수교육조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하늘로 곧게 뻗은 닥나무를 가리켰다. 그는 "닥나무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경북 의성군 신평면에 닥나무가 많았다. 15년 전에 갔을 때는 백닥이 약 20톤 가까이 나왔다. 그런데 지난해 가보니 1.5톤 밖에 생산이 안 됐다"며 걱정했다. 문경전통한지가 닥나무를 직접 재배하게 된 것도 이처럼 닥나무 수급이 어려워지면서부터다. 김 전수조교는 "전통한지 값을 제대로 받아야만 닥나무 수급도 원활해 진다"며 "태국과 필리핀 등에서 표백된 닥을 수입하고, 쌍발뜨기로 한지를 만들면서 전통한지라고 팔면 안 된다. 그러면 전통한지는 가격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값을 제대로 못 받으니 원재료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돈을 많이 줄 수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지를 다 전통한지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런데 모든 한지가 전통한지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래야 전통한지를 하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삼식, 김춘호 부자는 '귀한 것은 누군가 찾게 돼 있다'고 믿는다. 노동집약적인 전통한지산업은 결국 고급품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내가 쉽게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전수조교는 "빚을 내며 닥나무를 심은 건 고급 종이를 필요로 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이와 물이 저렴하다고 인식해 왔지만 세월이 변했다. 이젠 그렇지 않다"며 "전통한지를 하면 팔 데가 없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영업을 안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2008년 겨울 루브르박물관이 문경전통한지를 방문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루브르박물관은 현재까지 문경전통한지에 한지를 주문한다. 김 전수조교가 2000년 가업을 이어받기로 했을 때, 그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고 했다. 첫째는 전통한지만 한다. 둘째는 유럽에 판매한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이 처음 주문한 양이 200장이었다. 사람들은 그게 돈이 되느냐고 묻는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유럽은 보존·복원용으로 대부분 일본 화지를 쓰고 있다. 그런데 그 시장에 우리가 비집고 들어갔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전통한지를 잘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는 우리나라는 준비가 미흡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하향평준화된 한지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한지의 본고장인 전주에 대해서도 "전주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나라 전통한지는 제대로 갈 수 없다"며 애정 섞인 조언을 건넸다. 그는 "지금은 대부분 한지를 판매하는 데만 열을 올리지, 좋은 한지를 만드는 데는 열을 올리진 않는다"며 전주에서부터 천연재료,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전통한지를 늘려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정부에서 한지은행 제도 같은 걸 만들어 일정량의 전통한지를 수매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가 있었던 지난달 말 괴산한지체험박물관에서 만난 안치용(63) 한지장은 커다란 돌통에 닥섬유와 닥풀을 잘 풀고, 앞으로 옆으로 물질하며 창호지를 뜨고 있었다. 이날은 닥풀로 불리는 황촉규가 나올 시기가 아닌 관계로, 그 대용으로 마당에 심어진 윤노리나무를 잘라 사용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돌로 된 지통이었다. 안 한지장은 "한지는 물 온도와 기온이 낮은 추운 날씨에 뜨는 것이 가장 좋다"며 "온도가 높으면 황촉규가 잘 삭는다. 돌통이 수온을 일정하게 유지해 한여름에도 한지를 뜨는 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안 한지장 역시 닥나무와 황촉규를 직접 재배해 사용한다. 그는 1994년부터 닥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가 운영하는 신풍전통한지의 1년 생산량은 한지 3만~3만 5000장 정도로 자체 수급하지 못하는 닥나무는 충북 제천·단양·충주 등에서 구매해 사용한다. 안 한지장은 괴산한지체험박물관장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그가 수십 년 전부터 수집한 한지 관련 유물을 비롯해 3대 째 한지를 만들며 쓰던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그는 "선조들은 다 본 책, 글씨 연습한 종이를 버리지 않고 이를 붙이고 꼬아서 생활용품으로 만들었다"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한 한지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전통한지를 제작을 고수하면서도 기능성을 더한 한지의 현대화,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1986년 황토한지, 백토한지를 시작으로 짚벽지, 낙엽한지, 흑색한지 등을 개발했다. 관련 특허만 10여 건이 넘는다. 안 한지장은 "한지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해야 발전할 수 있다"며 "벽지와 장판, 수의 등 한지가 현대사회에서도 유용한 생활용품으로 자리 잡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10.12 18:26

[전주한지로드] ⑤ 한지를 지키는 사람들: 지자체 관심·지원 중요⋯전통한지 보전·계승 역할

전주 서서학동 흑석골 개천과 천변을 따라 늘어선 평화제지, 문성제지, 청보제지, 우림제지, 호남제지, 문산한지, 고궁한지⋯. 6·25 전쟁 이후 20여 개의 한지 제조공장이 들어섰던 흑석골은 1990년대 초반 정부의 환경 규제로 공장들이 팔복동으로 집단 이전하기 전까지 한지 생산이 왕성하게 이뤄졌던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한지골'이라 불렀다. 그 많던 사람과 공장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주한지의 탯자리인 흑석골을 지키는 기관이 생겼다. 올해 5월 개관한 전주천년한지관이다. 전주천년한지관은 전국 최초의 한지 관련 R&D 연구기관인 한국전통문화전당 한지산업지원센터에 이은 또 하나의 한지 거점공간이다. 전통한지 보전·계승에 대한 자치단체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처럼 전주한지가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데는 민간 영역에서 한지를 지켜온 한지장들의 노력과 함께 공공 영역에서 자치단체의 관심·지원이 큰 영향을 끼쳤다. △한지산업지원센터 이은 한지 거점공간 '전주천년한지관' 전통한지를 생산·체험·전시하는 한지복합문화공간인 전주천년한지관은 총 83억 원을 투입해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초지·도침·건조 등 전통한지를 제조·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됐다. 2층에는 전시실과 사무실 등 문화·사무공간이 마련됐다. 한지관은 한지산업을 문화산업으로 보고 전통 방식의 한지 제조 기술을 보전·계승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인미애 전주천년한지관 실장은 "경제 논리로 한지를 만드는 게 아닌, 한지를 생산했던 대표적인 장소의 복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아가 전통한지 제조 방식을 경험하는 장소로 만들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한지관에서는 국내산 닥나무, 천연 잿물, 황촉규(닥풀), 대나무발 등 전통적인 재료와 도구를 사용해 전통 제작 기술인 흘림뜨기(외발뜨기)로 전통한지를 제작한다. 건조도 온돌, 목판 등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다. 최근 한지 제조공장에서 볼 수 있는 외국산 닥나무, 양잿물, 가둠뜨기(쌍발뜨기) 등이 아닌 전통적인 원료와 공정을 복원해 한지를 제조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한지의 우수성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닥나무 껍질(인피섬유)은 길이가 길고 두께가 얇아 종이로 만들어질 때 섬유끼리 서로 잘 엉키는 부분이 많아 견고한 구조를 갖게 된다. 닥나무 껍질을 종이 원료로 만들 때도 천연 잿물을 사용해 순한 처리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인피섬유의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렇게 제조된 원료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뜨기 기법인 흘림뜨기에 의해 잘 찢어지지 않는 강한 종이로 만들어진다. 지난달 29일 찾은 전주천년한지관. 1층 초지방에는 곽교만, 박신태, 오성근 한지장과 후계 교육생이 있었다. 한지 제조 체험을 위해 방문한 초등학생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세 한지장과 후계 교육생은 한지관에 상주하며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만들고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들 한지장은 전주 흑석골에서 시작해 팔복동, 완주 소양면 등에서 수십 년간 한지를 만들어왔다. 한지 제조공장이 하나둘 문을 닫으며 잠시 손을 놓기도 했지만, 한지관 개관과 함께 다시 손에 하얀 닥나무 섬유를 묻히고 있다.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콩대·볏집대·고춧대·메밀대·깻대를 직접 보관했다가 천연 잿물을 만들고, 각종 도구와 설비를 손보는 등 열정 가득하다. 곽교만, 박신태, 오성근 한지장은 "전주한지는 1970∼1980년대 찾는 곳이 많아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하루에 100장 뜰 걸 300장, 400장씩 떠야 했다. 하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지금에 와선 그게 오히려 독이 됐다"고 했다. 한지 생산이 기계화·기업화되면서 전통 수공업에 의한 한지 생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전주한지장들이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못 만드는 게 아니다"라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전주 전통한지를 보전·계승하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전주시 조례, 전담팀 구성⋯한지 판로 개척·확대 추진 "전주는 한지에 대한 행정의 관심과 지원이 많아 부럽다." 한지를 취재하며 타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이다. 한지의 본고장인 전주의 경우 실제로 자치단체 차원의 지원이 많은 편이다.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를 통해 국내 한지 관련 조례 현황을 보면 광역·기초자치단체 6곳에서 조례를 제정·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전북도와 전주시가 각각 '전라북도 한지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전주시 한지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를 통해 한지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전주시는 전통문화유산과 내 한문화팀을 구성해 전통한지 보급을 위한 사업들을 수행하고 있다. 전주시의 대표적인 지원 정책은 2017년부터 6개 농가를 대상으로 닥나무를 재배·수매하는 '전주산 닥나무 수매사업'이다. 한지산업지원센터에 따르면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의 연간 수요량은 847톤이고, 이 가운데 국내산 닥나무는 230톤 정도로 추정된다. 나머지 부족량은 태국과 중국, 베트남, 라오스 등지에서 조달하고 있다. 이에 전주시와 한지산업지원센터는 전주한지의 정체성 확보와 안정적인 원료 공급을 위해 닥나무를 수매하기 시작했다. 2017~18년에는 관리만 진행하다가 2019년 11톤, 2020년 6톤(수해 영향), 2021년 8톤을 수확했다. 올해 기준 닥나무 재배 면적은 모두 2만1527㎡(6512평)이다. 판로를 넓히기 위한 다양한 정책적 시도도 이어졌다. 최근에는 전주시와 문화재청, 신협중앙회가 지난 2020년 체결한 전통 한지 문화유산 보전과 활용을 위한 업무협약에 따라 경복궁 창호 전주한지 바르기 행사를 진행했다. 전주산 닥나무로 제작된 전통한지는 내년 3월까지 조선시대 4대 궁궐과 종묘의 창호 보수사업에 지원될 예정이다. 또 그동안 시는 공공기관, 교육기관, 금융계, 종교계 등을 대상으로 표창장과 임명장 등에 전통한지를 사용하도록 독려해왔다. 도내 병원, 장례식장을 대상으로는 전주한지수의를 홍보했다. 한지수의는 1벌 당 A4 크기 전통한지 약 550장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품질보증은 한지 인증기관인 한지산업지원센터에서 수행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10.05 18:07

[전주한지로드] ④ 한지를 지키는 사람들: 전통한지 명맥 잇는 한지장…수요처 확보로 생산·소비 선순환을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은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라는 전담기관을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 등을 국가적으로 관리해왔다. 그만큼 한지업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산업군 중 하나였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따르면 한양에는 30개 관청 내에 129개 직종에 종사하는 장인들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종이를 제조하는 '지장(紙匠)'의 수는 85명으로 아홉 번째로 많은 직종이었다. 5도 221개 지역의 지방관아에 소속된 한지 제조 장인은 692명으로 수공업 분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공업에 의지했던 한지업은 목재펄프를 이용해 대량 생산되는 값싼 종이의 대중화와 서구화되는 생활 패턴의 변화로 수요가 줄어들며 설자리를 잃어갔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중국산 종이의 수입은 한지업의 쇠락을 가속화시켰다. 더불어 전통한지를 제작하던 '한지장(韓紙匠)'의 명맥도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한지장'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전북 출신 류행영, 홍춘수 보유자 닥나무 등을 주재료로 하는 한지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전주한지를 비롯해 우리나라 전통한지의 명맥이 이어진 건 제조 기술을 지켜낸 한지장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전북 출신 고(故) 류행영 한지장이나 홍춘수 한지장은 전통한지 제조 기술을 보유·전수하며 전통한지의 원형을 보존한 주요 인물들이다. 국가에서는 2005년 전통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한지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했다. 2005년에는 완주군 출신 고(故) 류행영(1932∼2013년) 장인이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류 장인은 2008년 명예보유자로 인정, 2013년 별세했다.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은 2010년 가평군 '장지방'의 고(故) 장용훈(1937∼2016년) 장인과 임실군 '청웅한지'의 홍춘수(1942∼) 장인이 공동으로 보유자로 인정됐다. 최근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로 김삼식(경북 문경), 신현세(경남 의령), 안치용(충북 괴산) 장인을 인정했다. 이로써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는 기존의 홍춘수 장인까지 4명이 됐다. 완주군에서 태어난 홍춘수 장인은 부친인 고(故) 홍순성 씨가 운영하던 전주시 서서학동의 종이 공장에서 일을 배우면서 12세 때 처음 종이 뜨는 일을 접했다고 한다. 19세 되던 해 선친과 함께 임실군 청웅면의 현 부지로 공장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한지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홍 장인이 처음 전통한지를 만들 때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한지가 널리 쓰일 때였다. 그는 색깔과 두께, 질감을 각기 달리한 맞춤형 한지를 만들어 팔았고 반응도 좋았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공장은 활기를 띠었지만 1990년대 접어들어 기계로 만든 한지가 등장하고 중국산·일본산 종이가 들어오면서 전통한지산업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한지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가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공 재료나 화학 약품을 섞어 사용하거나 기계를 대지 않은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만들었다. 오히려 황토를 반죽에 섞어 만든 벽지용 '황토지', 두 장의 한지 사이에 단풍잎이나 김을 무늬로 끼워 넣은 '단풍지'나 '김종이' 등을 내놓으며 천연 재료를 활용해 한지를 다양화하는데 몰두했다. 이렇듯 홍 장인이 부친의 어깨너머로 배운 일은 생업이 됐고, 이제는 큰사위인 노정훈 씨가 이수자로써 뒤를 잇고 있다. 전주한지장들 "문화로써 한지 지켜야"⋯사용처 발굴은 과제 예로부터 질 좋은 닥나무, 풍부한 수자원, 시장 입지 조건 등으로 한지업이 발달한 전주시. 한때 전주한지의 대표 생산지였던 흑석골은 전통한지 업체가 30여 곳이나 밀집해 이른바 '한지골'이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한지업이 사양길에 들며 지난해 기준 전주지역 수록한지 제조업체는 고궁한지, 대성한지, 성일한지, 용인한지, 전주전통한지원, 천일한지 등 6곳만 남았다. 전주시는 2017년 전주한지의 문화재적 가치를 전승·보존하기 위해 김천종(천일한지), 강갑석(전주전통한지원), 김인수(용인한지) 최성일(성일한지) 등 4명을 '전주한지장'으로 처음 선정했다. 이들은 30년 이상 전주에서 한지 제조업체를 운영하면서, 전통한지 제조 기술을 보유·전수해왔다. 전주한지장 지정은 전승 단절이 우려되는 전주 전통한지를 체계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였다. 전주한지장들 역시 전통한지가 돈이 되던 시절은 지났다고 말했다. 이제는 '문화'로서 전통한지를 지켜고 살려야 할 때라고 했다. 20대 초반 한지업에 뛰어든 전주전통한지원 강갑석 대표는 전주 흑석골에서 시작해 완주 상관과 소양, 전주 팔복동을 거쳐 2004년 전주한옥마을에 자리 잡았다. 한지업이 번창할 땐 그 역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땐 오후면 공장마다 종이를 걷으러 다니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국내외 할 것 없이 강 대표의 한지를 찾았다. 이제는 "재고만 10년은 팔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다. 강 대표는 "한지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선 건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시대가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생업적인 측면에서 전통한지 업체가 언제 없어지느냐는 시간과의 싸움이 됐다. 이제는 전통한지 제조를 '문화'로 보고 장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부분 한지 제조업체는 가족 경영으로 유지된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지 외길만 걸어온 강 대표가 말하는 전주한지를 살리는 길은 사용처를 늘리는 것밖에 없다. 서화용, 공예용, 벽지 및 장판용 등 한지를 용도별로 만들며 수요에 따라 출구를 모색해왔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는 "한지로 만들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며 "남은 사람이라도 제대로 명맥을 잇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 의무화로 지속적인 쓰임새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친으로부터 초지 기술을 전승해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성일한지 최성일 대표는 미래 시장 예측을 통한 소재 다양화로 수요처 발굴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전주한지의 차별점은 순지, 화선지 등 한지 생산·판매의 영역이 넓었다는 데 있다"며 "서예용, 공예용 한지 시장 이후 최근 한국화용 한지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 영원하진 않다. 어떤 시장이 올 것인지 예측하고 소재를 다양화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최근 최 대표는 서양화에 적합한 한지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생산 가능한 대형 한지는 1m40㎝X2m인데, 이를 2mX2m70㎝까지 늘리는 작업이다. 그는 "유화, 아크릴화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들이 자신의 특색에 맞게 한지를 이용해 작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한지 사용처를 새롭게 개발하는 것보다 서양화라는 기반이 조성된 곳에 소재로써 한지를 공급해 서양화 인구를 흡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야만 더 큰 시장에 발 디딜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08.29 18:33

[전주한지로드] ③ 전주한지 그리고 서예·공예: 한국 서단의 뿌리 전북⋯바탕엔 부드럽고 질긴 종이

"고려에 면견지가 있는데 색이 하얀 것은 마치 무늬 있는 비단 같고 강하고 질긴 것은 마치 명주와 같다. 그것으로 글씨를 쓰면 발묵이 매우 좋다." -고렴의 '준생팔전' 중에서 예로부터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는 종이의 역사가 깊은 중국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큼 우수한 품질을 자랑했다. 중국문헌 '박물요람'에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종이가 먹을 먹는 품이 고려지만큼 겸손한 것이 없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고려지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당시 상류사회의 사치이자 자랑이었다. 이처럼 한지는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강한 종이다. 한지가죽이란 한지를 가죽 대용으로 만든 소재로 <인조실록>에 "종이옷은 가볍고 따뜻하고 얇고 부드럽지만 여러 겹이면 화살도 뚫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라고 기록돼 있을 만큼 조선시대에도 한지가죽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한지는 흡수력이 우수해 예로부터 서예가나 화가들이 널리 애용한 재료이다. 이처럼 때론 부드럽고 때론 질긴 한지의 특성은 다양한 분야와 어우러지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특히 한지의 고장인 전주와 전북에선 서예와 공예가 발달했는데, 이 바탕에는 전통한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서화 발달' 전북 ⋯서단 거목들 전주한지에 많은 작품 남겨 질 좋은 전주한지가 많이 났던 전북에서는 오래전부터 서예가 발달했다. 전북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서화 미술이 가장 발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 서예의 명맥을 지켜온 전북 서예는 송재 송일중(1632∼1717), 창암 이삼만(1770∼1847), 석정 이정직(1841∼1916), 벽하 조주승(1854∼1903), 유재 송기면(1882∼1959), 설송 최규상(1891∼1956), 석전 황욱(1898∼1993), 강암 송성용(1913∼1999), 남정 최정균(1924∼2001), 여산 권갑석(1924-2008) 등에 이르기까지 오래전부터 탄탄한 서단을 형성해 왔다. 창암 이삼만, 석정 이정직, 석전 황욱, 강암 송성용 등 한국 서단의 거목이었던 서예술가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전북 서단은 한국 서단의 뿌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화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1997년부터 격년제로 열리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도 전북 서예의 명맥을 이어주는 귀한 통로다. 한지의 고장으로 이름을 알렸던 전북의 전통은 '실과 바늘' 같은 한지와 서예라는 조화로운 문화유산을 만들어냈다. 지역에서 작품 활동을 한 서예가들은 자연히 전주한지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창암은 전주한지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글씨를 연구해 작품으로 남겼는데, 200여 년이 흘러도 오늘날 그의 작품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전주한지의 우수성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지의 본래 용도는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데 있다. 한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화 용지로 각광받았으나, 펄프를 사용해 양지 제조기법으로 만들어진 화선지가 유행하면서 점차 서화 용지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됐다.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 값싼 화선지가 대량 수입되는 등 중국산 화선지가 시장을 점령하며 한지의 쓰임새가 크게 위축됐다. 이러한 복합적인 영향으로 최근에는 한지의 본래 용도가 퇴색되고, 응용한지가 더 활발하게 발전하는 양상이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응용한지도 중요하지만, 순수 한지산업이 살아나야 응용한지도 활성화된다"며 서화용 한지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전주한지 이용한 부채·우산 '지역 대표 명물'⋯장인들 명맥 이어가 예로부터 전북은 질 좋은 한지와 곧고 단단한 대나무에 장인들의 예술 정신이 덧붙여진 '전주부채'가 유명했다. 부채는 한자로 선자(扇子)라고 하는데, 부채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을 '선자장'이라고 불렀다. 전주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 김동식 선생을 비롯해 전북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 박인권·방화선·엄재수 선생, 낙죽장 이신입 선생 등 수많은 장인이 부채를 만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주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를 생산·관리하게 했다. <이조실록>에 따르면 이조시대 선자청이 있던 곳은 전라감영이 유일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생산된 부채는 임금에게 진상됐는데, 임금은 이를 '단오선'이라 이름 붙여 여름 더위를 대비해 신하들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선자청에서 부채를 만들던 장인들은 지금의 전주 중앙동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해방 후 중앙동이 발전하며 장인들은 반석리(현재 서학동)와 가재미골(현재 인후동)로 자리를 옮겼고, 이곳에 일종의 공방촌이 형성되기 이르렀다. 이렇듯 전주에서는 조선시대부터 대표 특산품으로 전주부채를 만들어왔으며, 현재도 전국에서 부채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부채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전주부채의 명맥이 이어져 온 것은 장인들의 기술력도 있지만, 부채에 사용되는 우수한 전주한지의 질에도 그 공이 일정 부분 있다. 또 전주에는 선자장뿐만 아니라 한지장, 한지발장, 지우산장 등 한지와 관련된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 전주에는 국내에 단 한 명뿐인 지우산(종이우산) 장인이 있다. 전북무형문화재 지우산 장인인 윤규상 선생은 전주에서 번성했지만 산업화에 밀려 사라질 뻔한 지우산을 되살려 현재까지 제작해오고 있다. 윤 명인은 17세인 1957년부터 진우봉, 엄주학 장인으로부터 지우산 만드는 법을 배웠다. 25세에 독립해 지우산 공장을 세웠지만 1970년대 이후 값싼 비닐우산, 천우산 등이 보급되면서 1985년 사업을 접었다. 이후 그는 2005년 한지발 명인인 유배근 선생을 만나 전통 공예의 맥을 잇기로 결심하고 3년에 걸쳐 옛날 방식의 제작 도구들을 복원해 전주한지를 이용한 전통 지우산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또 전주한지를 이용한 한지공예도 전주의 자랑이다. 한지공예는 제작 기법에 따라 지승공예, 지호공예, 지화공예, 전지공예 등으로 구분된다. 지승공예는 한지 색지를 길게 꼬아 엮어 생활용품이나 장식품을 만드는 예술의 한 분야다. 전지공예는 한지를 칼로 잘라 문양을 내는 공예를 말한다. 한지공예 부문 전북무형문화재로는 색지장 김혜미자, 지승장 김선애 선생이 있다. 문화재 보존·복원, 교과서, 수의 등 전주한지 산업화·실용화 노력 한지는 기록유산의 보존적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실용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대표적인 것이 문화재 보수·복원 분야다. 2017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일본의 화지, 중국의 선지를 제치고 '기록 유물 복원용 종이'로 한국의 한지를 채택했다.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 보존복원 중앙연구소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전통 한지 5종에 대해 문화재 보수·복원 용지로 적합하다고 인증한 바 있다. 전주시는 전주한지의 대중화, 활성화를 위해 문화재 보수·복본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일례로 전주, 완주, 임실, 부안 등에 전주 전통한지를 삽입한 지역사회 교과서를 배포하는 것이다. 전주시는 2016년부터 전통한지를 교과서에 공급하고 있다. 김천종, 강갑석, 김인수, 최성일 등 전주한지장 4인이 직접 제작한 전통한지, 색한지를 활용했다. 이 한지는 지도와 편지지 형태로 지역 사회교과서에 각각 삽입됐다. 이외에도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과 연계해 수료증과 임용장, 표창장 등 상장을 제작할 때 전통한지를 사용하고 있다. 친환경 전주한지 벽지, 한지장판 등도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전주한지로 만든 수의도 그 예다. 전통한지 수의는 전주한지장이 '줌치 한지' 형태로 종이를 떠서 수의디자인 업체에 납품해 제작한다. 한지수의 1벌 당 A4 크기 전통한지 약 550장이 사용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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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22.07.10 17:33

[전주한지로드] ② 전주한지 그리고 출판 : 기록문화 결정적 기여…한지에 새겨진 완판본

조선시대 전주는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있던 호남의 수도였다. 이를 반영하듯 전주에서는 전라감영의 영향으로 출판을 비롯해 서예, 공예 등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문화 발달의 밑바탕에는 전주한지가 있었다. 특히 전주한지는 우리나라 기록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완판본(完板本)이다. 전주는 조선시대 목판 인쇄술의 주류 지역으로 전주의 완판본은 서울의 경판본, 대구의 달성판본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책판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전주가 서적을 발간하는데 필요한 종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번 화에서는 전주한지에 새겨진 완판본을 중심으로 전주 출판문화의 발달 배경과 특징들을 하나씩 짚어본다. 전국 최고 품질·수량 '전주한지'…전라감영 서적 발간 영향 조선시대 대표적인 종이 생산지는 전라도 전주·남원, 경상도 경주·의령 등이었다. 이 가운데 전주한지는 최상품으로 취급받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전주를 상품지(上品紙)의 산지라고 했고, <여지도서>와 <대동지지>에는 조선시대 전주한지가 최상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0년대 한지의 종류는 40여 종이었다. 모두 닥 섬유로 만든 종이였다. 20여 종의 한지가 전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장 비싼 종이는 전라도에서 만든 태장지였다. 이렇듯 품질과 수량 면에서 전국 최고의 한지를 생산한 전주는 서적을 만들고 보존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주에 자리한 전라감영에서는 중앙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지가 제작됐고, 이는 자연스레 서적 발간으로 이어졌다. 전라감영의 시설로는 조지소(造紙所)가 있었고 여기에서는 다양한 종이를 제조했다. 조지소에는 종이 제작을 담당하는 지장(紙匠)이 있어, 질 좋은 한지를 만들었다. 또 전주 인근 상관, 구이, 임실 등에는 종이를 만드는 공장인 지소(紙所)를 두기도 했다. 이처럼 양질의 한지 덕분에 전라감영에서는 당시의 정치, 역사, 제도, 사회, 의서, 병서, 어학, 문학, 유학에 관한 60여 종의 서적을 출간했다. 전라감영의 영향으로 개인이 간행한 사간본(私刊本) 책이 250여 종이 출간됐고 이어서 판매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간행한 방각본(坊刊本) 책이 발간됐다. 이때 발달한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각수, 책판을 다루는 목수, 인쇄를 위한 시설 등은 전주의 출판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전라감영의 인쇄문화는 전주한지의 생산을 촉진해 한지의 질 향상을 이끌었다. 전주한지와 출판문화의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전라감영에서 서적을 출판할 때 사용한 책판은 전주 향교의 소유로, 현재 전북대 박물관에 기탁돼 5059판이 보관돼 있다. 이 책판은 1899년(광무 5년)에 전라관찰사 조한국이 향교로 이전했던 것이다. 주로 <자치통감강목> <동의보감> <성리대전> <율곡전서> <주자대전> 등의 책판이 있다. 이 책판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돼 있다. 서민을 일깨운 '완판본'…지식 전수·문화 전승 역할 완판본은 좁게는 조선시대 전주에서 출간된 옛 책, 넓게는 전라감영이 관할하던 지역(전라도와 제주도)에서 발행한 옛 책을 가리킨다. 전주를 뜻하는 완산(完山)의 '완'자와 목판(木板)의 '판'에 책을 나타내는 '본'(本)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전라감영에서 제작한 책의 목판본인 감영본(완영판)과 민간에서 제작된 목판본인 방각본이 있다. 완판본은 판본의 종류나 규모 면에서 전국 최고를 자랑했다. 상업적인 판매를 목적으로 출판된 방각본은 전국적인 보급망을 갖추고 서울의 경판본과 경쟁할 정도로 성행했다. 완판본의 종류를 살펴보면 완판본 한문고전소설은 한글소설이 대중화되기 전에 식자층을 중심으로 판매됐다. 전주에서는 전주에서는 <구운몽> <전등설화> <삼국지> 등이 간행됐다. 현재 전해지는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종류는 20가지가 넘는다. 이 가운데 판소리계 소설이 <열녀춘향수절가> <심청가> <화룡도> 등인데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소리로 불리던 판소리 사설이 소설로 정착한 것이다. 나머지는 영웅소설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도 발행됐는데, 이 책들은 개화기 시대 전라도에서 가장 많이 발간된 판매용 책이다. 특히 책이 크기 때문에 한지가 생산된 전주에서 많이 출간됐다. 완판본은 목판본 외에도 서민들에 의해 작성된 필사본도 많이 생산됐다. 목판본의 출현으로 서적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목판본이라는 기성제품은 물론, 필사본이라는 수제품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완판본은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던 서적을 서민층에게 보급하는 계기가 됐다. 서민들의 자각을 일깨워 지식을 전수하고 문화를 전승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완판본이 단순한 서적 보급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도 여기 있다. 안은주 완판본문화관 학예실장은 "완판본은 중앙정부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된 것은 물론 서민들의 지식 욕구와 독서 욕구에 따라 만들어져 판매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민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전주한지를 이용한 복본화(원본을 그대로 베끼는 일)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전주시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전주한지에 복본화한 데 이어, 완판본 서적도 전주한지도 복본화 했다. 전주한지로 기록문화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은 전주사고에 보관됐던 태조부터 명조까지 614책(5만 3102면)의 이미지 파일을 규장각으로부터 확보해 전주한지에 모양, 크기, 글씨 등을 원형 그대로 재현했다. 완판본 서적 복본화 작업은 17∼20세기 전라감영에서 간행됐던 완판본 70여 종을 대상으로 했다. 완판본 서적에 사용된 한지는 조선왕조실록용 보다 중급지 이하의 한지가 사용됐다. 이는 조선시대 제작 당시 낮은 등급의 한지가 사용된 데 따른 것이다. 이밖에 한지의 물성을 활용한 다양한 한지 산업화가 시도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지 본연의 쓰임인 '종이'로서의 기능과 가능성을 되찾아 주는 일은 우리 앞에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05.09 19:11

[전주한지로드] ① 프롤로그 : 한지의 본고장 전주…장인정신·자연환경이 빗어낸 한지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 비단은 500년을 가고 한지는 1000년을 간다. 이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한지(韓紙)는 한문화 발달의 바탕이 됐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문화를 갖게 된 것도 천년을 견디는 한지 덕분이었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은 한지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서기 751년 불국사 중창 때 봉안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지에 담은 글들이 탑 속 사리함에서 약 1300년을 견뎌낸 것이다. 한지를 천년지(千年紙)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북은 조선시대 전국 한지의 40%가량을 생산했던 한지의 본고장이었다. 특히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전주한지는 고려시대 중기 이래 조선시대 후기까지 왕실의 진상품으로 올려졌고, 조선시대 때는 외교 문서로도 사용됐다. 예로부터 전주한지가 유명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주 근교에서는 닥나무가 많이 생산돼, 이를 원재료로 한 한지 제조업이 성황을 이뤘다. 고려시대부터 지방관아에서는 닥나무 재배를 제도화했을 정도다. 또 철분 함유량이 적은 깨끗한 물도 한지의 품질에 한몫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한지의 명맥을 이어온 장인들이 있었기에 전주한지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렇듯 한지산업이 발달했던 전주에서는 한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출판, 서예, 공예 문화가 발달했다. 이에 본보는 전주의 찬란한 문화를 이루는 '원류'로서 한지의 역사성과 상징성, 확장성 등을 기획 '전주한지로드'로 풀어낼 예정이다. '전주한지로드'는 한지에서 출발하는 '확장성의 길'이자 한지가 뻗어나갈 '가능성의 길'을 의미한다. 한지의 기원과 발전 인류의 문화 발달은 종이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종이라는 말은 본래 '저피'에서 나온 말로 저피가 조비-조해-종이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인 한지는 예로부터 주변 국가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닥나무와 닥풀(황촉규 뿌리)을 주원료로 만들어 순우리말로 '닥종이'라고도 불렸다. 우리가 쓰고 있는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시대 채륜이 나무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최초로 종이를 만들었다는 설이 대두되다가, 그 이전의 서사 재료들이 발견되면서 채륜이 종이를 개량했다는 설이 유력해졌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도 종이와 비슷한 재료가 발견됐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채륜에 의한 개량 시기에 앞서 종이가 제조됐으리라 추측된다. 610년은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먹 등을 전해주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삼국시대는 한지의 태동기로, 우리나라는 이 시기 이후 독창적인 한지를 생산했다. 우리나라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라 불렀다. 송나라 손목은 <계림유사>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조지서'를 설치해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 등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왔다. 이 시기는 지질의 종류가 제일 많고 다양했다. 서책 간행량도 가장 많았다. 이러한 한지는 닥나무와 닥풀을 주재료로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등 수십 번(아흔아홉 번)의 손길을 거친 뒤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해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했다. 한지는 예로부터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색깔이나 크기, 생산지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른다. 대표적인 구분은 재료, 용도, 색채, 산지, 크기와 두께 등에 따라 나눠진다. 이에 따른 종이의 종류는 대략 200여 종에 이른다. 이처럼 다양하게 생산된 종이는 주로 그림과 글씨를 쓰기 위한 용도로 가장 많이 소비됐다. 일반 민중들은 다양한 용도의 생활용품과 장식적 아름다움을 표현한 예술작품으로도 활용했다. 전주한지의 역사 예로부터 전주 근교인 완주군 구이·상관·소양면, 임실군 덕치면, 남원시 산내리 등에서는 한지의 주재료인 닥나무가 많이 생산됐다. 이로 인해 닥나무 생산이 많은 전주에서 한지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닥나무 수요 감소로 2018년 이전까지 40곳 이상이었던 농가 수는 2018년 11곳으로 급감하고, 생산량 또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부족량은 태국과 중국, 베트남, 라오스 등 전체의 80%가량을 수입닥으로 대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주한지산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닥나무 수급 안정화가 절실하다. 전주가 한지의 주생산지였다는 것은 조선시대 말(19세기) '완산십곡병풍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완산십곡병풍도를 보면 왼편에 '지소'가 있다. 지소는 현재 위치로 전라감영 복원 서편 담장 밖 정도로 추정된다. 지소는 고려·조선시대에 지장이 모여 살며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종이를 만들던 구역을 일컫는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우리는 전주가 한지 원료, 제조산업 뿐만 아니라 한지 유통산업의 중심지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주는 1800년대부터 풍남동을 중심으로 한지를 제조했다. 그러나 도시화로 수질이 나빠지면서 1940년대 서서학동 흑석골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한지골'이라 불리는 흑석골에서 한지를 제조했다. 이후 하천수 오염과 부족 문제, 닥나무 수요 감소에 따른 생산량 감소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93년 전주한지 활성화를 위해 집단화를 추진했고 도내 31개 업체 가운데 22개 업체가 전주공단 협동화단지에 입주(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결성)하게 됐다. 그러나 전국적인 한지산업 축소로 지난해 기준 전주지역 한지 제조업체는 수록한지 업체 6개, 기계한지 업체 2개 등 모두 8개로 조사됐다. 전주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주시 한지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에 따라 전주한지장을 지정해 지원하고 있다. 전주한지장은 전주한지 제조·생산 등에서 숙련된 기술과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한지산업에 20년 이상 장기간 종사한 인물을 말한다. 전주한지장은 최성일(성일한지), 김인수(용인한지), 김천종(천일한지), 강갑석(전주전통한지) 등 4명이다. 이밖에 전주시는 한지산업지원센터와의 협력으로 26회째 전주한지문화축제를 개최하고 한지 교과서 제작, 닥나무 수매 등 한지 수요 확대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올해 4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집적화된 한지 생산지였던 흑석골 일대에 지어진 '전주천년한지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전주천년한지관은 국비 등 총 83억 원을 투입해 한지 제조공간과 체험공간, 기획전시공간 등을 구축할 계획이다. 최근 전주한지는 산업화·세계화 길도 열어가고 있다. 특히 전주한지는 미술품이나 서적 등의 보수·복원 재료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 8월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보존중앙연구소(ICRCPAL)는 전주한지가 부드러우면서 잘 찢어지지 않는 강한 내구성을 갖고 있어 문화재 보수·복원용으로 적합하다고 판정한 바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성 프란체스코의 친필 기도문, 6세기 비잔틴시대 복음서, 화가 피에트로 다 카르토나의 17세기 작품 등이 한지로 복원됐다. 전주시는 타 자치단체와 협력해 전주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해 4월 29일 '전통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추진단'을 발족한 이래 안동, 문경, 전주, 서울 종로에서 릴레이 학술포럼을 열고 전통한지의 가치를 조명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문민주
  • 2022.04.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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