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우리 정치사에서 그만큼 부침이 심한 인물은 없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하면서 정계에 화려하게 진출한다. 천정배, 신기남과 함께 새천년민주당의 정풍 운동을 주도한다. 권노갑 의원 등 동교동계의 퇴진과 민주당의 쇄신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일약 개혁의 기수가 된다. 2002년 대선 후 집권 여당으로 새로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당 의장이 되어 17대 총선을 진두지휘하여 노인 폄하 발언 파동에도 원내 과반을 확보하는 승리를 이뤄낸다. 통일부 장관이던 2005년 6월 김정일 국무위원장을 만나 개성공단, 북핵 문제 등 남북관계를 크게 진전시키는 역할도 해낸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입문 11년 만에 이해찬, 손학규 등 거물들을 물리치고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선출되면서 최고 정점을 찍게 된다. 이때가 정동영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정동영에게 2007년 대선 후보 이력은 이후 정치 여정에 큰 굴레로 작용한다. 대선 참패의 책임을 오롯이 독박 쓴 채 말이다. 어쩌면 그때 대선 후보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정동영에게는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정몽준에게 패배한다. 이듬해에 뜻하지 않게 전주 덕진 김세웅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기회가 찾아온다. 그러나 민주당이 정동영의 출마를 반대하자 무소속으로 출마를 강행한다. 결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 민주당에 복당한 정동영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험지 출마 압력을 받아 서울 강남을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고 만다. 2015년 서울 관악을 재·보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3등으로 낙선하는 치욕을 겪기도 한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전주 병에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그의 보좌관 출신인 민주당의 김성주 후보에게 989표 차이로 신승한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생당 후보로 출마, 민주당 김성주 후보에게 5만여 표 차이로 패배. 와신상담 끝에 지난 4월 22대 총선에서 김성주 의원과의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파란만장,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정동영의 마음을 사자성어로 표현하자면 일모도원(日暮途遠)일 것이다. 날은 저무는 데 갈 길은 멀다. 한때 진보 정치권의 최정상, 호남 인맥의 대부, 전북의 자랑이던 정동영의 정치 근력이 이울어가고 있다. 이제 정동영은 스스로 호랑이처럼 바람을 일으키거나 용처럼 구름을 불러 모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다. 여든 야든 누구도 민주당의 큰 어른인 정동영을 가벼이 여기진 못할 것이다. 잼버리대회 파행으로 인한 새만금 예산의 대폭 삭감, 지역 정치인들의 형편없는 대응력과 존재감을 지켜본 전북도민들이 정동영을 다시 소환한 이유는 간단하다. 윤석열 정권과 제대로 싸워라. 무너진 도민들의 자존감과 무력감을 다시 세우라는 것이다. 덧붙여 후배 정치인들을 잘 이끌고, 도움을 주는 맏형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대체로 정치인의 뒤안길은 쓸쓸하다. 김종필은 말년에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하였다. TK의 영원한 킹메이커 허주(虛舟) 김윤환도 토사구팽당하고 빈 배로 세상을 떠났다. 도종환 시인은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라일락꽃). 세월이 가도 향기와 빛깔을 잃지 않는 정치인, 결코 뒷모습이 쓸쓸하지 않은 정치인 정동영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 권혁남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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