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2차봉기 장소인 삼례역참 자리가 현 삼례 동부교회 일대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또 동학농민혁명 당시 완주 고산에서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진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이 같은 내용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주최로 30일 완주 향토예술문화회관에서 연 `완주 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모색` 학술대회에서 나왔다.
동학농민혁명 2차봉기는 반일투쟁을 전면에 내건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 사건으로, 2차 봉기지가 `삼례역`이었다는 사실은 전봉준 장군에 대한 재판기록 등 여러 자료에 나오고 있으나 역참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여러 곳이 거론됐다.
이와 관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인 이병규 박사는 `전봉준공초`에 "삼례역에 대도소로 삼았다"는 기록이 2차 봉기터 확정할 수 있는 중요 근거로 보고, 조선시대 지도와 동학농민혁명 이듬해 작성된 1905년 지적도, 1914년 지적도, 1915년 지도 등을 종합해 본 결과 삼례역참 터를 삼례동부교회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2차 봉기터의 핵심지역을 삼례역참터로 상정하고 그 위치를 비정했으나 확실한 고증에는 불충분한 점이 있다"며, "다만 오랫동안 거주했던 주민의 증언을 통해 확인한 만큼 이에 관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동안 알려지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산전투가 벌어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을 수록한 <수무선봉진등록>에 따르면 1894년 11월 17일 고산 산천리(현 동상면 대안리 산천마을)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과 크게 전투를 벌였고, 전투과정에서 농민군 30여 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해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 관군과 일본군이 같은 날 동학농민군 화약제조소를 공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부장은 "30명의 농민군 전사하고, 화약제조소까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고산에서 매우 큰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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