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당정토인록〉은 1894~1895년 동학농민혁명의 진압과 토벌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사람을 표창하기 위해 만든 자료이다. 작성년대와 주체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당시 갑오개혁정부의 군부가 여러 기관에서 올린 명단을 취합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순무사 신정희(申正熙) 종1품 졸서(卒逝)’라고 표기되어 있고, 또 ‘좌선봉 이규태(李圭泰) 졸서(卒逝)’라고 했는데, 이규태의 사망일자가 1895년 6월 23일(『관보』 1895년 7월 9일자)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록 내용으로는 주책(籌策, 4명), 장령(將領, 25명), 주모(主謀, 17명), 공략(攻略, 309명, 중복 3명), 의려(義旅, 346명, 중복 2명), 정탐(偵探, 64명) 등 6개 부분에 모두 765명에 대해 공훈 내역을 기록하였다. ① 주책에는 순무사 신정희, 중군 허진, 군부협판 권재형, 종사관 정인표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② 장령에는 좌선봉 이규태, 호연초토사 이승우, 호남초토사 민종렬, 충청감사 박제순, 충청병사 이장회를 비롯하여 지휘부를 구성한 인사들을 망라하고 있다. ③ 주모는 실제 전투현장에서 군부 지휘부를 구성한 인사들로 참령 이승원 호연(湖沿)참모관을 비롯하여 순무영 참모관, 순무영참모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④ 공략은 전국 각지방에서 출전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인사들로 대개 경리청, 통위영, 장위영 등의 영관, 대관 등이며, 각지방에서는 영장과 별군관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⑤ 의려는 대개 각지방의 수성군 내지 민보군으로 활약한 인사를 포괄하고 있다. 전라도 고부(전현감 은덕중), 고창, 부안, 태인, 나주, 전주, 구례, 순천 등이며, 경상도 하동(전부사 이윤식), 거창 등, 경기도 양근(전판관 김태영), 지평, 개성, 충청도 태안, 홍주(전현감 민기호), 보령(정산군수 박홍양), 목천, 서산, 천안(군수 윤영렬, 전영장 유상후 등, 전참봉 윤치소), 공주(전오위장 강원백), 제천 등, 강원도 강릉(전오위장 윤세중), 원주, 양양 등, 황해도 신천(의례장 진사 안태훈)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의려 중에는 각 지방에서 관직이 없는 유학도 다수 차지하여 있다. 이어 ⑥ 정탐에는 별군관 순행양호 정위 남만리를 비롯하여 64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전국에 걸쳐 중앙과 지방의 각종 부대, 의려 등을 망라하고 있어 동학농민군 토벌 상황을 알 수 있고,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을 살펴볼 수 있다.
〈갑오군공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진압과 토벌에 군공(軍功)이 있는 인사들의 이름과 군공 내용을 적어 놓은 자료이다. 기록 방식으로는 군공을 세운 사람의 당시 직함과 이름을 적고, 다음으로 군공에 따라 기존의 품계와 군공을 받게 된 구체적인 내용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전체 기록된 인사는 모두 410명이다. 전체 인명 숫자에 대해 약간 혼선이 있다. 군관 출신(出身) 이병식(李秉植)의 경우 이후 같은 직위와 동일 이름이 발견되어 중출(重出)이라고 표기하였고, 수안퇴리(遂安退吏) 권성돈(權成敦)도 다시 반복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제외하면 실제 명단은 약간 축소된다.
군공 서열로 보면, 순무사 신정희를 필두로 해서 중군 허진(許璡), 군부협판 권재형(權在衡), 종사관 정인표(鄭寅杓) 등을 비롯하여 호남초토사 민종렬, 호연초토사 이승우, 충청감사 박제순, 전라감사 이도재, 좌선봉 이규태, 청주병사 이장회, 전경리영관 군수 성하영, 전순무참모관 주서 박봉양 등이 나열되어 있다. 공훈 내역은 민종렬 경우와 같이, “뜻을 세워 궁리하고 계획하여 외따로 고립된 성을 끝내 지켰다[矢志運籌竟守孤城]”라고 대개 8자 문구로 표현하였다. 이어 통위영관 등 영관급, 통위대장 등 대장급, 경리교장(經理敎長) 등 교장급, 순무참모관 등 참모관급, 순무별군관 등 군관급 등을 기록했다. 각지에서 창의(倡義)를 통해 군공을 세운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지방의 아전이나 직책 없이 단순히 공을 세운 일반민들도 동학농민군 전투와 토벌에 군공을 세운 다양한 직위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공적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학농민군의 3대 지도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을 체포한 사실을 특기하였다. 전봉준을 생포하였던 순창 유학 김영철, 순창민 정창욱 등 3명을 거론하였고, 김개남과 관련해서는 심영병관(沁營兵房) 황헌주를 수행한 황시중, 김경석, 김시형, 윤치근 등을 기록하였으며, 고부사람 조인상(趙仁常), 순창 사람 이경우(李京佑) 등 11명이 손화중을 붙잡은 데 공을 세웠다. 그밖에 전 고창현감 은덕중(殷德中)은 손여옥을, 고창유학 서동식(徐東植)은 홍락관을, 무안유학 오한수(吳漢洙)는 배상옥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특이한 것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동학농민군을 탄압한 교도소 대관, 통역 등의 명단도 나온다. 이들의 공로는 “일본군 진영에서 종군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隨從日陣始終效勞]”든지, “일본군 진영에서 공로가 적지 않았으며 큰 비류를 붙잡았다[效勞日陣捉得紳匪]” 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 병참총감 카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가 비밀지령을 내려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렬함을 요구한다. 향후 모조리 섬멸하라”고 명령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들은 동학농민군의 학살에 공동책임을 져야하는 인사인 셈이다. 일본정부에서는 별도로 일본군 전투공로자 457명, 전투를 하지 않은 공로자 157명 등을 포함하여 모두 627명을 포상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데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들을 수록하는 방식에는 여러 차이가 있었다. 〈동학당정토인록〉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참여한 인사 중 286명만이 〈갑오군공록〉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전라감사 이도재, 전현감 조원식, 강릉민보장 이수해(李守海) 등 124명이 추가로 군공록에 수록되었다. 한편 동학농민군 진압에 큰 공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군공록에 수록되지 못한 인물도 있다. 조희연(군부대신), 이두황(양호우선봉) 등이 그랬다. 이들은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역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양 자료의 계승관계는 어떠할까. 공적 인명을 최종 정리한 시점은 언제일까. 갑오군공록은 1895년 8월 군공록 편찬에 들어가 ‘군공조사규례’가 마련되기도 했지만, 이때는 미처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1900년 11월 이후 작성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김태웅, 「1894년 농민군 진압자의 정국 인식과 정치적 행로의 분기-〈갑오군공록〉 등재자를 중심으로」 『대한제국과 3·1운동』 휴머니스트, 2022, 320쪽 참조).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수십만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공훈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 인사들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시기 집권세력에 의해 충군애국의 표상으로 크게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공훈인명록은 수많은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참여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가해자측의 기록이며, 일본과 협조하여 민중세력을 탄압한, 결코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공훈자들의 명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2개의 자료는 모두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도 필사본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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