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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0) 염기(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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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 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염기(廉記)란 염탐 기록을 의미한다. 1996년 편찬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수록된 〈염기(廉記)〉는 1900년 경자년(庚子年) 10월 전라남도 순천(順天)·여수(麗水)·광주(光州)·영광(靈光)·담양(潭陽) 등지의 효자(孝子)와 토호(土豪)·향유(鄕儒)들의 성명 및 이들의 민간에 대한 토색을 염탐하여 행패를 부리는 자와 포상해야 할 자들에 대한 조사 내용을 기록한 자료이다. 표지에 “庚子十月 日”이라는 기록이 있고‚ 본문 중에 동학에 관련되는 기록들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 문서의 편찬 시기는 1900년 10월임을 알 수 있다.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22.1×23.6cm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염기〉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 지방 접주층들이 민간 토색(討索)을 일삼았으며 동학농민군 진압 시 대개 뇌물을 주고 살아나 이후 더욱 치부(致富)하였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 남부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층의 경제적 기반을 알 수 있으며 이후 지방사회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중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순천 주암면 용촌(龍村)에 사는 조귀성(趙貴星)과 그 아들이 모두 접주(接主)와 거괴(巨魁)가 되어 평민(平民)을 토색(討索)한 사례가 수록되었다. 1900년 봄에 이르러서도 다시 사통(私通)을 하여 그 무리를 궐기시키려고 한 것이 여러 차례임이 포착되었다. 마찬가지로 순천 남문밖에 사는 서백원(徐白元)은 접주를 핑계 삼아 재물을 토색질하여 백성의 원한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순천 송광면 낙수동(洛水洞)에 사는 이사계(李士繼)도 본래 부자로 갑오년(甲午年)에 접주가 되어 평민을 침탈하여 더욱 부유해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염기󰡕의 작성자는 동학농민군 접주들이 민가에 대하여 토색 및 침탈을 하여 치부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순천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1900년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순천 주암면 용촌의 조귀성도 1900년 봄에 이르러서도 궐기 움직임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순천 별량면(別良面)에 사는 심능관(沈能冠)도 더욱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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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 본문-순천지역. 서울대 규장각 제공

 

〈염기〉에 따르면 그는  갑오년 거괴로 거부(巨富)가 되었으나 지난날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다. 1899년 전주(全州)의 병정 1명을 청탁하여 오게 하고, 그의 족인(族人)이라고 일컬으며 그의 사채를 무난히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이때의 행동이 수상하였기 때문에 면(面)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갑오년에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금 도리어 그 화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원망하여 말하기를 “어찌 하늘의 도가 있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1900년까지도 순천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 여수 화양면(華陽面) 봉오동(鳳梧洞)에 사는 심송학(沈松鶴)은 도집강(都執綱)의 이름으로 무리 수천명을 모아 고진(古鎭)·방진(方鎭)·봉화(烽火) 3곳의 군기를 탈취하였다고 한다. 하동(河東)에서 싸울 때에 민간의 돈과 곡식을 무수히 탈취한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하동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보다 자세한 추적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시선을 돌려 광주군(光州郡) 중옥리(中玉里)에 사는 지중화(池仲化)는 접주 거괴로 지난날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어 의기가 양양하여 늘 동도(東徒)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랬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일만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밖에 광주 방산리(方山里)에 사는 문영보(文永甫)는 접주로 백성의 재물을 토색질하여 그 집이 부유해졌다고 한다. 광주 송정리(松亭里)에 사는 우치옥(禹致玉)도 접주로 민간을 토색질하여 그 돈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전라도 내륙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활동도 눈에 띈다. 임실(任實) 이인면(里仁面) 독산촌(獨山村)에 사는 김내칙(金乃勅)은 동학의 거괴로 난리를 일으킨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갑오년 왕사(王師), 즉 관군이 내려왔을 때에 간사한 아전에게 붙어 속전(贖金) 수천금을 내고 풀려나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고 한다. 임실 하동면(下東面) 계월리(桂月里)에 사는 전경서(全京瑞)도 본래 진안(鎭安)사람으로 갑오년 동학의 거괴이고, 어지럽게 작난질 한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난리가 가라앉은 뒤에 진안에서 지낼 수가 없어 임실 하동면 계월리로 이사한 기록이 있다. 

임실은 김개남의 근거지인 남원 인근의 고을이다. 따라서 임실 신안면(新安面) 낙천(樂泉)에 사는 한흥교(韓興敎)는 거괴 김개남(金開南)의 친사돈으로 무리 수만명을 인솔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城)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염기〉에 남아 있다. 또한 이 사람의 사촌인 韓東敎도 접주가 되어 수없이 많은 침탈을 하여 백성의 원망이 길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밖에 영광 염소면에 사는 정훈직(丁熏直)은 본래 갑오 동학의 거괴로 난리를 일으킨 것이 심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의 농사 짓는 소를 빼앗아 멋대로 도살하고, 남의 집을 부수었으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모은 재산이 수만냥이 된다고 하였다. 영외면(嶺外面) 대월리(大月里)에 사는 이중구(李重九)는 거괴로 기포대장(起炮大將)을 자칭하고 소 10마리를 잡았다. 여기서 기포대장(起炮大將)이 동학의 기포대장(起包大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담양(潭陽) 서면(西面) 간리(間里)에 거주하는 박관기(朴寬基)는 본래 읍속(邑屬)으로 전량(錢兩)의 이자를 받는 날이 만약 기한을 넘기면 그 부요(富饒)를 기대고 권세에 의탁해서 사람을 무수히 때려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갑오년 동학의 거괴로서 남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토색질을 하다가 임산부를 구타하여 바로 낙태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에 목숨을 도모하는 일로 속전 수백 냥을 내었다고 한다. 이 또한 〈염기〉 작성자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증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염기〉에는 전라도 순천, 여수, 광주, 임실, 영광, 담양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활동 및 1900년에까지 이어진 활동들이 수록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민간 토색을 일삼고 치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된 각종 토색질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자 하였던 관군 혹은 이들과 호응한 사람들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증오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기에 그대로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나 동학란으로 지칭되어 탄압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지역 사회에서 그대로 남아 치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대부분의 동학농민군은 죽거나 지역 사회를 떠나야 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따라서 󰡔염기󰡕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한 방증 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이고 여기에 나온 기록 모두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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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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