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회성책〉은 1894년 청면 천동 유회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표지에 갑오년 11월 일 청면(靑面) 천동(泉洞) 유회성책(儒會成冊)이라고 써진 이 문서는 표지까지 포함하여 10쪽으로 되어 있다. 청면 천동은 1894년 당시에는 정산현(定山縣)이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이다. 문서에 관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동 유회(儒會)의 리회장(里會長) 김학현(金學鉉)이 현감에게 보고한 문건으로 보인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1894년 11월이며, 작성지역은 정산현 청면 천동이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점은 왜 이러한 문서가 작성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시기와 장소의 문제이다. 시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우금치전투가 있었던 때이며 장소인 청면 천동은 우금치전투지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그리고 우금치 전투 이후 조선정부의 지방통제책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토벌하는 동시에 5가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내용의 문제이다. 속오(束伍) 4명을 포함한 29가호의 아버지와 아들 39명을 대상으로 ‘불입(不入)’과 ‘귀화(歸化)’로 구분하여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불입은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귀화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문서가 작성되었을까? 그 이유는 청면 천동의 유회가 자신들의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즉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문서를 선제적으로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즉 일부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했지만 그들을 모두 귀화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상 잡아가거나 체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산현감과 토벌군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이러한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보여진다. 각각 가호별로 보면 25가호의 불입과 귀화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볼 대목은 10가호에서는 부자 또는 형제가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의 경우 부자 또는 형제가 모두 귀화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불입이면 아들은 귀화, 아버지가 귀화면 아들은 불입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형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청면 천동에서 찾으면 된다. 이곳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이다. 이 마을은 예안김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성책을 보면 속오를 제외하고 김씨 27명, 윤씨 4명, 소씨 1명, 이씨 1명, 전씨 1명, 복씨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가 대부분이다. 이 김씨가 바로 예안김씨참판공파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이곳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확인된다.
그림 9)는 유회성책 내지 첫장이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유학 김휘홍과 그의 아들 김병규이다. 김휘홍은 불입이고 아들 김병규는 귀화이다. 그런데 이를 그림 10)의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와 비교해 보면 김휘홍과 그의 아들 김병규가 확인된다. 한자도 같다. 김휘홍은 1826년에 태어나서 1907년 사망하였고, 김병규는 1854년 태어나서 1906년에 사망하였다. 이들은 모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생존해 있었다. 즉 유회성책에 기록된 인물들이 대대로 청면 천동, 지금의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에 살았던 예안김씨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림 9) 유회성책 첫장의 김휘국, 김원규도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확인된다. 김휘국은 귀화이며 그의 아들 김원규는 불입이다. 김휘국은 1836년에 태어나서 1904년에 사망하였고, 김원규는 1856년에 태어나서 1930년에 사망하였다. 이들도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림 12)와 13)은 리회장 김학현에 관한 기록이다. 김학현은 청면 천동의 리회장으로서 이 문서를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한 당사자이다. 그런데 그림 14)와 15)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학현은 예안김씨참판공파 종손이기도 하다. 김학현은 그의 동생과 함께 불입이다. 그는 1852년 출생하여 1915년 사망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김학현은 청면 천동에서 대대로 살았던 예안김씨참판공파 종손으로서 그리고 리회장으로서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하자 마을과 종중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유회성책을 작성하였다. 유회성책에 예안김씨는 27명으로 추정되는데,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사망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청면 천동에는 과거에 150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예안김씨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이를 알고 매우 놀라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선 귀화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비록 귀화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성분조사서를 작성한 주체의 경우,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선재적으로 작성하였고 이 때문에 희생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매우 현명하고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매우 혼란스럽고 엄혹한 상황에서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이러한 문서 작성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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