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된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은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충청감영의 움직임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의 공통점은 저자가 동학농민혁명기 충청감사를 지낸 이헌영(1837-1907)과 박제순(1858-1916)이란 점이다. 이헌영은 이른바 집강소기로 불리어진 6월부터 8월까지 충청감사로 재직하였고, 이헌영의 뒤를 이은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여 공주 우금치전투를 벌인 시기에 충청감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을 서다 1895년 5월에 퇴임하였다. 따라서 두 기록물은 충청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동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응한 정부쪽 동향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기록물이다.
<금번집략>의 저자 이헌영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후 통리기무아문경리사가 되었고, 부산항 감리, 의주부윤을 거쳐 주일공사를 지냈다. 1890년 귀국하여 교섭통상사무 협판에 재직하다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894년 4월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6월 20일에 가서야 공주 충청감영에 부임한 뒤 8월 25일까지 재임하였다. 이 시기는 충청도에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이 맞물려 나타나면서 매우 위중한 때로, 그 실상이 <금번집략>에 잘 나타나 있다.
<금번집략>의 구성은 일록(日錄, 11면), 별계(別啓, 32면), 별보(別報), 별감(別甘, 19면), 시구(詩句)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총 51면으로 크기는 29x30cm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록’은 이헌영이 충청감사로 제수받은 4월 25일부터 신임 감사 박제순과 교체되는 8월 29일까지 쓴 일기체 형식의 기사로 주로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청일양국 군대의 동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헌영은 6월 10일 고종 임금께 부임인사를 드릴 때, 동학농민군을 잘 타일러 귀화시키라는 명을 받은 만큼 충청도 동학농민군 해산에 적극 나섰다.
‘별계’는 중앙 정부로 올린 계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6월 27일에 발발한 청국군과 일본군의 성환전투와 전투 이후 두 나라 군대의 동향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환전투에서 패한 청국군이 공주에서 청주・충주를 거쳐 평양으로 북상하는 일련의 과정과 그에 따른 민폐, 그리고 충북 연풍・충주를 거쳐 북상하는 일본군 제5사단의 행군 움직임 등이 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7, 8월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7월 7일자 기록에는 서천포·청양·이인·보은 등지의 동학농민군들이 ‘사유창의(士儒倡義)’라는 제목의 녹명기(錄名記)를 마련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마련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밖에 ‘별보’는 태안의 세미를 육상궁(毓祥宮)의 하인에게 빼앗긴 사건에 대해 의정부에 보고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별감’은 충청감사 이헌영이 충청도 각 지역으로 보낸 효유문이나 전령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충청도 각지의 민회소(民會所), 유회소(儒會所)에 내린 감결 등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동학농민군은 물론 유생층의 움직임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여 유생들은 ‘훈신들이 구름처럼 모였다’라고 하면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헌영은 경솔한 거사라고 하면서 만류하기도 하였다.
특히 <금번집략>에 따르면, 7,8월 사실상 충청지역은 충청감영이 위치한 공주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동학농민군의 해방구나 다름 없었고 선무사 정경원이 제시한 집강안도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충청도 지역 중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왕성하였던 곳은 공주를 비롯해 이인, 부여, 임천, 연산, 정산, 서천, 보은, 영동 등지였다. 심지어 8월 1일에는 1만여 명이 공주 정안면 궁원에 모여 창의를 하였고, 다음 날에는 깃발을 앞세우고 총칼로 무장을 한 채 충청감영 안으로 들어왔어도 충청감사 이헌영이 제어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 7,8월 충청도에서의 동학농민군 위세를 엿볼 수 있다.
<금영래찰>은 ‘금영(충청감영)에 온 편지’란 뜻으로, 충청감사인 박제순과 개화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인 김윤식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기록물이다. 세 사람은 당시 친일개화파정부의 주역이었다.
충청감사 부임 당시 박제순은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25살인 1883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요직을 거쳐 1894년 6월에 전라감사에 발탁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전봉준과의 협상을 통해 집강소체제를 이끌어낸 전라감사 김학진이 유임됨에 따라 충청감사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젊은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에 다소 유화적이었던 전임 충청감사 이헌영과는 달리 동학농민군 진압에 더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8월 25일 충청감사 이헌영과의 임무 교대로 공주감영에 부임한 박제순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적극 나서는 한편, 중앙정계와도 적극 소통하였는데, 그가 바로 친일개화파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인 김윤식이었다. 이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시국을 논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책을 논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금영래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금영래찰>은 모두 2책 총 75면 분량이다. 크기는 33x23cm이고,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책에는 김홍집이 1894년 8월 2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대책을 지시하거나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제순은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답신을 간간이 보내기도 하였다.
2책에는 김윤식이 1894년 8월 1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담고 있다. 김윤식은 “동학도의 소요는 복심의 고통이므로 서양의 소요보다 심하다”고 말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적대하는 문구들이 많다.
김홍집의 편지에는 일반 대책을 알리기도 하고 당부를 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으나 김윤식의 편지에는 자신의 견해를 많이 드러내고 있어 대조를 보인다. 여러 내용 속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의 사건 전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의 동정과 외국 공관의 대책도 아울러 전해준다. 김윤식의 12월 14일자 마지막 편지에는 프랑스 선교사가 피해를 입었는데 2천원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배상할 것을 당부하는 등 기밀에 속하는 사실을 적고 있어 흥미롭다. 따라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전보를 이용하지 않고 개인 편지형식을 빌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은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일 뿐 아니라,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훗날 철저한 친일반민족자의 길을 걷는 박제순이 동학농민혁명에 어떠한 인식과 행위를 보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김양식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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