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할 때 산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탐방하고 지은 유람록은 약 70편, 시기별로 보면 후대에 갈수록 양이 많아진다. 이는 날로 치열해지는 계파 간 정쟁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이 지리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이 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람록이나 시편들을 보면, 자아에 대한 성찰은 물론 산이 가진 역사적 배경을 거울삼아 당대 사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산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문화·인문학적 의미를 통찰했던 것이다. 수많은 역사·문화 이야기를 품은 지리산은 이들에게 최고의 인문학적 수양관이었던 셈이다. 남명 조식 선생이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본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하동군 화개동 일대를 탐방했던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이 남긴 유람록의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진감선사대공탑비로 본 유·불 논쟁
△남효온(1454~1492) : 고운(최치원) 선생님. 쌍계사 앞에 광계(光啓) 3년(887) 7월에 세운 진감선사비명(국보 47호)이 있습니다. 이 비는 선생님이 교서를 받들어 비영을 짓고 글씨를 쓰고 전액한 것이 맞죠?
△최치원(857년~?) : 그렇다네.
△남효온 : 선사 혜소(慧昭)가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이 절을 세웠는데 그는 임금을 위해 기도하고 염불을 하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생님이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합니다. 선사는 문자선(文字禪·글을 통해서 선지를 깨닫는 것)을 한 사람이 아닐까요.
△김일손(1501~1572) : 동감합니다. 선생님의 손길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산수 사이에 노닐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명문이지만,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선생님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모시고 다니며 홀로 외로이 떠돌며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과 어울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치원 : 옥을 캐는 사람이 험준한 곤륜산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사람이 깊은 여룡의 동굴을 기피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그 빛이 오승(五乘·불교의 다섯 가지 가르침)을 융합하는 불타의 지혜로운 횃불과 그 맛이 육경(六經·여섯 가지 유교경전)에 배부른 선유의 아름다운 반찬을 얻게 되네. 그런데 배우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불타와 공자의 가르침은 유파가 다르고 본체가 상이하다.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각자 한쪽만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네.
청학동 찾다 도착한 불일암·불일폭포
△유몽인(1559~1623) : 남명(조식) 선생님. 세상 일이 힘들때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는다지요.(유몽인은 지리산을 찾기 2년전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내려왔다)
△조식(1501~1572) : 맞는 말이네. 앞서 많은 선인들이 청학동을 찾았지.
△유몽인 : 하지만 사람들이 청학동의 위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조식 : 내가 살던 시대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지. 자네보다 50년 전에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했네.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 했고 동쪽으로 가파른 향로봉, 서쪽으로는 낭떠러지에 우뚝 솟은 비로봉 사이로 청학 두세 마리가 날아다녔지. 이곳이 곧 청학동이었네.
△유몽인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가 있고, 벼랑에 완폭대(玩瀑臺)라 새겨진 불일폭포가 있었습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의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쯤 됐습니다. 우리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開成)의 박연폭포만한 것이 없는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장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긴 듯 합니다. 그 날의 기이한 구경은 참으로 평생 다시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조식 : 그렇지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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