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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역사문화 탐방기] 논개·황희정승의 기 받고 올까

   
▲ 논개영정까지 둘러보고, 돌아 나오기 위해 뒤를 돌면 논개 사당과 의암호, 그리고 장수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을 만나게 된다.
 

여행은 생각만해도 설레는 일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경험은 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 특히 꽃을 보기 위해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기 위해서 등 특별한 이유가 더해진다면 여행의 즐거움은 2배, 3배가 된다. 내가 본 풍경과 숨어있는 여기에 역사 속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여행이라면 의미도 보태진다. 용감한 기녀 논개 이야기와 장수의 자연과 맛을 한 번에 만나는 ‘장수문화역사문화 탐방로’가 주인공이다. 맛있는 이야기와 함께 사과랑 한우를 맛볼 수 있는 장수로 길을 나섰다.

 

△논개의 눈과 마주하다

 

우리는 평소 논개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을까? 왜군을 끌어안고 투신 순국한 의로운 기녀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논개는 당시 장수 현감 최경회의 부실이었고, 1593년 진주성 2차 전투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해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다. 당시 기생신분으로 인식됐던 상황 때문에 문헌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가 학자들에 의해 점차 바르게 기록됐다.

 

이곳 장수는 논개가 나고 자란 곳이다. 현재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는 복원된 논개의 생가를 비롯해 마을 전체가 전통민속 마을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논개 사당은 장수군민이 성금을 모아 지었다. 논개의 생일인 음력 9월3일에는 지금도 매년 제사를 지낸다. 논개 사당 안에 위치한 논개 영정은 지난 2008년에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2년에 걸쳐 새롭게 완성한 것이다. 의복과 체형 등 무척 까다로운 고증을 거쳤다고 한다. 특히 신기했던 것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논개의 눈과 마주한다는 점이다. 이는 일일이 점을 찍어 그림을 완성했기 때문이라고.

 

논개영정까지 둘러보고, 돌아 나오기 위해 뒤를 돌면 논개 사당과 의암호, 그리고 장수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의암호 주변에는 나무로 만든 산책로가 설치돼 걷기에도 좋은 곳이다.

 

△왜장도 비켜간 장수향교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 처음 지어졌다가 숙종 1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보존이 잘 돼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관돼 있던 서적 또한 귀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장수향교의 대성전은 전국 200여개 가운데 지어진 지 600년이 넘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282호로 지정됐다. 그냥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오래된 건물이었다. 특히 대성전의 현판은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하니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오래된 현판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또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대성전 앞에 깔려있던 박석이다. 박석은 주로 궁궐 건축에 사용되는 정원 바닥재다. 처음엔 박석의 존재를 몰랐다가 대성전에 습기가 생겨 흙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발견돼 현재까지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오래된 향교가 어떻게 잘 보존될 수 있었을까? 향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정충복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작은 비석에는 ‘충복 정경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경손은 정유재란 때 왜군이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하자 앞을 가로막고 침범하려거든 자신을 죽이고 가라며 강력하게 항거했다. 정경손의 기개에 탄복한 왜장이 결국 침범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정도면 비석을 세워 그 기개를 기릴만하다.

 

△장수의 인물, 황희 정승

 

방촌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는 넓은 마당 같았다. 이곳은 황희 정승의 호를 따 조성된 곳이다. 황희의 본관이 바로 장수다. 또한 장수로 유배 당한 적도 있다. 황희의 동상과 정자 한 동이 조금은 단출하게 세워져 있었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한 번 들러 우리 지역과 명재상의 인연을 살펴볼 있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하면 노하숲이다.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가득한 이 노하숲 역시 황희 정승과 관련있다. 그의 아버지 황군서가 장수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이 숲을 만들었다. 당시 황희 정승의 모친이 단봉산 자락에서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그 일대를 보호하는 숲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숲을 이루게 됐다. 이어 창계서원을 향한다. 창계서원 역시 1695년에 황희 정승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됐다 1958년 다시 복원됐다. 창계서원은 전국에 단 3곳만이 남아있는 황희 정승을 기리는 장소 중 하나다.

   
▲ 한다은 전북도 블로그 기자단

 

   

※한다은 씨는 예수대 간호학과를 졸업해 현재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도민블로그 단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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