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1월 9일 9시 15분 포크는 개화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노완 군수가 이끄는 병사와 군졸 나팔수들로 이루진 환송 행렬과 함께 용안을 떠나 익산으로 향했다. 눈이 일부 쌓이고 젖은 길을 지나 10시에 ‘걸망장’(Kuul mang chang)에 이르렀다. 이곳은 용안의 경계로서 호남읍지(1872년경)에서 ‘검망장(劍望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규장각 소장 ‘1872년 용안현지도‘에서는 ’금성시(錦城市)‘라는 명칭으로 나타나 있다.
△용안의 ‘걸망장’(함열 금성장터)을 지나며 친절한 주민들을 만나다.
걸망장이라는 말은 상인들이 등에 매고 다니는 걸망을 맨 등짐장수인 ‘부상(負질 부 商장사 상)’과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안고 다니는 ‘보상(褓포대기 보)’ 즉,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장터를 뜻하는 것으로 전한다. 이곳 걸망장은 ‘검성(劍城)’으로도 쓰였는 데 ‘금성(錦城)’으로 쓰이며 금성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원 위치는 현재의 함열여고옆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1년 11월 호남선철도(1914 완전 개통) 중 대전-함열까지가 먼저 개통되며 역이 위치한 함열읍 와리 지역으로 시장이 옮겨져 현재 함열중학교 밑이 아랫장터, 그 위는 윗 장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포크는 장터가 열렸던 이곳에서 책과 개고기를 팔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1884년 양력 11월 9일은 음력 9월 22일로 현재도 익산 함열 장날이 2, 7일 오일장으로 열리는 데 바로 포크가 9월 22일 장날 이곳을 지났던 것이다. 그리고 용안현감은 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포크를 소개하였고 포크는 친절한 사람들의 태도에 호감과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이같이 포크는 용안에서 현감의 환대와 길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외국인을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전라도에 대한 긍정적 인상과 우호적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같은 인상은 이후 전주를 방문하여 더욱 강해졌다.
한편, 포크는 타 지역에서 조선 사람들의 문자 해득력의 수준과 문자를 통한 정보전달의 실제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데 걸망장터에서 책이 판매되고 있었다는 기록은 그 같은 의구심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고 파악된다. 특히, 전주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이래 꾸준히 성장한 상업적 책 간행과 판매 상황을 직접 금성장터에서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 그 의미가 크다.
△미륵사지앞 주막에서 익산의 ‘길라잡이’를 만나다.
포크 일행은 춥고 질척해진 길을 지나 석불주막(석불사거리)을 지나고 12시 35분경 익산(현재 금마)에서 5리 떨어진 주막에 도착했다. 이곳은 바로 ‘구원점막(舊院店幕)’ 즉, ‘옛날 역원마을 주막’으로 현재 익산 미륵사지 앞에 있었던 주막이었다. 점막(店幕)은 ‘주막’으로 불리는 상인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사설 숙소를 가리킨다. 조선전기에는 조정에서 원(院)을 설치하여 숙박을 제공하였으나 조선후기 상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상인과 여행자가 증가하자 민간의 사설 숙박 장소인 점막이 증가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점막은 장시의 발달과 함께 교통로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大東輿志)>에는 일부 누락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996개의 원점(院店)이 확인된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읍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역원에 포자를 설치하고 주점을 두어 물자유통의 장소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점막이 상업유통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크는 자신을 기다리던 익산의 ‘길라잡이’를 이곳에서 만났다.
“(구원점막)에는 어제부터 나를 기다렸던, 빨간 겉옷을 입은 6명, 나팔수 2명, 악단 6명, 깃발을 든 소년 2명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뿌”하는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출발했다. 그리고 이어서 기이한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진기한 행렬을 길게 이루며 익산으로 향했다.“
이들 길라잡이는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으로 말의 어원은 지로나장(指路羅將)이다. 지로는 가리킬 지 指, 길 로 路로 길을 인도한다는 뜻으로 이 지로나장이 길나장으로 변하고 접미사 '-이'가 붙어 ‘길나장이’란 말이 생겼다. 나장은 군관(軍官) , 취수(吹手) 등과 함께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는 지로나장이 까치옷으로 단장하고 깃을 꽂고 앞에 선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포크는 이 같은 길라잡이와 나팔수들의 과잉 행동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다.
”호위대(길라잡이)는 앞서가며 길을 열고 서둘러 식사와 숙소를 준비한다. 서울을 출발하면서 이 절차는 시작됐다. 지방 관청에서 다음 관청으로 호위대를 보내라고 명령이 내려간다. 고위 인사가 여행할 때 진행되는 표준 관행이었다. ... 빨간 겉옷의 나팔수 두 명, 파랑과 흰색이 섞인 겉옷의 길라잡이 두 명, 그리고 아전 두 명이었다. 우선 그들은 길을 열기 위해 사람들을 언덕 위로 몰아내면서 나를 화나게 했다. ”
그러나 이후 경상도로 넘어갔을 때 너무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되자 이들의 행동을 묵인하게 되었다.
△눈덮인 용안-익산-삼례길에서 고대유적을 지나다
포크는 자신이 지난 익산길에 대해 “오늘 길과 들판 주변에서 비석처럼 다듬어진 오래되고 커다란 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고대의 유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라며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즉, ‘고대 유물’들이 이 공간에 많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포크가 지난 곳은 백제 최대의 석불이 남아있는 ‘석불사거리’를 지났고 익산의 길라잡이를 만난 곳이 세계유산 미륵사지 앞이었으며 익산에서 삼례로 올때 왕궁유적과 동서고도리 석인상들도 지났었다.
필자는 이 기록을 보며 함박눈이 수시로 내려 포크가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웠다. 만약 날씨만 좋았다면 고대 유적에 큰 관심이 많은 포크가 어쩌면 미륵사지탑이나 왕궁리 탑, 석불사 석불 등을 사진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귀중한 유적들의 원형이 더 잘 기록된 사진이 남겨졌을 텐 데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포크는 눈 내린 길을 지나 익산관아(현 금마면 사무소)로 진입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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