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이따금 가랑비로 내리는 날에, 전주 한옥마을의 유서 깊은 향교 앞길.
향교길 68 갤러리(관장 조미진)에서는 그간 환상적인 그림을 그려왔던 서혜연 작가를 초대해 "Welcome to my world(내 세상에 온걸 환영해)–서혜연-"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my(나의)와 world(세계)사이에 Fantastic(환상적인)이라는 단어가 하나 더 들어가도 좋을 뻔했다.
나서지도 않지만 물러서지도 않는 올곧은 성격의 조미진 관장과 천생 여인이지만, 이 지역 미술계에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는, 이젠 나이가 아니라 연세가 되었을 방부제 미인 서혜연 작가가 만난 것이다.
이 작가는 잘 연마된 인체 크로키 실력을 바탕으로 인물의 몸짓을 그리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섬세한 무늬의 헝겊을 정교하게 오려 붙이는 콜라주를 많이 이용해 환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었다. (헝겊을 이용하는 콜라주나 종이를 붙이는 빠피야 콜레 기법은 모두 처참했지만, 가치 있었던 미술 파괴 운동, 즉, 다다가 폭풍이 돼 지나간 직후에 발생한 초현실주의나 입체파에서 연유한 기법)
그래서 미술의 3대 요소인 그리기, 만들기, 꾸미기를 하나의 화면에 같이 시도하는 작업을 했었다.
시인 이상의 ‘거울’에 나오는 마지막 시 구절,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밖에 없으니 퍽 섭섭하오"처럼 거울에 비치는 본인의 연민을 연일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는 행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신작들은 콜라주를 이용한 기막힌 효과보다는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다 단순하게 그리기만으로 완성하고 있었으며, 즐겨 그리던 인간들마저 하나의 정물로 바라보려는 자세, 높은 경지 관조의 세계로 몰입해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도 하고싶은 말이 많은 것인지 그녀의 그림들은 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싶어 했다.
즉 많은 말을 하고싶지만, 말을 아끼는 거 같은 심정? 입맛으로 생각해 보면, 일관했던 단맛은 많이 줄고 그 자리를 쓴맛, 신맛, 매운맛 등 갖가지 오묘한 맛들로 채워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오히려 색채와 형태는 더 단조로워지고 있었다. 극렬한 배색에서 오는 화려함보다는 더욱 온화한 유사 색상의 배색 등으로 편안해지는 마음을 표현해서 화려함보다는 온화함을 강조하여 원숙한 나이가 되어감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었다.
어느 원로시인이 나이가 들어가니 당신의 시도 늙어가서 걱정이라더니 요즘은 나이 따라 늙어가는 글이 더 좋아졌단다. 딱 그 모양이다.
대저 늙은 시나 그림이 무엇이던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여유와 관용일 것이다. 거기에 연유해서 관조의 경지에도 도달할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 속의 나를 또다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소 작품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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