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이되 회화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손끝에서 나오는 붓질이 갑갑하기만 하다.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에너지이지만, 어떤 질서감을 갖고 있는 무엇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 꺼내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 놓는 것, 그게 내겐 '작업'이었다. 아니 차라리 '노동'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몇 년 전에 찾아낸 것이 나무판과 손도끼였다. 나무판을 거칠게 손도끼로 찍어냈다. 나무판은 순하게 도끼를 받아들여 골을 깊고 얕게 내기가 수월했으나, 섬세한 터치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내가 찾는 바였다. 깊은 골을 내면서 산골짜기로부터 산마루로 치달리는 터치들이 나와 주었던 것. 질서감을 갖고 달리는 거친 터치들을 그라인더로 다듬은 후, 바인더를 입혀 마감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깊은 코발트블루, 원색에 가까운 주황, 연두색 아크릴 물감을 칠하다 못해, 먹이다시피 했다.
도끼로 찍어내고, 쪼아내고, 그라인더로 다듬고, 바인더를 입혀 마감하고, 아크릴 물감을 먹이고…. 그러길 십 수 번 반복했다. 거친 '작업'이자 고된 '노동'이었다.
마지막 작업은, 스펀지에 프러시안 블루와 같은 짙은 색 물감을 묻혀 나뭇결의 볼록 부분에 스치듯 칠해나간 것이었다. 그러자 굽이치는 산줄기들이, 깎아지른 듯 암벽들이, 산에 내재된 골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물 중에는 정연한 질서 안에 거친 에너지를 가둬버린 것들이 아쉬웠다.
개중에는 질서 밖으로 팽팽하게 터져 나오려는 에너지들이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다음 전시를 기약해본다.
※ 서양화가 나종희씨는 용산참사·평택미군기지반대 등 사회적인 이슈들을 작업의 중심에 삼아왔으며, 최근 독도와 백두산 여행을 계기로 '산'작업에 손을 댔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고 동학 관련 유서가 깊은 김제 원평에 둥지를 틀고 작업을 하고 있다.
△나종희 제8회 개인전 '산 산 산'= 전주 서신갤러리에 이어 12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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