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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이되 회화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손끝에서 나오는 붓질이 갑갑하기만 하다.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에너지이지만, 어떤 질서감을 갖고 있는 무엇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 꺼내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 놓는 것, 그게 내겐 '작업'이었다. 아니 차라리 '노동'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몇 년 전에 찾아낸 것이 나무판과 손도끼였다. 나무판을 거칠게 손도끼로 찍어냈다. 나무판은 순하게 도끼를 받아들여 골을 깊고 얕게 내기가 수월했으나, 섬세한 터치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내가 찾는 바였다. 깊은 골을 내면서 산골짜기로부터 산마루로 치달리는 터치들이 나와 주었던 것. 질서감을 갖고 달리는 거친 터치들을 그라인더로 다듬은 후, 바인더를 입혀 마감을 했다. 그리고 그 위에 깊은 코발트블루, 원색에 가까운 주황, 연두색 아크릴 물감을 칠하다 못해, 먹이다시피 했다. 도끼로 찍어내고, 쪼아내고, 그라인더로 다듬고, 바인더를 입혀 마감하고, 아크릴 물감을 먹이고. 그러길 십 수 번 반복했다. 거친 '작업'이자 고된 '노동'이었다. 마지막 작업은, 스펀지에 프러시안 블루와 같은 짙은 색 물감을 묻혀 나뭇결의 볼록 부분에 스치듯 칠해나간 것이었다. 그러자 굽이치는 산줄기들이, 깎아지른 듯 암벽들이, 산에 내재된 골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결과물 중에는 정연한 질서 안에 거친 에너지를 가둬버린 것들이 아쉬웠다. 개중에는 질서 밖으로 팽팽하게 터져 나오려는 에너지들이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다음 전시를 기약해본다.※ 서양화가 나종희씨는 용산참사평택미군기지반대 등 사회적인 이슈들을 작업의 중심에 삼아왔으며, 최근 독도와 백두산 여행을 계기로 '산'작업에 손을 댔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고 동학 관련 유서가 깊은 김제 원평에 둥지를 틀고 작업을 하고 있다.△나종희 제8회 개인전 '산 산 산'= 전주 서신갤러리에 이어 12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설레었다. 6년만의 외출이니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에 뒤돌아보니 이 설렘의 근원이 따로 있었다.내가 딛고 서있는 이 땅의 숨결이 화폭으로 들어온 그 순간순간의 기억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왜 붓을 드는가. 나에게 그것은 세상과의 대화다. 때로는 번민하고 때로는 갈등하고 또 때로는 가슴 한껏 벌려 안고 싶었던 기쁨의 시간들에 대한 답례다.꽃이 되어, 나무가 되어, 바람이 되어 찾아왔던 그 대화들을 이제 세상에 내놓는다. 굳이 이름하자면, 대화의 화두는 이 땅, 전라도 풍경이다.이 땅 안의 모든 사물과 풍경과 사유의 흔적이 내 화폭 속에서 좀 더 생생하게 살아났으면 좋겠다. 하여 나의 이웃들이 아름다운 기억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묶어놓고 보니 흠결이 많다. 대화의 순간들이 더 촘촘히 엮어지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피곤한 일상에 작은 위안이라도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서양화가 소기호씨는 전주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1990년 장승그림전으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7번째 개인전이다. 전북미술대전 운영위원과 초대작가를 지냈다.△소기호 개인전=16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우리 동네에서 사라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대해 나는 알고 있는가? 나는 온전히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당연히 알고 있노라고 생각했던 그 대상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 물음에서 이번 전시는 출발한다.한옥마을은 나의 일상이다. 나는 그 인근에 살고 있다. 한옥마을을 가로지르는 태조로. 그 길을 수 없이 걸었고, 수없이 지나쳤다. 내가 그 길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까지 그곳은 그냥 다니던 길이었다. 그냥 길일 뿐 이었다. 내가 그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순간 길은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내 기억 속 어딘가에서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남아있질 않았다. 나는 슬펐다. 내가 그 길을 걸으며 살아왔단 말인가? 그건 마치 내게도 한 때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끔씩 망각하는 것과 비슷했다.길은 흔히 삶으로 비유된다. 그래서 거창하게 말하면 길을 통해 내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수많은 길 중에서도 태조로를 선택한 건, 딴에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전주를 상징하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길 위 어딘가에는 내 삶의 흔적도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105컷의 자연스런 사진을 찍고(표준 렌즈만 사용), 과학의 힘을 빌려 그 사진들을 한 장의 인화지에 담아 출력을 시도해봤다. 그러면 내가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며 내가 본 모든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단 한 컷에 담겨 나올 수 있다. 물론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처음 순수하게 사진 찍는 시간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105컷의 사진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합성하는 데도 1주일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그 한 컷을 얻고 싶었다. 사진의 크기는 세로 3.6m, 가로는 13m가 넘는다. 너무 커서 한 번에 출력이 불가능했다. 대형 인화지 9장으로 출력한 뒤 그 9장을 연결해서 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전시된 사진 작품으로는 가장 큰 크기일 것이다. 전시의 주제는 '태조로'다. 경기전이 아닌 태조로를 전면에 내세운 건, 경기전으로 지칭되는 한옥마을의 일부가 아닌 태조로로 상징되는 한옥마을 전체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태조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중요하지만, 그 태조로가 있게끔 한 존재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한다고 생각한다.*사진작가 김영구씨는 중등교원사진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전일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김영구 두번째 사진전 '태조로'= 15일까지 우진문화공간 전시실.
나는 꽃을 그린다. 줄기도 잎도 없이 무한한 공간에 떠있는 꽃을 그린다. 늘 좀 더 자유롭고 싶었고 잡념과 인연에서 벗어나 비어있는 상태로 내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번 전시 역시 이러한 나의 생각을 민들레 이미지와 불분명한 인생의 길을 통해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작품에서 보이는 민들레 이미지는 작가와 세상을 연결하는 소통의 언어로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꽃(민들레이미지)은 단순한 꽃이 아니다. 이것은 대중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위한 매개수단이며 자아를 찾아가는 작가자신의 대안체 이기도하다.작업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진실된 자아를 찾아가는 길고 긴 행보라고 생각한다. 진실과 거짓, 통제와 자유, 실체와 허상이 서로 뒤엉켜 구분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가장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장 이루고 싶은 미래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이 자리에 있는가?이러한 물음들의 답을 찾아 하루하루 시간을 쌓고 노력을 덮어 가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닥을 원료로 하는 장지를 사용하고, 분채와 석채를 이용하여 색을 표현하였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표면의 효과를 질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되도록 밑 작업을 한다. 이렇게 하면 호분위에는 연한색이 올라오고, 그사이 공간엔 진한색이 중첩되어 돌출과 함몰을 반복하면서 마치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마띠엘을 연출 하게 된다. 그 위에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넣게 되면 훨씬 강한 뉘앙스를 전달해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이러한 과정과 함께 이번 전시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자아의 형상을 민들레 이미지로 선택하여 표현 하였다. 민들레는 줄기를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극한의 여행을 통해 자유와 불안을 만끽하다가 어딘가에 안착하여 그 곳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어 버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언뜻 연약한 몸짓으로 보이나 실은 바람이 강하면 강 할수록 더욱 멀리까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가는 뜨거운 움직임이 내가 생각하는 나다운 그 무엇을 향해 나가는 감정과 상통함을 느끼게 한다.동양화가 김선강씨는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했으며, 92년 첫 개인전 이후 11번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김선강 11전째 개인전'여정(餘情)'=18일부터 29일까지 전북도청사 갤러리.
2001년 컴퓨터 작품들을 선보였던 첫 번째 개인전 때 원로작가 두 분이 오셔서 "이것이 뭐하는 짓이냐"며 호통을 치셨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시회장에 대신 나와 있었던 친구가 꾸지람을 듣게 되었고 민망해하면서 그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 후 본인에게 있어서 컴퓨터 활용은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을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그 일이 후 얼마 되지 않아 작품에서 컴퓨터를 활용한다는 것이 작가들과 관람자들의 인식 속에서도 붓과 물감처럼 자연스러운 재료가 되었다.처음엔 작품에 활용하기 위해서 익혔던 컴퓨터 응용프로그램들은 본인에게 있어서 작품에 활용도 보다는 사회적 생산 활동의 주체가 되었고 창조보다는 기술적인 활용도가 많아지게 되었다.이에 창조적인 활용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물감과 붓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감성의 이끌림에 따라 표현을 하고자 했다.이번 전시는 시간의 느낌이란 주제를 가지고 첫 번째 개인전 후 10년이란 시간적 의미를 부여하며 수채화를 활용한 작품들로 구성했다.꽃은 계절을 연상하게 하고 계절은 시간의 흐름을 말해준다고 생각되어 시간의 느낌이란 전시 주제의 매개로 꽃을 형상화하였다. 꽃에 대한 느낌을 부각하기 위해서 수채화를 선택하였고 수채화 표현에 있어서 흔히 사용되는 많은 수채화 표현기법을 배제하고 물감과 물의 농도로 표현함으로 진실한 접근성을 추구하고자 한다.서양화가 홍재희씨는 2010년 원광대에서 순수미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전북미술대전,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에 여러 차례 입선했으며, 2001년과 2004년 두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국제현대미술협회, 토색회, 노령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홍재희 개인전=18일부터 24일까지 전북예술회관 4전시실.
길 떠나는 이들의 필수품인 괴나리 봇짐에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장사를 하던 보부상에 이르기까지 옛 생활 주변에서 꼭 따라다니던 보따리. 어릴 때 책과 공책 양철필통을 돌돌 말아 허리에 두루고 냅다 필통 안에서 열필들이 달그락대던 책보. 장날이면 할머니가 참깨, 들깨, 개란꾸러미를 넣고 싸서 머리에 이고 나섰던 보따리 등등. 그 보따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소위 '하이칼라'라는 사람들이 보따리 대신에 가방이라는 것을 들고 나타나면서 가방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이제는 명품가방이 이슈인 시대가 됐다.보자기는 아무 곳에서나 스스럼없이 펼치고 그저 손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차근차근 얹어서 싸메고, 머리에 둥실 이고 다니던 물건, 그것이 '복을 싸는 것'이 아니라 '설움을 싸는 것'이었다고 할 지라도 예전의 우리네 사람들에게서는 없어서는 안될 생활필수품이며 삶의 정서였다. 이제 보자기는 혼례 때 예단을 담아 보내거나 명절에 선물 싸는 물건으로 그 명맥만 남아있다.이번 전시는 주변에 있는 이울 사람들의 질 보따리를 만들어 보았다. 이제는 보따리 하나에 챙길 물건도 없다고 애석해하는 내 가까운 이웃들의 평범하고 느린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옛 보자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만든 보자기 몇 점도 함께 전시된다.사진작가 김지연씨(63)는 2004년 진안 마령면에 들어왔다. '정미소 사진작가'로 알려진 그는 문 닫을 뻔한 정미소를 전시 공간'공동체박물관계남정미소'로 꾸렸다. 배고팠던 시절, 언제나 푸진 공간으로 기억됐던 정미소가 마을 공동체를 지켜가는 공간으로 남길 바라면서다.△보따리 전시회=20일부터 6월17일 공동체박물관계남정미소.
봄이 왔다. 전주 교동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어 일찍 나왔더니, 한옥마을 이쪽 저쪽에서 꽃방울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전주를 떠나 있으니, 그립다. 40년 넘게 전주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고향(고창) 보다도 전주가 더 내 고향 같다. 이번 개인전에는 그간 작업해둔 소장품들을 내놓게 됐다.돌이켜 보면 짧고도 긴 세월. 이 길을 걸어오면서 포기하고 또 시작하기를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면 나쁘게 말하면 팔자, 좋게 말하면 천직 아닐까 싶다. 그림은 내게 거친 삶을 가다듬고, 풍요로운 이상을 누리게 했다. 현대미술이 복잡하게 진화되고 있지만, 나는 고지식하게 우리 산하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논밭이나 야산 등 자연만을 담아왔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50여 년 넘게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던 것은 청전 이상범 교수 덕분이다. 스승은 "우리 그림에 우리 분위기와 우리 공기, 우리 뼛골이 배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스승이라 한다.나에게 그림은 심상의 언어이자 삶이다. 그래서 서양화의 구상주의나 추상주의, 한국화의 실경산수나 관념산수와 같은 개념의 틀이 거추장스럽다. 인간의 완성이나 예술의 완성이 있겠는가. 최선을 다하면서 가는데까지 가다가 끝나는 게 삶이고, 그게 예술이다. 한국화가 방의걸 선생은 홍익대 미술대와 전주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원로작가 초대전·단체전, 협회전, 초대전 등 100여 회에 참여했으며, 2003년 전남대에서 교수로 퇴직했다. △ 한국화가 방의걸 개인전 = 15일까지 전주교동아트센터.
35년 전 나만의 컬러풀한 넥타이와 스카프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특히 넥타이의 색상과 디자인이 남성복의 품위를 결정할 때가 많다. 여성들은 스카프 하나로 변화를 주면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보인다. 오랜 시간 회화 작업을 해오면서도 그 꿈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아 직접 염색도 해보고 그려보기도 하는 등 넥타이와 스카프 제작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흔치 않은 넥타이를, 스카프를 메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 획기적인 디지털시대를 맞게 됐다. 디지털 프로그램과 내 페인팅 작품을 접목해 넥타이와 스카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겨봤다. 이번 전시는 나의 회화작품에 담긴 혼이 실크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꾸며보았다. 그간 숱하게 색을 탐구해온 경험이 도움이 됐다. 다소 화려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라면 누구도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 넥타이와 스카프에 디지털 기법을 접목한 나의 실험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 궁금하다. 중견 서양화가 이강원씨는 자연과 물성(物性)의 의미에 스스로 물음을 던지며 다양한 표헌기법으로 치열한 실험을 멈추지 않는 작가로 평가 받는다. 홍익대 미술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7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심사위원과 전북미술대전 운영위원, 전북미술협회장을 지냈다.△이강원의 Silk Story전=4월8일까지 갤러리 정(군산시 수송동)
일 년 전, 나보다 수십 배는 될 것 같은 화판을 겁도 없이 내 화실에 들여 놓았다. 가로 7m50, 세로 2m. 두어 달은 애꿎은 화선지만 없앴다. 화지를 물에 흠뻑 적셔 그 위에 붓놀림을 시작했다. 내가 물이 되어 떨어진다는 생각으로. 떨어져 부서지고, 깨지더니 이내 튕겨 오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무서운 속도로 물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1000호 짜리 '물소리 보며 꽃웃음 듣네'를 내놓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2003년 가로 길이가 10m나 되는 대작을 그리고 나서 9년 만이다. "힘 달리기 전에 그려둬야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물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거꾸로 치솟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물소리를 상상하면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다소 식상한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환희를 물에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은 순리대로 나아간다. 거스름 없이 높고 낮은 곳을 탓하지 않고 유유히 흐른다. 폭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온갖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이유는 그런 겸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일러스트를 전공했다. 서양화도 해봤지만, 동양화에 더 끌려 먹 붓질로 전향했다. 아직도 그걸 후회한 적은 없다. 나의 호인 이목은 임섭수 경희대 겸임교수의 호인 '목원'과 방의걸 화백의 호인 '목정'의 목(木)을 빌려 '이목(以木)'으로 지었다. 스승의 큰 그늘이 나를 있게 만들었다. 11월 일본에서 물을 소재로 한 대작 위주로 전시 제안을 받았다. 마음을 늦추고 여백을 만들어야 하는데, 마음이 바빠진다. 내면에 많은 물소리가 오고 가고 있지만, 정말 맑은 물 소리, 바람 소리를 담아보고 싶다. 물이 나고, 내가 물인 그런 작품을 꿈꾼다.△ 한국화가 홍성녀씨는 동덕여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군산대 미술과 동양화를 전공했으며,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전북지부 부회장·전북아트페어 운영위원·한국미협 전북지부 여성분과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의 작품은 어찌 보면 '나의 이야기'다. 그래서 늘 가까이에 있는 지인들은 나의 작업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힘들어 한다. 왜냐하면 늘 내 이야기만 하니까! 예술가들은 수많은 '주의'를 남발하며, 형식을 확장하던 시대를 지나고 다시 형식의 해체와 거부를 통해 또 다른 확장을 시도하더니 이제는 정·반·합의 귀납적인 방법으로 동시대 예술을 만들어 놨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시대이며, 모든 이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어느 날 문득,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예술을 꿈꾸던 어린 미대생에게 찾아왔고, 그 질문은 이제 '나의 작업'에 중요한 방향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 방향이란, 예술가 송대규는 서로 다른 장르간의 충돌과 해체, 거침없는 실험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술의 형식보다 그 안에 무엇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나의 작업은 '실험'이다. 이 실험은 나에 대한 가능성의 실험이기도 하고, 예술의 형식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연예술가, 실험예술가, 퍼포먼스 아티스트, 미디어 아티스트 등등 시절과 작업의 방식에 따라 나를 표현하는 직함이 달랐다. 그래서 나의 작품은 물성을 가진 예술품이 없다. 실험이기 때문이다. 기록과 흔적만이 남아 작품을 판매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미래의 예술을 바라보는 나는 이렇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나의 작업은 '몸'의 확장이다. 개념주의와 플럭서스(Fluxus)의 '삶과 예술의 통합'의 정신은 '캔버스의 사각 틀'에서 예술을 바라보던 나에게 시간과 공간, 행위를 알게 해주었다. 나의 작품은 '내 안의 생각과 마음의 상태' 몸을 통해 실천되는 첫 움직임에서 시작되며, 갈무리된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몸'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무용, 연극, 마임, 퍼포먼스, 음악 등 몸의 언어가 함의된 모든 장르와 형식이 나의 작업에 있어서 재료가 된다.최근 나의 작업은 상호작용(Interaction)이 가능한 미디어를 재료로 다양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전자회로와 컴퓨터 언어를 배우면서 '전자공학도 예술이다'라고 말하고 다닌다. 소리와 몸짓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영상을 디자인하여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공연을 올리고, 전주 곳곳에 역사와 의미를 가진 장소를 캔버스 삼아 영상을 입혀 공간을 재해석하는 '미디어파사드'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작업은 전시장이 아닌 축제의 공간을 통해 발표될 때가 많다. 나의 작업은 몸에 대한 신뢰와 실험의 연속이다. 지난 2004년 지기들(민 원·장기덕)과 결성한 'Project NOM'를 통해 색다른 전시'Photo Essay 33'를 열고 있다. 서양화, 공예, 디자인을 전공한 이들은 학창시절부터 함께해온 십년지기. 서로 다른 3인이 렌즈로 투영한 33장의 작품을 공동 전시했다. △ Photo Essay 33 = 12일까지 전주교동아트스튜디오. 전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송씨는 홍익대를 졸업한 뒤 퍼포먼스 아티스트,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인터렉티브 30 Days' 대표를 맡고 있다.
'정말 이 길이 내 길일까?'작업을 하면서도 이런 의문이 종종 고개를 들었다. 삶 속에서 에너지가 바닥났을 땐 이런 생각이 더 심해졌다. 동시에 꼭 해보고 싶은 욕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2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다시 작업에 몰두하게 되면서, 이런 복잡한 생각이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개인전을 거듭될 때마다 "아! 난 이런 것을 하라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이게 나의 재능이구나."라고 느꼈다. 그게 40세를 넘겼을 무렵이다. 나의 작품은 조선의 민화에서 비롯됐다. 서민적이면서도 충분히 화려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됐다. 한지에 다양한 채색을 가미해 마치 언뜻 보면 서양화 같기도 하다. 현대적 감각에 맞는 조형성, 자연을 동경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성을 적절히 가미해 누구나 한국적 채색화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고 싶었다.9회 개인전부터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놓고 싶어졌다. 나를 사랑하고 꿈을 잃지 말라는 누군가의 기도 덕분에 이제 작업을 마친 뒤 다가오는 야릇한 쾌감이 참 좋다. 이제서야 나는 '어쩔 수 없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 김선강 열번째 개인전'어떤 흔들림' = 7일까지 서울 관훈동 K 갤러리.※ 동양화가 김선강씨는 전주 출생으로 홍익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11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에서 입선(한국화)했고 '대한민국 회화대전'에서 특선(한국화2007~2011)한 바 있다.
섬진강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92년으로 기억된다. 80년대엔 인권운동을 하며 늘 사람들 틈에서 부대꼈다. 그러다 임실의 진메마을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골에 살며 등하굣길에 거의 매일 들꽃을 봐오긴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풀이름, 꽃이름을 다 잊어버리고 살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산 저산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을 쏘다녔다. 그 산수가 말하는 언어들을 크고 작은 한지 위에 옮겨 놓는 게 첫 작업이었다. 고요한 섬진강에서 처음엔 물의 표면만 보았고, 그 다음엔 물의 깊이가 보였다가, 나중엔 강물 속 힘 센 물살이 보였다. 자연이 주는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어느 날, 좁은 마당에서 시선을 잡아두는 게 있었다. 작업실의 화장실 모퉁이에서다. 몇 년인가를 무심히 지나쳤던 닭의 장풀이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얼마 동안을 바라봤는지 다리가 결려서 되돌아왔다. 섬진강변에 그 많은 들꽃들이 얼마나 외면당하고 짓밟히고 있었는지. 심지어 국책사업이라면서 대형 기계를 동원해 까부수고 파헤치면서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작은 것에 대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면서 들꽃을 찾아 나섰다. 아무렇게나 피어난 듯 보이는 들꽃을 보면 볼수록 그 속엔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 복수초와 민들레, 닭의 장풀, 가시연꽃 등을 발로 지근지근 밟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 예뻤다. 소외된 자들과 들꽃은 어쩜 그리 비슷한지, 사람살이와 아주 닮았다.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자세와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걸 새로 배우게 됐다.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한 동양철학 공부로 인해 삶의 의미도 더 고민하게 됐다. 통치하고 다스림이 없는, 평등하면서도 자유로운 자연의 이치에 더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이유다. △ 송만규 개인전'섬진강, 들꽃으로 피어나다' = 2월6일까지 광주 갤러리 생각상자. 동양화가 송만규씨는 완주 출생으로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장, 전국민족미술인협의회 중앙위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지회장 등을 지냈다. 2002년부터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작품은 작가의 또다른 분신이다. 새로운 연재물 '작가가 말하는 나의 작업'은 작가들이 직접 자신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자리다. 때로는 거칠더라도 여타의 설명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한다.사진은 200년이 흐른 지금도 불완전한 예술이다. 사진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영화는 문학을 발판으로 '제7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이 되었다. 그렇다면 사진은 회화를 기본으로 하여 예술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진의 본질적 특성인 주관적 관념에서 바라보는 예술이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사진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자 했던 많은 사진가들은 포기하거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사진이 완전한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시각화된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진의 단점이자 사진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장점이다.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예술의 영역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사진은 집요하게 예술을 내부적으로 붕괴시키고 침식시키면서 예술의 근본을 전복시켰다. 그래서 사진은 예술에 있어서 위험한 것이다. (도미니크 바케)사진은 사진을 감상하지 않는다. 사진을 보며 그 사진속에서 자신을 투영하여 추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보기 때문이다.발터 벤야민, 앙드레 바쟁,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사진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불안정한 요소를 가진 예술이고 그래서 나는 사진이 너무 매력적이다.그리고 궁금증이 생겼다. 사진의 본질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극히 시각적인 감각기관에만 의존하는 사진이 가지는 특성으로 인해 표현에 부족함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만약 사진이 인간의 다른 감각기관을 자극시킬 수 있고 시각과 함께 표현될 수 있다면 사진의 불안함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진은 시각적 감각을 강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감각기관이 공존하게 되면 시각적 사진에 방해를 주거나 다른 감각이 무시되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난다.청각이나 후각 등등을 시각과 공존시킬 수 없다면 시각만으로 다른 감각기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업에서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코드를 찾고자 했지만 결국 나는 나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표현하였다.사진은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으로 보는 것이기 이전에 사진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과 기억으로 만들어 낸다.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각의 기억, 후각의 기억, 청각의 기억, 미각의 기억, 촉각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의 기억을 찍었다.△박성민씨 '오감 프로젝트'= 9일부터 20일까지 전북도청사 기획전시실. 작가 박씨는 전북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3차례 개인전을 갖는 등 11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사진 전문 전시공간 '갤러리 봄'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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