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토지'는 최참판 일가의 몰락 과정을 통해 격랑의 근현대사를 보여준다. 비록 소설이지만 한 가족의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의 모습이 직간접적으로 묻어날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사람과 사람이 모여 역사라고 부르는 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미술가 조해준씨(41)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를 담담히 풀어내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환기한다.
"우리가 과거를 눈여겨보는 것은 잊혀진 사람들의 삶과 어떤 사건에 대한 반추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당시 사회의 여러 기제를 통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여기 이곳의 역사를 재인식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는 우연히 접한 당숙(堂叔) 조일환의 이야기를 다룬 '뜻밖의 개인사'로 주목을 받았다. 다큐멘터리 드로잉이라 불리는 이 시리즈는 당숙의 유서와 가족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삶을 발굴하고 가족사적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뜻밖의 개인사'에서는 일제강점기에서 총독부 조사원과 동사무소 보조원으로 일하다 광복 후 친구의 해명으로 겨우 화를 면하고, 이후 토지 행정청의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6.25 전쟁을 맞아 인민위원회의 출근 명령을 받고 근무하다 다시 국군의 진주로 공산당으로 몰려 목숨을 잃을 뻔 한 일 등 사회·역사적 기억과 맞물려 한 개인의 기억 속에 오롯이 살아있는 역사의 순간들을 기록했다.
"뜻밖이란 결국 공동체와 개인,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방식이 언제나 뜻밖이라는 때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연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이 뜻밖일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은 공동체와 개인, 역사와 개인사 사이의 균열이 없다고 생각할 때만 뜻밖이다. 그러한 균열 자체가 공동체와 개인사를 이어주는 소슬하고 질긴 다리다."
그는 우연히 접한 '뜻밖의 개인사'를 근현대사에 있었던 '모두의 개인사'로 확장하면서 흥미로운 작업 방식을 선택한다. 바로 아버지(조동환)와 공동으로 모든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 그가 기획과 글을 맡고 미술교사 출신인 아버지가 그림을 그린다. 이런 행위는 흥미롭지만 역설적이다. 말이 없던 아버지와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그가 '가족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가는 행위가 말이다.
그래서 일까.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선정돼 오는 19일부터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 2013展'에는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낙선작'에 담긴 이야기는 그가 아버지와 공동 작업을 선택했던 이유를 말해준다. 아버지는 1960년부터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국전(현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도전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은 계속된 낙방 뿐. 결국 그는 화가로서 삶을 포기하고 미술교사로 일하게 된다. 수십 년이 흐른 지난 2007년. 공동 작업을 하며 다시 미술가의 삶을 시작한 아버지는 그간 숨겨왔던 이 이야기를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당시 입상하지 못했던 '낙선작'에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그림에 붙인다. 그간 공동 작업에서 그림을 담당했던 그가 직접 글을 작성한 의미 있는 변화다.
이처럼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을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수 십장의 액자를 붙여서 책처럼 넘길 수 있게 하거나 가판 신문대처럼 생긴 판에 드로잉들을 옮기기도 하고 벽면에 만화처럼 화면분할을 해서 부착하기도 한다. 드로잉과 텍스트를 분리하기도 하고 인용된 실물 오브제들을 병렬해서 설치하기도 하며, 때로 다큐멘터리 드로잉 전체가 상자 안에 담겨져 장소를 이동할 수 있는 옛날 방물장수의 이야기 가방처럼 변모하기도 한다.
"내 작업은 생애 기억의 상호 연대적 소통 작업이면서 각기 다른 관점을 통해 재구성된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마치 기억이 망각이라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게 부표라도 만들고 끊어진 그물을 다시 엮어보려는 것이다."
원광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전문사를 졸업한 뒤 독일 뉘른베르크 쿤스트 아카데미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해외작가 레지던시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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