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 화폭에 / 익숙한 일상 낯설게 표현 / 오늘부터 서울서 개인전
지난 5일 열네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방문한 서양화가 이일순(42)의 작업실. 아기자기한 공간에 있는 그림들은 동화적이면서도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소녀와 같은 말투와 행동에서 느껴지는 그의 첫인상과는 대조적이다. 때론 쓸쓸하고 때론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담긴 캔버스를 보며 성숙한 아이가 그린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함과 낯설음, 실제와 환영이 작품 속 이미지에 공존하는 역설적인 상황만큼이나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어릴 적 친구 아버지가 외국 출장을 많이 다녔어요. 그래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접할 기회가 많았죠. 만화에 나타난 코발트빛 바다, 푸른 초원 등에 매료됐고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8살 아이 '해리'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거나 이에 도전을 받게 되면 어김없이 "빵꾸똥꾸야"라고 외치며 화를 낸다.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되는 어린 아이가 아닐뿐더러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어른 못지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동화는 어린이들의 이런 욕망을 제거한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하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일순도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어린 시절 강하게 열망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던 열망을 담은 피아노, 마트로시카 인형 등의 오브제가 여기저기에 출현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자신이나 주변인들이 처한 힘든 상황에 휴식을 주고 나아가 치유를 염원한다. 이런 치유를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끝내 이루지 못했던 기억 속 오브제를 캔버스로 소환한 것이다.
"현실이 주는 각박함을 벗어나 동심의 기억으로 돌아가고픈 욕망과 함께, 이루지 못했던 어릴 적 꿈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 그림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는 데페이즈망기법(depaysement 초현실주의)을 통해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이 낯설게 느껴지도록 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요소들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며 친숙함 속에서 이질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배경처리를 단순화해 오브제에 집중케 한 결과다. 그러면서 그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낯설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형태로 표현했다.
보이는 이미지가 전부가 아닌 함축된 이미지를 통해 보는 이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는 것. 작품 속에서 보여 지는 숲속의 의자, 잔잔한 잔디, 구름, 첼로의 음악소리, 급한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우산 등과 같은 이미지들은 마치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편안한 휴식처를 찾아다니는 듯하다.
"사람들이 좋은 쪽으로만 기억하려고하는 습성이 있어요. 하지만 그 이면에 개인의 욕망이나 욕구는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기억들을 꺼내 함께 공유하고 치유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는 7~12일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는 이상적인 휴식처를 "꿈과 현실의 경계 어디쯤…"이라고 표현했다. 현실의 각박함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린 시절 기억을 환기하며 '현실의 결핍'과 '과거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북대 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4회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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