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 속 불안…벗어나고 싶은 욕망 표현 / 반복적 덧칠 기법 통해 '치유의 길' 모색
궁금했다. 얼굴 없는 마네킹에 입혀진 웨딩드레스, 날카롭게 잘린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 이런 소재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명한 피. 섬뜩하면서도 기괴한 그림을 그리는 이가 말이다. 하지만 의외였다. 가냘픈 체구, 여려 보이는 얼굴과 조용한 말투. 서양화가 양순실씨(44)의 첫인상은 그가 그려왔던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도 이처럼 실제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양순실은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여성의 억압에 대한 아픔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여성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억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페미니즘으로만 그의 작품 세계를 단정 짓기 어려운 이유다.
"행복과 불안함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니지만 사람들을 행복 쪽에 무게를 두고 고단한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그렇지만 삶의 불안한 단면을 드러내 자신을 치유하는 게 내 작업방식이다."
그의 불안함은 어릴 시절 '원형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 여자로서 그리고 막내로서 사회적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는 이런 억압에 대해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어왔고 이런 갈등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계속된다. 하지만 내적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행복한 모습을 억지로 연출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 환경을 몇 가지 흥미로운 소재를 사용해 은유적으로 화폭에 담았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거리가 있다. 안락함을 상징하는 집, 소파, 침대, 웨딩드레스 등은 날카로운 칼로 베여 피를 흘리고 있다. 또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새는 이런 안락한 소재들을 공격해 피를 흘리게 한다. 그의 그림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인데 모두 등을 돌린 소녀의 모습이다. 이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욕망을 담은 것.
그는 "평온함을 주는 소재들이 내가 처한 환경이기도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오는 억압 또한 존재한다. 이런 상처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표현된 것이고 새는 이런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로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크릴 물감을 여러 차례 덧발라 파스텔 색조의 서정적인 색감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그림은 서정적이지 않다. 어쩌면 그가 처한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역설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감을 수차례 덧칠하는 것도 억압에 대한 분출을 표현하지만 이런 억압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침전시키는 행위의 하나다.
"흔히 양순실의 그림을 프리다 칼로와 닮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프리다 칼로처럼 자신의 정체를 공격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드러냈다면 양순실은 그리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폐쇄적이고 모호하다. 그가 화폭에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그에게 가해진 억압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부드러운 색감과 곡선으로 위장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이정훈(전북대 국문학과 출강)의 말처럼 그는 아직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해 관찰하고 관조하려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동안 골방과도 같던 작업실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억압과 페미니즘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전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98년 첫 개인전 이후 6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지난해 전주우진문화공간의 청년작가초대전에 초대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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