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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불교문화 - 곳곳에 수많은 명승고찰…국보·보물급 문화재 가득

▲ 단일 사찰로는 문화재급 보물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진 남원 실상사.

지리산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사방팔방으로 펼쳐놓은 계곡 곳곳에 수많은 명승고찰을 품고 있다. 실제로 남원시 인월을 지나 경남 함양 쪽으로 가다보면 국보 제10호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 천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백장암'이 나온다. 백장암을 지나면 실상사가 나오고 함양 땅으로 들어서면 안국사, 영원사, 벽송사 등 유명 사찰들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잇따라 나타난다. 이들 표지판 중간 중간에 반야정사, 용문사, 견불사, 화림사 등 각 종파의 절과 암자들이 안내된다. 지리산의 불교사찰은 하동 41개, 산청 47개, 함양 12개, 구례 21개, 남원 29개 등 150개에 달하고 있다.

 

△지리산 지명에 깃든 불교

 

지리산(智異山)이란 산 이름 자체가 불교와 관련이 있다. 불교 전래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지리산은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도량'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연스럽게 많은 절과 암자가 들어섰고, '특이하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산'이라는 뜻인 '지리산(智異山)'이 산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또 지리산 봉우리 가운데 제석봉과 반야봉은 불교 문화가 그대로 깃든 대표적 사례다. 실상사 응묵스님은 "반야봉의 '반야'는 불교에서 '지혜'를 뜻한다. 깨달음의 봉우리, 지혜의 봉우리가 바로 반야봉이고, 또 성불로 가는 지름길이 반야봉이라는 의미가 그 이름에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천왕봉 아래 제석봉은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불교의 하늘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불교식 이름이다.

 

△전래 초기부터 지리산에 깃들다

 

한반도에 불교가 맨 처음 상륙한 곳은 고구려(372년, 소수림왕 2년)였고, 12년 후 백제(384년, 침류왕 1년) 왕실도 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신라는 527년 이차돈이 순교한 뒤에야 국교로 공인했다.

 

지리산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전래 초기인 삼국시대다.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 지리산의 천년 고찰들 중에서 구례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조사가 세웠다. 연기조사는 또 산청 법계사를 신라 진흥왕 때인 544년에 열었다. 하동의 쌍계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1년인 722년에 대비·삼법 두 스님이 세웠고, 남원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가람이다.

 

불교가 들어온 초창기부터 산세가 크고 풍광이 수려한 지리산은 스님들의 수행 정진과 불법을 전하는 가람으로서 매력적인 공간이었던 셈이다. 특히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도량이라는 유명세를 타면서 수많은 사찰들이 속속 들어섰고, 잦은 화재와 전란 속에서도 중창을 거듭하며 뿌리를 이어왔다.

 

△보물 덩어리

 

명산은 큰스님들이 알아보았다. 일찍이 부휴선수, 청허휴정, 벽암각성, 소요태능, 벽송지엄 등 당대의 고승들이 지리산 유명 사찰들에서 수행하고, 불교의 명맥을 이어왔다. 근래에는 성철스님과 향곡스님 등이 산청 영원사, 상무주암 등에서 수행했다. 깊은 산,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뛰어난 스님들이 있었기에 지리산은 천년 불교 문화를 이어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리산의 천년고찰에는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천혜의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은 천년 넘게 이어져 오는 동안 건축 양식과 건축기술, 회화, 조각, 주물, 단청은 물론 불교음악 범패까지 고스란히 전승해 왔다.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시대를 거치며 전쟁 등 재앙이 되풀이 됐지만, 지리산의 사찰들은 폐허의 아픔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서곤 했다.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고승들의 탁월한 지도력, 그리고 신도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남원 실상사는 단일 사찰로는 문화재급 보물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이고,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실상사 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 등 사찰 내 대부분이 문화재나 다름없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30년대에 중수된 화엄사는 국보 제67호 각황전,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 국보 제301호 영산회괘불탱을 비롯해 동·서오층석탑, 대웅전 등 수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산청 내원사에는 우리나라 현존 비로자나불 가운데 가장 오래 됐다는 석조비로자나불(보물1021호)이 있다.

 

△다양한 문화유산

 

지리산에서는 선교양종이 고루 발전해 왔다. 실상사가 구산선문을 처음 받아 들여 선종을 발전시켰고, 화엄사는 장육전(옛 각황전)에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 화엄경을 새긴 석판)을 봉안할 만큼 경전을 중시했다. 쌍계사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널리 대중화했다.

 

지리산의 사찰에는 명필들의 글씨도 많다. 쌍계사 진감선사의 탑비(국보 제47호)는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천은사 일주문 현판인 '지리산 천은사' 글씨는 조선 4대 명필 중 한사람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수체이고, 천은사 보제루는 이광사의 제자 창암 이삼만이 썼다. 화엄사 일주문의 '지리산화엄사' 현판은 선조의 아들 의창군이 1636년에 썼고, 화엄사 각황전 현판은 형조참판 이진휴가 썼다. 근래엔 실상사 천왕문 현판을 여산 권갑석이 쓰는 등 당대의 명필들의 글씨가 사찰마다 즐비하다.

 

지리산 불교유적에는 차 문화도 깃들어 있다. 828년(신라 흥덕왕 3)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와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 바로 쌍계사 주변이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차 시배지 기념비가 있지만,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 일대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차 문화는 수행처인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사찰을 중심으로 종이와 목공예 등 생활문화도 발달했다. 지리산의 스님들은 전란으로 사찰이 불타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전란이 일어나면 승병으로 참전, 호국불교 정신을 이어 왔다.

관련기사 실상사에서 만난 응묵스님 "지리산 불교는 새 패러다임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있어"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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