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말해 주듯
애환서린
위대한 외벽
너를 향한 기억
천 년을 살고
또
살아도
아득하게 남아있을
그대
- '돌섬'에서
오늘도 성난 하늘을 오르다
눈뜨지 않는 외딴 섬으로
굽이치며 돌아가나니
우주 가득 펼쳐진
넓디 넓은 네 품안에서
한 번쯤 힘껏 붙들고
퍼렇게 목놓아 울어버린
너 동해 바다여
- '동해'에서
한 시인의 정조(mood)를 파악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의 시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 배경, 그리고 시상의 추이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시에 있어서의 배경은 한 시인의 성격과 신분, 그리고 심리적 상태가 머물러 있는 정서적 거점으로서 그 시의 정조를 추출해 낼 수 있는 주요 단서들이다. 위 두 편의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서 있는 공간은 외진 바닷가의 '돌섬'과 '외 딴 섬'이다. 그것도 먼 바다를 천년을 하루같이 바라보면서 '너를 향한 그리움의 뒷모습'만으로 서서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한 한(恨)으로 서 있는 '외딴 섬' 이다.
이처럼 대상과의 단절과 소통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정서는 이후 여러 편의 시에서 어둠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화자의 목소리가 한결같이 어둡고 우울하고 슬프다. 대상과의 단절에서 오는 상실과 소외의 그리움이 심화되어 있다. 님을 찾아 '산사', '골짜기', '벼랑 끝', '하늘 끝'과 같이 외지고 막다른 적막 공간에서 배회하고 있다. 체념, 어둠, 불면(不眠)의 몸부림으로 그의 목은 굽어져 있고, 목소리는 노을빛으로 공허하게 하늘 끝에 메아리 치고 있을 뿐이다.
허구헌 날
세월의 풍랑에 부대끼면서
외로움도 우울함도 아우성도
운해로 삼켜버리고
아픈 몸부림으로 순결한 위엄을
빛깔 진하게 간직 하련다
- '지리산'에서
「지리산」은 최근 그가 안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외로움도 우울함도 아우성'도 모두 삼켜버리고 서 있는 지리산. 대상과 내가 맞서 있는 게 아니라 만상을 포근하게 잠재우고 감싸주는 운해처럼 서로가 하나로 화해되어 공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다짐을 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순결'과 '위엄'을 결코 잃지 않겠다는 다짐. 그것도 그냥 순결과 위엄이 아니라 '빛깔 진한' '순결과 위엄이니,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꿋꿋하게 설 수 있는 유 시인만의 오만한 자존과 향기를 독자적으로 이미 확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문학을 위해 문학을 하는 게 아니고 종교를 위해 문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삶, 그 자체를 윤택하게 하기 위한 생활문학(Art for life)으로서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구축해가고 있는 성실한 한 여류 시인의 모습을 본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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