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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죽음 그 이후 2

조선 왕릉 (사진 출처 =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조선 왕릉 (사진 출처 =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죽은 자의 치아를 묻는 것이 치총이다. 이때 어디서 비명횡사하여 시신을 못 찾을 때 집에 보관된 이를 묻으면 쉽겠으나 없는 경우가 많다. 배비장전에 나오듯이 당시에는 정분을 약속하는 의미로 이를 빼주는 풍습이 있어서 집을 나간 양반의 시신을 못 찾을 때는 평소 정분을 나누던 기생에게 찾아가 치아를 사서 묻었던 것이 치총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유행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에 의하면 이 하나에 쌀 두 섬까지도 받았다 한다. 그 당시에는 임플란트도 없었을 텐데 당시의 바람꾼들은 이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실소가 나온다. 발총은 고인의 머리카락 같은 것을 묻는 것이다. 지금도 군부대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손톱이나 발톱을 깎아 놓고 나가는 훈련도 있다. 훈련 시 혹시 시신을 못 찾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다. 여인의 경우에는 육신이 없을 때 집에 남아있던 치마를 매장한 치마무덤의 기록도 있다.

묘제에는 일반적인 것으로 땅에 묻는 토장, 물속에 넣어버리는 수장, 지상에 시신을 노출시켜 썩게 하거나 짐승의 먹이로 주는 풍장, 요즘 대세인 불에 태우는 화장이 있으나 화장과 매장을 다 이용하는 방식도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에 단 하나뿐인 해중릉도 있다. 이 해중릉은 신라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뜻으로 묻힌 무덤( 사적 제158호)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에 있다. 아프리카의 어느 바닷가 부족은 남아 있는 자손들이 풍요로운 먹이를 취하게 하기 위하여 바다에 시신을 버린다. 토장이나 매장은 인류 사회에서만 있는 것으로 결국 시신의 연부는 썩히고 뼈는 보존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분묘에는 피라미드와 마스터파, 그리고 왕릉으로 대변되는 무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영혼은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간다’는 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왕릉이 축조된 위치는 대개 산을 등지고 냇물이 흐르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당시의 생업이 농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덤은 그 크기의 차이에 따른 권력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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