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딴은 내 마음에 꽂혀서 자주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집 근처 건지산에 있다. 대개 나는 호성동에서 대지 마을을 지나 편백나무 숲을 통과하는 길을 걷곤 한다. 그런데 올봄부터는 곧바로 대지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 산비탈 길을 낚아채듯 뛰어오른다. 한 마리 야생 어린 고라니가 되는 순간이다.
그 오솔길엔 아름드리 참나무가 있고 밤나무가 있고 진달래와 등골나물 그리고 덜꿩나무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그 길을 좋아한다. 약간의 비탈을 조금 오르면 단단한 수피를 자랑하는 참나무가 길가에 서 있다. 이 나무는 언제나 푸른 하늘을 떠받드는 결의에 차 있다. 내가 몇 번이나 몰래 껴안아본 나무다. 그 참나무를 지나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무덤들이 보인다. 이 무덤들 사이로 난 길에서 가끔 청설모가 먹다 떨어뜨린 풋 잣송이에 놀랄 때가 있다. 청설모는 떨어진 잣송이를 줍기 위해 다다다다 내려온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다시 그걸 천진스럽게 끌안고 나무에 오른다.
나는 또 진달래꽃이 한창 피어나던 4월 어느 날, 이 길에서 무덤 상석에 앉아 하모니카로 동요를 부는 어떤 노인을 만났다. 동요는 윤극영이 짓고 곡을 붙인 ‘반달’이었다. 저녁 무렵에 듣는 그 곡은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묻지 못했다. 이즘엔 그 상석에 꽃 한 다발과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푸르스름한 막걸리 병은 뚜껑이 닫힌 채였다. 반이 좀 못 남아 있었다.
그 길에 요즘 싸리 꽃이 피어 있다. 싸리 꽃 향에서 보랏빛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금 오른손에 나무 지팡이 하나 들고 걷고 있다. 사실 나에겐 몇 개의 지팡이가 있다. 이 지팡이는 그중 하나다. 산책길에 하나씩 모은 게 벌써 대여섯 개는 된다. 나에겐 지팡이를 보관하는 수장고도 따로 있다. 바로 산 입구에 있는 조팝나무 수장고다. 여느 박물관 수장고가 부럽지 않다. 옆에 아카시아 나무도 있어 안성맞춤이다. 여간해선 비에 젖지도 않는다. 나만 아는 이곳에 지팡이를 꽂아놓는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가는 게 나는 즐겁다. 오래 사귄 동무 같은 느낌이다. 아직 지팡이가 필요한 나이는 아니지만, 내가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오르는 건 안데르센이 가방 속에 늘 밧줄을 넣어가지고 다닌 것과 어떤 면에선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해본다.
나는 관목 덤불 사이 길을 오르락내리락 걷는다. 이내 나의 목적지에 이른다. 산의 규모에 비해서 이곳은 가파른 편이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비탈길 위에 나의 산방(山房)이 있다. 지상으로 구불퉁 뻗어 나온 소나무 뿌리를 테두리 삼아 그 안에 손바닥만 한 돌을 끼워 놓은 것이다. 그 위에 앉으면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위태하다. 나는 하필 호젓함과는 거리가 먼 그곳을 나의 산방으로 정했는지 나 스스로 의아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곳이 나는 좋다. 집에서 한 시간 안에 올 수 있는 데다 오가는 사람들이 뜸해서 혼자 있기에 방해받지 않아서 좋다. 나는 그곳에 엉거주춤 앉아 책을 보거나 짧은 글을 쓴다. 주위엔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가 많다. 그래서 청설모와 어치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5월 초에는 운 좋게 꾀꼬리를 보기도 했다. 더구나 그 비탈 아래엔 애기나리 꽃밭이 있다. 이 애기나리 꽃밭을 처음 발견한 것은 4월 말이다. 우연히 이 길을 지나다 아주 작은 연녹색의 꽃이 내 눈에 번쩍 띈 것이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한 꽃이었다. 나는 이 앙증맞은 꽃에 금방 매료되었다. 이 야생 꽃밭은 이십여 평 정도 될까. 하지만 내 눈에 이십만 평 정도 되어 보인다. 나는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이 애기나리 꽃밭에 가서 인사를 한다. 새침한 듯 보이는 주름진 잘록한 잎에 마음이 간다. 마음이 가니 몸이 가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미 꽃은 졌지만 순순한 기운에 절로 마음도 평온해진다.
나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기에 앞서 무슨 신성한 의식처럼 애기나리 꽃밭 옆 참나무에게 가서 고독한 곰처럼 등을 쳐댄다. 처음엔 그 횟수를 셌으나 이젠 개의치 않고 등을 쳐댄다. 전신에 퍼지는 찌르르한 쾌감 속에서 나는 참나무와의 일체를 꿈꾼다. 하기사 참나무가 나 같은 인간을 거들떠나 볼 것인가. 그래도 등을 빨래처럼 쳐대고 나면 뭔가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예의 그 자리에 앉는다. 특히 저녁 무렵엔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은 이 길 말고 정상의 능선을 더 좋아한다. 그곳엔 산불 감시초소가 오두막처럼 단출하게 서 있다. 간혹 혼자 산책하는 아주머니가 비탈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옆길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조금은 쓸쓸한 풍경이다.
나는 돌 위에 엉덩이를 바짝 비집고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고 꿈꾸는 게 좋다. 책을 읽고 욕심 없이 끄적거리는 게 좋다. 그 돌 의자에 앉으면 익히 내가 보아온 사물도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 공간은 내게 사물을 보는 새로운 각도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다. 사선의 난간에서 바라보는 나무와 돌과 하늘은 비트겐슈타인의 ‘코 위에 걸린 안경’을 벗어던지는 것만큼이나 내겐 하나하나 새로 눈뜨는 존재다. 그러니 이곳은 나만이 아는 근사한 산방이고 도서관이고 작업실이다.
얼마 전, 이 길에 내 나름의 이름을 붙였다. 내겐 오래전부터 주거지를 옮기면 제일 먼저 그 동네 산책길부터 찾아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길에 나의 마음을 담은 이름을 붙인다. 서울에 살 때도 시골 밤골에 살 때도 나는 산책길을 정해 이름을 붙였다. 이번에 나는 이 길을 ‘천추(天樞)의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내가 이름 붙인 길 중 네 번째이다.
장자에 나오는 천균(天鈞)과 도추(道樞)에서 한 자씩 따온 이름이다. 막상 이렇게 짓고 보니 너무 거창하고 한편 그럴싸하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중심의 고요’가 아니겠나 싶다. 오랜 숙제를 끝낸 것만 같아 가뿟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니 ‘애기나리 꽃길’은 나의 별칭인 셈이다.
오늘은 좀 더 오래 이곳에 머물다 가고 싶지만 모기는 극성이고 언제나 어둠은 내 생각을 앞질러 도착한다. 비둘기는 아직도 구구구 울고 어디선가 싸리 꽃 희미한 향이 가느다란 길에 향불처럼 번지고 있다.
/유강희(시인)
*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불태운 시집> , <오리막> , 동시집 <오리 발에 불났다> , <지렁이 일기 예보> , <뒤로 가는 개미> 등. 뒤로> 지렁이> 오리> 오리막> 불태운>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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