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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걷다, 생각하다, 쓰다 - 이준호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1983년에 군산에 정착했으니 햇수로 34년째다.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높은 곳에서 조망하면 시가지가 바둑판처럼 구획돼 있다. 80년대엔 영화동과 월명동에 일본식 건축물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월명산은 군산 도심에 자리한다. ‘명월’이 아니라 ‘월명’인 건 일본식 어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제망매가」의 지은이가 월명사인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월명산의 벚꽃은 일제강점기엔 경성에서 특별열차를 편성할 정도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월명공원은 문학이나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탁류의 악한 고태수가 산책하려다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만둔 곳이자 어린 고은이 신사참배를 하던 곳이다. 광기 어린 좌우의 살상으로 정신이 피폐해져 방황하던 고은이 노숙하던 곳이자 부산 출신의 소설가 김정한이 소주에 독을 타서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곳이다. 고은이 장항제련소 굴뚝을 건너다보며 영원성을 생각한 곳이자 채만식 문학비가 있는 곳이며, 고은이 출가한 동국사가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이 뚫은 해망굴은 탁류에서 고태수와 장형보, 행화가 은적사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통과한 곳이자 고은이 미군비행장으로 가기 위해 지나친 곳이다.

그중에서도 수원지와 그 주변의 산책길은 나에게 각별하다. 하루에 한 번, 시간을 정하지 않고 월명공원 수원지 둘레를 걷는다. 체육공원에 설치된 운동기구까지 이용하면 한 시간 남짓한 코스다. 시간을 늘리고 싶으면 주변의 해발 100미터 내외인 산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러면 금세 두세 시간짜리 코스가 된다.

월명산 내에 있는 수원지 역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수원지와 산책길의 인연은 고3 때로 거슬러간다. 그땐 상수원 보호를 위해 수원지 둘레에 철망이 쳐두었고, 주변의 길은 비포장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와 낚시를 하다 감시원에게 낚싯대를 빼앗긴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시멘트 포장에 우레탄까지 깔아 비가 와도 흙탕물 튈 걱정 없고, 오래 걸어도 무릎 상할 염려가 없다. 흙길 그대로 보전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저런 부속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돼 이용이 편리하다.

지금은 수원지를 월명호수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바꿔 부른다. 그렇지만 수원지를 뭐라 부르건 나와는 상관없다. 나에겐 어디까지나 수원지일 뿐이다. 일반명사를 고유명사화한다는 건 사유화하고 구속한다는 거니까. 명명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순간 명명된 사물의 본질과 정체성은 훼손돼 버리니까. 어느 지역의 집필실에 가건 맨 먼저 산책길을 만든다. 하지만 그 어느 산책길에도 이름을 붙인 적은 없다.

단지 식수공급원의 용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원지라고 고집하는 건 아니다. 수원지와 산책길은 내 글의 원천이자 자산이다. 수원지의 물빛이나 냄새는 계절이나 시간대에 따라 달라진다. 비 오는 날이면 머리를 꼿꼿이 쳐든 괴생물체를 발견한다. 어스름 저녁이면 외래종인 황소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한때 숲을 지배하던 청설모는 다 어디로 간 걸까? 공도교에서 쌀 튀밥을 주면 몰려드는 잉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안개가 심한 어느 겨울밤, 흰 체육복을 입은 커플을 유령으로 착각해 머리칼(?)이 쭈뼛 섰던 적도 있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벤치에서 인기척에 남녀가 후다닥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 괜히 미안해진다. 산책길에 떨어진 야구 모자나 장갑 한 짝을 발견하면 그 물건들의 주인들을 상상하게 된다. 며칠 전엔 오후 열한 시쯤에 갔더니 예닐곱 마리가 무리를 이룬 개떼를 만났다. 무슨 모의라도 하는지 산책로 한가운데서 모여선 녀석들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작년엔 집필실에서 돌아와 몇 달 만에 갔더니 민둥산이 되다시피 했다.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 때문이었다. 겨울 산의 황량함과 스산함은 신록이 우거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모든 글들이 수원지와 산책길에서 구상되고 숙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범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산책길이지만 나에겐 사색과 모색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편백나무 숲에 누워 장르를 구분 않고 다운받은 음악을 듣노라면 상상력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풀벌레 소리에 볼을 간질이는 미풍까지 더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걷기 좋아하는 글쟁이들이 군산에 놀러오면 꼭 안내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아름다운 길은 많다. 가본 곳을 잠깐만 떠올려도 동해안 자전거길, 지리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부안 마실길 등등이다. 하지만 산책길처럼 마음이 한갓지고 여유로워지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산책길이 끼니때마다 먹는 집밥이라면, 다른 길들은 돈가스나 짜장면쯤 될까.

이따금씩 정해진 코스를 이탈해 채만식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는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군산의 원도심은 탁류 속에 그대로 재현돼있다. 군산시는 관광객들을 위해 탁류의 배경지와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을 중심으로 ‘탁류길’을 조성해두었다. 탁류의 등장인물들이 걸었던 동선을 따라가며 만나는 녹슨 못 하나, 비바람에 퇴색한 판자 한 쪽이 모두 정겹고 애틋하다. 채만식의 발자취를 따라 고즈넉한 밤거리를 걷노라면 일제강점기로 타임슬립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영화 <밀정> 에서 경성 밤거리를 밝히던 가로등이 현재 군산에 설치된 가로등과 모양이 같다는 걸 안 뒤론 그런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어느 시인은 채만식을 친일 작가라고 단정한다. 채만식의 친일 작품이 서른 편이 넘는다고 박박 우기는 데엔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반성적 사유의 결여’에서 오는 오만과 자만의 산물이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그 시인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하는 가정 뒤엔 으레 당꼬바지에 도리우치를 쓴 고등계 형사의 모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게 된다. 나는 김훈 작가를 좋아한다. 그가 밀리언셀러 작가여서도, 미문을 구사해서도, 지면 곳곳에 깊은 사유의 흔적이 스며 있어서도 아니다. 그가 「치욕」에서 “나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일이 두렵다.”라고 심경을 밝힌 다음부터다. 시대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그의 균형 잡힌 사고가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 또한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자신할 수 없다. 채만식은 매문으로만 생계를 유지했다. 한땐 그의 식솔뿐 아니라 형의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했다. 머리맡에 원고지를 쌓아두고 글을 쓰는 게 그의 평생소원이었다. 한 번 정착된 문자는 오래 전해진다. 구술과 문자의 차이이다. 채만식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덮어놓고 친일 작가 운운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느 평론가는 채만식이 친일을 내면화해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때론 채만식이 원망스럽다.

항일이나 반일의 길은 가지 못할망정 왜 손가락질당하는 길을 가셨습니까.

오늘도 산책길을 걷는다. 공도교 입구가 막혀 있다. 그제야 깨닫는다. 언젠가부터 확장 공사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눈으로만 읽고 머리엔 입력하지 않은 탓이다. 당분간은 다른 코스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코스가 좋을까.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시공간은 다르지만 내가 걷는 산책길과 채만식이 걸어간 탁류길은 어느 지점에선가 이어져 있기도, 끊어져 있기도 하다. 연결됐나 하면 단절됐고, 단절됐나 하면 연결됐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걷는다. 그게 인생 아니던가.

이준호(소설가)
이준호(소설가)

*이준호: 1994년 작가세계 소설 당선, 2001년 MBC 창작동화대상 장편동화 당선, 할아버지의 뒤주, 그해 여름, 닷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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