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길 위에 서면 세상이 보인다고 했다지?
그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피식 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이런 말도 들었던 것 같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바람이 불자 예의상 잠깐 흔들려주는 나뭇잎 같은 심정이었다랄까?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는 남다른 재주에 조금 감탄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뭐라고 한마디 거들어보고 싶다, 길에 관해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길과의 로맨스는 떠오르지 않는다. 길에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 적도 없고, 검은 숲을 파헤쳐 나만의 길을 내본 적도 없다. 몇 가지 소소한 일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늦가을 어느 날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도로를 횡단하며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르듯 으스댔었지만, 무단횡단에 따른 딱지 한 장 받아보지 못했다. 길모퉁이에 서서 어떤 여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영영 헤어져버린 기억도 있다. 그렇다고 이별의 책임을 길에게 묻고 싶지는 않다. 이별이래야 이별일 수 없는 게, 노상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발밑에 늘 길이 있어서였을까? 길에 관해 진지하게 고마워해본 적은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길에 마음을 앗겨버린 것이 2003년 무렵이다. 홀렸다고나 할까? 운명처럼, 길이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뒷목 근처에서 속삭이는 애인처럼 길은 내 오목한 발바닥을 향해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길의 애무에 끝내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 이제 나를 다 가져라! 한껏 달떠서 나는 그렇게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나는 길을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애인으로 삼은 길은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서 소양면 화심을 잇는 749번 지방도로다. 신리에서 더듬어가기 시작한 길은 적당한 경사를 이루며 오르막을 형성한다. 그 길을 사랑하는 일은,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수컷처럼, 앞만 보고 무작정 뛰는 것이다. 애인의 발등을 쓰다듬다가 정강이를 스쳐 무릎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곧장 살 오른 허벅지로 달려들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재게 발을 굴려야 한다. 신리에서 출발한 지 5분쯤이면 그리 길지 않지만 제법 가풀막진 오르막이 버티고 있다. 이제 등줄기에 땀이 배고 종아리는 딴딴하게 부풀어 오른다. 눈알 벌게지도록 씩씩거리며 단숨에, 그렇다, 멈춤 없이 단숨에 기어오르면 문득, 길은 감추어두었던 상관수원지를 애인의 허벅지 안쪽처럼 내어준다. 그 순간 휘이, 숨이 탁 트이면서 긴장하고 있던 몸의 근육들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길도 마찬가지다. 상관수원지 허리를 살포시 휘감고 도는 길은 풍만한 굴곡을 이루며 길 위에 선 사람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거추없이 덤벼들 일은 아니다. 길도 나도 서로 충분히 간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뛰는 일은 시늉으로 두고 물낯에 드리워진 산그늘의 깊이를 헤아려본다. 이런 날은 아주 맑아도 못 쓴다. 세상이 좀 더 침침해지고 사물의 빛깔들이 바짝 뭉개질듯 흐리흐리해야 연애할 맛도 난다. 주춤주춤 가랑비라도 내리면 더 좋다. 세우(細雨)에 뛰는 일은 어떤 오르가슴도 넘보지 못할 향락의 극치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사랑에는 더러 어이없는 장벽 같은 것이 덜컥 나타나기도 하는 법이니….
길과의 연애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처음과 달리 달리는 폼도 안정되고 속도도 붙어서 제법 능숙하게 애인을 대하듯 길을 밟아나가던 때였다. 준비운동을 할 때부터 아랫배가 미심쩍더니 상관수원지를 돌아가는데 기어이 탈이 나고 말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뭘 자꾸만 사달라고 졸라대는 애인처럼 아랫배가 쿡쿡 쑤셨다. 돌아갈까? 그러나 하다 말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만고의 진리가 득의하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미소의 그늘에서 피어오르는 유황불 같은 불길함을 애써 외면했지만, 오래 잊고 있던 길 위에서의 추억 하나가 강제로 소환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것은 느닷없이 내 이름을―그렇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기야, 라고 부르지 않았다.―한 음절씩 끊어서 불러대는 애인의 싸늘한 목소리처럼 뭔가 께름한 징조였다.
다섯 살? 많아야 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가로 나는 울상이 되어 길을 걷고 있었다. 집에까지는 제법 많은 걸음이 남아 있었고, 뒤편에서는 내 걸음보다 빠르게 해가 지고 있었다. 눈앞으로 길게 드리워진 내 회색 그림자를 보며, 나는 생애 최초의 비극과 맞서고 있었다. 잔뜩 숨을 참았다가 병아리 눈물처럼 조심스럽게 내쉬는 동안, 한주먹감도 안 되는 내 엉덩이는 바윗돌보다 무거웠다. 이미 나는 약간의 설사를 지린 상태였다. 배 속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잔뜩 성난 물찌똥이 출렁거렸고, 내 눈에는 흥건해진 눈물이 여차하면 미끄러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괄약근에 잔뜩 힘을 주고 걷던 길이었는데….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었다. 중학교 이학년 봄, 소풍 길도 거들어보겠다고 불쑥 끼어들었다. 아, 아득하여라. 그해 소풍 길에서 노랗게 흔들리는 환타는 귀여운 악마 같았다.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날 나는 환타가 아니라 봄볕의 환각에 취한 것이었다. 시작은 한 모금으로 미미했으나 몇 병의 환타를, 아니 봄볕을 마시고 또 마신 끝은 말 그대로 창대한 판타지였다. 찧고 까부는 동안 판타지는 서서히 악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옆구리 터진 김밥을 우겨넣고 난 뒤에 약간의 미심쩍은 기미를 느꼈으나 그때까지는 여전히 판타지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그러다가 늦은 오후, 소풍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으슥한 덤불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길은 숲을 알지 못했다. 길은 매정하게도 엄폐, 은폐할 만한 것들을 지니지 않았다. 길 위에서 나는 거의 체념하였고, 심판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최후의 눈을 감았다. 그때 아, 신이시여! 건물과 건물 사이 빈터에 누군가 버려놓은 쓰레기더미가 보였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보니 그 옆에 우북하게 돋은 쑥대가 찬란한 후광을 두른 채, 여기가 유토피아야, 라고 속삭이듯 나를 향해 손짓을 해댔다. 내가 신의 가호를 인정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에야 나는 이마를 가린 쑥대밭에 주저앉았고, 염치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어린 양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 나올 수 있었다. 몇 번 입지 않았던 팬티를 과감하게 벗어주는 것으로 쑥대밭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도래하는 미래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머리에 ‘다시’를 붙여본다. 다시 도래하는 미래. 그랬다. 악마의 재림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악마가 도래하고 있었다. 가랑가랑 비는 내리고 싸륵싸륵 배는 아파오는데, 오래전 덜 여문 내 엉덩이에 입맞춤하고 사라졌던 악마가 749번 지방도에 강림해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머릿속이 바빠졌다. 살기 위해서는 그날 새 팬티를 과감하게 내던졌던 것처럼 길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길을 달려본 사람은 안다. 길이 주는 매력을. 대장정에 나선 이에게 길은 요물이나 다름없다. 나신으로 누운 길은 그 까만 눈동자를 새침하게 내리뜨고는 가볍게 몸을 뒤채며 유혹한다. 길의 매혹에 혼미해지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라고나 할까? 어느 순간 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장탄식을 토해내기도 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 아니라 걷는 자는 모두 길 왕국의 충복이 되어 길에게 투신하고 헌신한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야누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 혼미한 정신은 길의 유혹에 꿈쩍하지 않는다. 길, 너 없이는 못 한다고 굳게 맹세했던 모든 말들이 모두 부도난 허세였음이 탄로 나는 순간이다. 절세미인과 신방(新房)을 꾸미더라도 뒤가 마려우면 헛일이려니, 앞일 치르고 뒷일 봤다는 말 들어본 적 없다. 이쯤이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당당하게 파혼을 선언하고 길가 밭 언덕으로 기어올랐다. 바짓단을 내림과 동시에 쭈그리고 앉으니 마침 콩잎이 부끄러움을 가린다. 막무가내로 막아댔던 길이 터지자 밤하늘 유성우처럼 내 안의 우주가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천지창조의 순간이 이러했을 것이다.
다 끝났다. 여운처럼 발가락부터 정수리까지 야들야들한 비단 한 자락이 아기 걸음처럼 밟고 간다. 환각과 마각의 카타르시스로 부르르 몸이 떤다. 간신히 둘러보니 누리 가운데 나 하나만 외롭게 주저앉은 듯한데, 멀리 산자락들도 한 무더기씩 부려놓은 것처럼 도톰하게 섰다. 눈앞에 안개가 개니 불현듯 참담하여 그제야 엉덩이를 쏘삭이며 간질였던 것이 한낱 볼품없는 풀잎이었음을 안다. 저만치 콩잎들 사이로 껑충한 참깨 꽃이 서넛 질려 있는 것도 보인다. 문득 쓸쓸해진다. 쓸쓸함이란 이런 심정을 두고 하는 말임을 널리 선포해도 좋겠다.
콩잎 서너 장을 뜯어 쥔 채 저만치 늘어져 있는 749번 지방도를 내려다보았다. 뒤를 비우니 장딴지에 힘줄이 불끈 솟는다. 그래, 오늘은 끝장을 보자. 나는 749번 지방도에 올라탄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진 듯하다. 젖은 길은 치명적인 속살을 내보인다. 길 끝은 화심(花心)이렷다? 꽃의 속살을 아니 보지는 못할 일이니, 쓰다 남은 콩잎 한 장 움켜쥐고 우중(雨中) 질주에 속도를 높인다.
애인이여! 너,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라.
/문신(시인)
* 2004년 <세계일보> , <전북일보> 신춘문예(시),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동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 시집 <물가죽 북> , <곁을 주는 일> , 연구서 <현대시의 창작방법과 교육> 등. 현대시의> 곁을> 물가죽> 동아일보> 조선일보> 전북일보>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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