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계백이 주둔한 웅치산성으로 좌평 충상이 찾아왔다. 호위군사 셋과 함께 말을 달려온 것이다. 계백은 흥수와 함께 맞았는데 둘을 본 충상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곳에서 함께 죽읍시다.”
“허, 좌평, 우리는 그대와 함께 죽을 생각이 없네.”
흥수가 정색하고 말을 받았다. 청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충상이 계백과 흥수를 번갈아 보았다.
“도성은 이미 연임자가 장악하고 있소. 동방과 서방, 남방군은 모두 연임자의 모략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모일 수도 없소. 오직 이곳만 도성을 막고 있을 뿐이오.”
“대왕께서 무슨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계백이 묻자 충상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길게 숨을 뱉었다.
“달솔, 대왕께선 달솔이 좌평 흥수를 유배지에서 빼낸 것에 진노하셨네.”
“좌평, 잘 오셨습니다.”
계백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충상을 보았다.
“좌평께선 이곳에 남아 있다가 대왕을 모시지요.”
“무슨 말인가?”
“저희들하고 같이 싸우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오.”
“아니, 그것은…”
눈을 크게 뜬 충상이 흥수를 보았다. 충상은 충신이다. 충신(忠臣)이라고 해서 다 기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목에 칼을 대면 변절을 하는 충신이 9할은 된다. 충상이 그런 부류다. 연임자가 반역을 하는 줄 뻔히 알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망설이고 회피했다가 이곳에 온 것은 마지막 용기를 낸 셈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흥수의 얼굴에 쓴 웃음이 번져졌다.
“이보게 좌평, 죽는 것이 능사가 아닐세.”
충상에게 흥수는 선임자인 데다 연상의 어른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수가 연임자의 모함을 받아 귀양을 떠날 때에도 도와주지 못했다.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나 같다. 흥수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연임자가 백제국을 안에서 무너뜨리는 것을 방관하다가 지금은 마지막 용기를 내어서 죽을 자리를 찾아온 셈인가?”
“그렇습니다.”
시선을 내린 충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겁자를 받아주시오.”
그때 계백이 밖에 대고 소리쳤다.
“하도리 있느냐?”
“예, 달솔.”
기다렸다는 듯이 창밖에서 목소리가 울리더니 하도리가 위사들과 함께 들어섰다. 그 순간 충상의 얼굴이 누렇게 굳어졌다. 계백이 충상에게 말했다.
“좌평,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 웅치산성의 감옥에 계시오.”
“달, 달솔, 왜 이러시는가?”
눈을 크게 뜬 충상이 계백을 보았다.
“함께 죽도록 해주시게. 달솔.”
“우리가 떠났을 때 김유신이 이곳 감옥에 갇힌 좌평을 보고 풀어줄 것이오.”
“아니, 달솔…”
“적인 나에게 잡혀 갇혀져 있다는 것은 곧 우군이라는 표시일터, 김유신이 우대를 해줄 것이오.”
“달솔, 나는…”
“김유신과 같이 도성으로 가서 대왕을 모시기 바라오.”
그때 흥수가 말을 받는다.
“좌평, 알겠는가? 이곳을 지난 김유신은 소정방과 함께 도성을 함락시키지 않겠는가? 그러면 대왕은 포로가 되네.”
충상은 숨만 쉬었고 흥수가 말했다.
“여기서 죽겠다는 용기로 포로가 된 대왕을 모시기 바라네. 그게 달솔의 뜻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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