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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305) 15장 황산벌 24

주민의 4할은 될 것 같네. 흥수가 다가선 계백에게 말했다. 오전 진시(8시) 무렵 황산벌에서 남진(南進)한 백제군(軍)의 진막 안으로 흥수가 찾아온 것이다. 배를 타고 남하하는 백성이 1할 정도, 나머지는 육로로 이동할 것이네. 그동안 흥수는 각 성(城)과 현에 전령을 보내 이주민을 모집했던 것이다. 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민들은 구례성에서 왜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앞에 앉은 흥수가 길게 숨을 뱉었다. 신라가 백제 땅을 차지하게 되면 이곳은 모두 신라 귀족들의 장원이 되고 백제 주민들은 농노가 되겠지. 그러나 조상이 묻힌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네. 왜국에서 한 달쯤 후에는 5백여 척의 배가 올 것입니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쉴 새 없이 주민들을 옮겨야지요. 김유신이 약속을 했지만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네. 흥수가 여윈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내가 남장(南方)의 각 성에 전령을 보냈으니 군사들이 모이겠지만 당군(唐軍)까지 막기는 역부족이야. 서둘러야겠네. 그래야지요.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대이동이다. 백제 유민은 이제 왜국으로 건너간다. 백제왕 의자가 계백이 보낸 전령을 만났을 때는 신시(10시) 무렵이다. 이미 신라군의 황산벌 돌파를 보고받고 있었던 터라 의자의 얼굴은 침통했다. 전령은 12품 문독 벼슬의 군관이다. 대왕, 달솔 계백은 좌평 흥수와 함께 주민들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습니다. 남하한다고? 의자가 묻자 전령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예, 남쪽에서 배로 왜국으로 이주할 예정입니다. 달솔 상영도 따라갔느냐? 계백이 감옥에 가둬놓았으니 김유신군이 진입해서 포로로 잡았을 것입니다. 청 안에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미 신라군은 하루 거리였고 당군은 반나절 거리로 다가왔다. 그때 의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백제가 왜국으로 옮겨가는가? 김유신이 앞에 선 내신좌평 연임자와 동방방령 달솔 사택부를 보았다. 진군 중이어서 김유신은 땅바닥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고 주위에 장수들이 둘러서 있다. 사택부 뒤쪽에 황산벌의 웅치산성 감옥에서 풀어내온 달솔 상영도 서있다. 김유신이 물었다. 사비도성에서 도망쳐 온 것이냐? 예, 대감. 연임자가 허리를 굽히면서 대답했다. 이제 소인의 소임도 마친 것 같아서 빠져나왔습니다. 김유신의 시선을 받은 연임자가 웃었다. 백제에서의 역할이 끝났습니다. 대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김유신이 옆에 선 김품일에게 말했다. 신라에서의 역할도 끝난 저놈들을 이곳에서 베어 죽이고 떠난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유신이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잘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개보다도 못 한 인간들이다. 계백이 다가오는 아내 고화와 딸 선(善)을 보았다. 남하하는 길가에서 고화와 계백 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에서 내린 계백이 다가가자 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구름 한 점 떠있지 않은 맑은 날씨였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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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8 20:18

[불멸의 백제] (304) 15장 황산벌 23

관창이 죽었다고?김유신이 묻자 김품일이 고개를 떨구었다. 부끄럽습니다. 무슨 말인가? 김품일이 입을 벌렸을 때 재빠르게 김흠춘이 대답했다. 공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아닙니다. 말을 막듯이 김품일이 똑바로 김유신을 보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백제군 외침에 놀라 말에서 떨어진 후에 발굽에 짓밟혀 죽었다고 합니다. 진막 안에는 김유신과 대장군 둘까지 셋뿐이다. 김유신이 김흠춘, 김품일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신라군은 백제군과 세 번 싸워서 세 번 패퇴했다. 벌써 1만여 명의 전상자가 생겼는데 4만도 못 되는 병력이 뒤쪽에 머물고 있다. 사기는 땅에 떨어져서 장수들의 외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김흠춘과 김품일은 차례로 아들 반굴과 관창을 잃었다. 그때 김유신이 말했다. 너희들의 아들 반굴과 관창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기록될 것이다. 김유신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렇지. 반굴은 앞장서서 백제군 장수 셋을 베어 죽이고 전사를 했다고 하자. 김유신의 시선이 김품일에게 옳겨졌다. 네 아들 관창은 어리니 백제군에게 네 번 잡혔다가 풀려났는데도 계속해서 단신으로 돌진했다가 나중에 잡혀 목이 베어졌다고 하지. 그것을 본 신라군이 분을 일으켜 백제군을 전멸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백제군도 이제 3천 남짓이다. 우리가 밀고 가면 또 패퇴하게 되더라도 몇 명 안 남는다. 역사는 이긴 자가 기록하는 거야. 백제는 이제 망한다. 백제 기록은 다 불태워질 것이고 우리 손으로 역사를 쓸 테니까. 그때 진막 밖이 웅성거리더니 위사장이 뛰어 들어왔다. 눈을 치켜뜨고 있다. 총사령, 백제군 전령이 왔습니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유신도 숨을 들이켰지만 곧 지시했다.데려오라. 백제군 전령은 나솔 윤진이다. 윤진은 피로 얼룩진 붉은 갑옷 차림으로 진막 안에 들어서더니 김유신을 향해 가볍게 목례만 했다. 백제군 대장군 윤진입니다. 김유신을 응시한 채 말하더니 어깨를 폈다. 백제군 총사령 달솔 계백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거기 앉으라. 김유신이 눈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윤진은 바닥에 놓인 나무 걸상에 앉았다. 세 걸음쯤 앞쪽 중앙에 김유신, 좌우에 김품일, 김흠춘이 앉았다. 주위는 조용하다. 밖에 모든 신라군이 백제군 전령이 온 것을 아는 것이다. 그때 윤진이 말했다. 백제군을 가로막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김유신이 눈썹을 모으고 윤진을 보았다. 가로막지 말라니? 예, 백제군은 남하(南下)하겠습니다. 남쪽으로 간단 말인가? 예, 백제 주민과 함께 남하해서 왜국으로 건너갈 것입니다. 그러니 막지 말란 말씀이오. 김유신이 숨만 쉬었고 김품일과 김흠춘은 서로의 얼굴만 보았다. 그때 윤진이 말을 이었다. 이미 좌평 흥수가 백제 주민을 모아 남하시킬 준비를 하고 있소. 서로 막지 마십시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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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7 19:45

[불멸의 백제] (303) 15장 황산벌 22

좌측을 격파하고 돌아온다. 계백이 나들이를 다녀온다는 것처럼 말했다. 신라군의 북소리와 말굽 소리, 함성이 천 리를 진동하고 있다. 신라군 선봉 김흠춘 군(軍)이 뒤로 물러나고 중군(中軍)이 드러나면서 기마군 2개 군단이 좌우로 벌려져 달려오고 있다. 엄청난 기세다. 거리는 4리(21㎞), 질주하고 오는 터라 금방 부딪친다. 계백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느냐! 이번에 신라군의 중군(中軍)을 격파하는 것이다! 예엣! 장수들이 일제히 소리쳐 대답했다. 지금은 1진, 2진, 3진이 다 출진한다. 병력은 4천여 명, 전상자가 1천여 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계백이 앞장을 서자 하도리가 위사 1백여 명과 함께 선두에 나섰다. 그때 계백이 허리에 찬 칼을 빼 들고 소리쳤다. 따르라! 계백이 박차를 넣자 말이 뛰었고 이제 백제군 4천기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달린다. 이번에도 붉은 불길처럼 달려갔는데 말굽 소리만 울릴 뿐이다. 어엇! 저놈들이 우측을 친다! 김유신 옆에 선 부장 김용준이 소리쳤다. 신라군 쪽에서 보면 우측이다. 이쪽은 지형이 조금 높아서 백제군이 한 무더기가 되어서 우측의 신라군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군세(軍勢)가 비슷하다. 신라군은 좌우측에 각각 5천기씩 나눠졌기 때문이다. 우측 대장이 누구냐? 김유신이 묻자 김용준이 눈을 치켜뜨고 대답했다. 이찬 김석보입니다. 좌측 군이 백제군의 후미를 칠 수 없겠는가? 다급하게 김유신이 물었지만 곧 먼지 속에 드러난 백제군을 보더니 탄식했다. 이놈, 계백. 꼬리를 없앴구나. 보라. 백제군은 마치 둥근 바위처럼 뭉쳐 우측 신라군과 부딪친다. 후미가 없는 것이다. 좌우로 벌려진 신라군은 정공법으로 앞이 뾰족한 삼각 대형을 형성했고 뒤를 선봉, 중군, 후군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백제군은 둥근 덩어리로 한꺼번에 삼키는 것 같다. 대형이 없는 것이 더 기괴했다. 김유신이 탄식했다. 아, 저것이 무언가! 그 순간 붉은 기운이 신라군 선봉을 뒤덮었다. 그리고 함성이 일어났다. 백제여! 계백이 벽력처럼 소리치자 백제군이 일제히 외쳤다. 백제여! 갑자기 터진 함성에 말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안에서 꾹꾹 눌렀던 기백이 백제군의 온몸으로 터졌으며 신라군은 위축되었다. 계백은 옆으로 다가온 신라군 장수의 칼을 몸을 틀어 비꼈다. 다음 순간 계백이 휘둘러 친 칼이 장수의 팔을 잘라 떨어뜨렸다. 난전이다. 그러나 머물면 안 된다. 기마군은 달려야 한다. 부딪쳐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고 다른 말은 뛰어야 한다. 나가라! 계백이 소리치며 말을 달렸다. 뒤를 백제군이 함성을 지르면서 따른다. 한시진이 지난 오후 미시(2시) 무렵, 백제군이 다시 웅치산성 아래쪽에 모였다. 달솔, 장군 화청이 뵙자고 하오! 피투성이가 된 윤진이 말했다. 화청은 부상당한 몸으로 이번 대접전에 참가했다가 창에 가슴을 찔린 채 귀환했다. 어깨와 옆구리에도 칼을 맞아서 중상이다. 나무에 기대앉아있던 화청이 다가오는 계백을 보더니 웃었다. 피를 머금은 입안이 시뻘겋다. 달솔, 백제를 존속시키시오! 화청이 피를 뱉으면 말하더니 손을 뻗었다. 다가간 계백이 손을 잡은 순간 화청이 긴 숨을 뱉으며 숨이 끊어졌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김유신에게 전령을 보내라!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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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4 20:56

[불멸의 백제] (302) 15장 황산벌 21

양쪽 기마군 선두는 순식간에 부딪쳤다.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온 터라 양쪽 모두 엄청난 탄력이 붙었기 때문이다. 와앗! 칼을 내려치기 직전에야 백제군이 우레같은 함성을 내질렀고 윤진의 호위무사들이 신라군 선봉 장수의 호위무사 10중 7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백제군의 몸놀림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경장 차림이어서 몸을 비틀고 움츠리며 솟기까지 하는 데다 말 무게도 가벼워서 속력은 거의 갑절이다. 와앗! 눈 한번 깜박인 다음 순간 윤진은 신라군 장수가 바로 10보 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어리다. 흰 얼굴, 이를 악물고 칼은 치켜들고 있었는데 필사의 기백이 드러났다. 그러나 어쩌랴. 이쪽은 백전노장, 싸움은 필사의 기백만으로는 안 돼. 다음 순간 신라군 장수가 칼을 내려쳤고 윤진이 몸을 비틀면서 칼등으로 칼을 받았다. 쇳소리와 함께 말들이 부딪쳤고 다음 순간 윤진이 손을 치켜들면서 칼자루로 신라군 장수의 턱을 쳤다. 턱뼈가 부서진 신라군 장수가 머리를 젖혔을 때 윤진이 왼손으로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는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앞으로 달렸다. 손에 멱살을 잡힌 신라군 장수가 늘어진 채 윤진의 말 앞장 앞에 놓여졌다. 신라군 장수를 잡아라! 뒤를 따르던 백제군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오오, 왔느냐? 김흠춘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갔지만 주위의 장수들은 침통한 표정이다. 잘 싸웠다. 김흠춘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반굴의 머리를 받아 쥐었다. 지금 김흠춘은 백제군이 말 꼬리에 매달아서 보낸 반굴의 머리통을 쥐고 서 있다. 윤진이 반굴의 머리를 잘라 보낸 것이다. 너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고개를 든 김흠춘이 소리쳐 말한다. 신라는 이긴다. 이긴자의 손에 역사가 씌어지는 것이다. 너는 영웅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번 2차 돌격에도 신라군 5천은 거의 궤멸했다. 주장(主將)으로 보낸 대장군 김흠춘의 아들 화랑 반굴이 단 1합에 백제군 주장(主將) 윤진에게 사로잡혀 머리통만 보내진 것이다. 소장이 가겠습니다. 대장군 김품일이 말했다. 이번에는 1만 기마군으로 좌우에서 협공을 하겠습니다. 2만이건 3만이건 우리 피해를 줄일 수는 없다. 김유신이 그렇게 말했지만 곧 고개를 들더니 김품일을 보았다. 백제군 5천을 다 죽이려면 신라군은 3만 5천 정도 사상자를 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돌파해야 사비도성에 닿는 것이다. 당군(唐軍) 총사령 소정방과 약속한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황산벌에서 이틀을 다 보낸다. 백제 기마군은 정예다. 그러나 이번에 계백이 이끌고 온 기마군은 지금까지 겪었던 백제군하고는 다르다. 붉은 귀신이다. 두 차례에 걸친 전투로 김흠춘의 기마군 1만이 사분오열 되어서 4천 정도만 남았다. 그때 김유신이 고개를 들고 김품일을 보았다. 가거라. 예. 총사령. 김흠춘은 아들 반굴을 죽여 아군의 사기를 일으키려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명심하라. 예. 총사령. 김품일이 어깨를 부풀리고 김유신을 보았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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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3 20:55

[불멸의 백제] (301) 15장 황산벌 20

그러나 화청이 이끌고 돌아온 백제 기마군은 1천여기, 500기의 전상자를 냈다. 신라군 5천기를 격파한 대승을 이루었지만 화청의 얼굴은 그늘이 졌다. 달솔, 다시 한번 갔다 오겠소. 장검의 피를 겉옷에 닦으면서 화청이 말했다. 화청의 수염에도 피가 튀어서 붉게 물들었다. 아니, 이번에는 제2진이 간다. 계백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김유신도 지리를 아는 이상 한꺼번에 5만 대군을 쏟아붓지는 않을 것이야. 그때 신라군 진영에서 북소리가 다급하게 울리더니 함성이 올랐다. 좋아. 가거라. 김흠춘이 다급한 북소리 사이에서 외치듯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신라군의 기세를 올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기가 떨어진다. 예. 대장군. 소리쳐 대답한 장수는 화랑 반굴, 김흠춘의 아들이다. 18세, 무용이 뛰어나 아비 김흠춘뿐만 아니라 총사령 김유신한테도 사랑을 받는 영재다. 김흠춘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반굴을 보았다. 알았느냐? 네 이름을 세상에 떨칠 기회다. 너는 신라의 영웅이다. 예. 대장군. 장하다. 아들아 불쑥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반굴이 고개를 들었고 주위의 장수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김흠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주르르 눈물을 쏟은 반굴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더니 몸을 돌렸다. 김흠춘이 반굴의 뒷모습만 보았을 때 함성이 일어났다. 반굴이 말에 올라 칼을 치켜든 것이다. 이번에는 2차 공격이다. 김흠춘 휘하의 기마군 5천이 반굴을 앞장세워 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돌입한다. 옳지. 달려오는 신라군을 본 윤진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쳤다. 윤진은 지금 마상에 앉아 있다. 뒤쪽 제2진의 기마군 1500기가 숨을 죽인 채 윤진의 명을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돌린 윤진이 좌우에 서 있는 부장(副將) 오다와 다까시를 차례로 보았다. 나는 정면에서 부딪칠 테니 너희들은 좌우로 벌어졌다가 제2대가 먼저, 제3대는 3등분한 마지막 부분을 쳐라. 하! 오다와 다까시가 일제히 대답했다. 지금 김흠춘의 5천 기마군은 제1차 접전 때 백제군이 그랬던 것처럼 3열 종대로 길게 뻗쳐 달려오고 있다. 백제군의 심장부까지 쑤시고 들어오겠다는 기세다. 북소리가 더 다급해졌고 아직 2리(1km) 거리지만 신라군의 기세는 창이 날아오는 것 같다. 북소리와 함성, 말굽 소리가 산천을 진동했고 멈춰선 백제군의 말 떼가 웅성거렸다. 기세에 압도당한 것 같다. 그때 윤진이 장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진격! 그 순간 윤진이 말에 박차를 넣었고 1진 5백기가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나갔다. 한 호흡쯤 후에 오다와 다까시가 제각기 기마군 5백기씩을 이끌고 좌우로 벌어지면서 뛰쳐나갔다. 2,3진이다. 이번에도 백제군은 입을 꾹 다물고 달렸기 때문에 말굽과 장식 소리만 울린다. 함성을 지르지 않는 것은 계백 기마군의 전통이다. 기(氣)를 몸 안에 품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꺼번에 뱉기 때문이다. 앞장선 윤진의 앞에는 호위 기마군 10여기가 뭉쳐서 달리고 있다. 그들 눈에 달려오는 신라군 선두가 보였다. 선두에 선 장수가 있다. 그 장수도 호위 기마군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흰 얼굴, 투구에 긴 꿩 털 두 개가 붙었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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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2 20:55

[불멸의 백제] (300) 15장 황산벌 19

화청이 장검을 어깨에 걸치고는 말을 달린다. 4자(120㎝)짜리 장검이어서 휘두르면 엄청난 검풍(劍風)이 일어난다. 흰 수염을 흩날리며 붉은색 겉옷이 바람에 펄럭였고 장검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화청이 이끈 기마군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모두 왜군으로 백제 땅에서의 전투는 처음이다. 그러나 영주 계백을 모시고 왜국을 종횡무진 석권했지 않은가? 백제군의 기마군은 아리타, 타카모리, 후쿠토미 등을 토벌하고 나서 받아들인 혼성군,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계백을 중심으로 돌처럼 뭉쳐졌다. 붉은 불덩이가 달려가고 있다. 이번에도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앞쪽을 응시한 채 질풍처럼 달린다. 모두 가죽 갑옷만 걸친 경장 차림이어서 전마(戰馬)는 가벼워진 몸이라 두 배의 속력을 낸다. 말굽 소리만 땅을 울리고 있다. 이제 신라군과 3백보로 가까워졌다. 그때 화청이 장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종대로! 벽력같은 단 한마디의 외침. 쏘아라! 백제군과의 거리가 300보가 되었을 때 김신생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 순간이다. 김민생이 눈을 부릅떴다. 백제군이 먼지구름 속에서 뒤로 주욱 밀려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군 진영에서는 일제히 화살이 날아갔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은 마치 검은 구름 같다. 앗! 김민생의 뒤쪽에서 놀란 외침이 일어났다. 보라. 먼지가 걷히면서 백제군이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뒤로 물러선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백제군의 좌우가 속력을 늦추면서 종대 대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빗발 같은 화살이 백제군 진영으로 덮어씌우듯이 떨어졌지만 서너기 밖에 맞지 않았다. 말도 쓰러진 것이 두어필 뿐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어느새 50여보 앞으로 덮쳐왔다. 김민생의 심장 박동이 거칠어졌다. 그동안 수십번 기마전을 치렀지만 이렇게 날래고 이렇게 잘 훈련된 기마군은 처음이다. 이것이 모두 왜군이라니. 와아앗! 백제군이 가까워지자 신라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지금 백제군은 화살 대형으로 쑤시고 들어온다. 앞장선 장수는 흰수염을 가발처럼 흩날리고 있다. 치켜든 장검이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거리가 30여보. 그때서야 백제군에서 함성이 울렸다. 백제! 흰 수염의 장수가 벽력처럼 외치자 뒤를 따르는 기마군이 일제히 함성처럼 따른다. 백제! 다음 순간 백제군 장수가 장검을 휘둘러 신라 선봉의 기마군을 쳤다. 한칼에 베인 신라군이 말과 함께 곤두박질을 치며 엎어졌고 곧 양쪽 기마군이 부딪쳤다. 따르라! 신라군을 벤 화청이 다시 장검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화청의 앞으로 호위기마군이 가로막았고 송곳처럼 뚫고 나간다. 화청은 말이 속력은 줄였지만 거침없이 나가고 있는 것에 만족했다. 말고삐를 채면서 화청이 다시 소리쳤다. 우측으로! 잘 훈련된 기마군이다. 화청의 뒤를 따르는 백제군은 곧 송곳처럼 신라군 진영을 쑤시면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라군은 넓게 퍼져 있어서 길이 트인다. 화청도 다시 옆으로 달려드는 신라군의 창을 칼로 쳐내면서 그 반동으로 휘둘러 목을 쳤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신라군 장수를 베었다! 베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에 백제군이 일제히 함성을 뱉는다. 와앗! 화청은 앞쪽이 트인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빠져나왔다. 첫 번째 접전은 이겼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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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1 20:35

[불멸의 백제] (299) 15장 황산벌 18

옵니다! 다케다가 소리쳤지만 계백은 먼저 보았다. 4리(2km) 앞 쪽 들판에 가득히 펼쳐져 있던 신라군 중앙이 좌우로 벌어지면서 먼지구름부터 일어났다. 기마군이다. 기마군으로 짓밟겠다는 의도다. 이쪽도 기마군, 앞쪽을 응시한 채 계백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신라군은 이쪽과 비슷한 기마군을 내놓을 것이다. 신라군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다. 적으면 밀리고 많으면 손해다. 그렇다면, 고개를 돌린 계백이 장수들을 보았다. 우리는 1500기로 돌파한다. 누가 가겠는가? 제가 가겠소! 윤진, 화청, 다케다가 동시에 소리쳤다. 고개를 끄덕인 계백이 입을 열었다. 덕솔 화청이 1진, 덕솔 윤진이 2진, 다케다는 3진이다. 먼저 화청이 저놈들을 쳐라. 달솔, 고맙소. 화청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무성한 흰 수염이 잠깐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흩날렸다. 화청이 힐끗 푸른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구름 한 점 떠있지 않은 하늘은 짙은 바다색이다. 달솔, 날씨가 참 좋소. 그렇구만. 태연의 하늘도 맑았지만 이곳이 더 푸른 것 같소. 함성이 울리면서 말굽소리에 땅이 진동을 했다. 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청의 고향은 대륙의 태연이다. 태연유수 이연의 휘하 장수였다가 이연이 수(隋) 양제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도망쳐 백제에 귀순했다. 나이가 66세. 지금 앞쪽의 신라군 총사령 김유신과 동갑이다. 그때 화청이 말고삐를 채면서 계백에게 소리쳤다. 달솔! 가겠소! 가게. 계백이 화청의 옆 얼굴에 대고 짧게 말했다. 군더더기 말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저 시선 한번 부딪치고 말 한마디 툭 던지는 것 만으로도 서로의 심중(心中)이 전해진다. 말머리를 돌린 화청이 박차를 넣더니 숨 다섯 번도 안 쉬었을 때 백제군의 한쪽이 무를 자른 듯이 떼어지면서 곧 한덩어리가 되어 신라군을 향해 돌진했다. 붉은색 갑옷, 붉은색 천을 두른 백제군 1500기다. 마치 불길이 신라군을 향해 번져가는 것 같다. 엇! 저쪽! 옆에서 지르는 소리에 김민생은 고개를 들었다. 앞쪽 백제군 진영 우측이 쩍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기마군이 이쪽으로 달려온다. 거리는 이제 2리(1km) 정도. 붉은 옷자락이 펄럭였고 밝은 햇살에 창검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백제군은 기합소리, 함성도 지르지 않는 것 같다. 이쪽이 어지럽게 함성과 외침을 뱉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못 느끼지만 가깝게 다가가면 섬뜩해진다. 마치 귀신부대 같다. 김민생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쳐라! 이런 상황에는 전술이 필요없다. 이리저리 가라고 명을 내리면 오히려 혼란이 일어난다. 눈앞에서 덮쳐오는 적을 두고 나누고 돌고 붙으라고 소리칠 경황도 없다. 필요한 것은 사기다. 반드시 쳐 죽이고 밀고 나가겠다는 기백, 이것이 승부를 가른다. 김민생은 흠춘군(軍)의 선봉장. 용장(勇將)이다. 42세. 수십번 전쟁을 치른 백전노장. 진골 왕족이기도 하다. 김민생이 옆에 바짝 붙어 따르는 화랑 반굴을 보았다. 대장군 김흠춘의 아들. 18세. 이번에 첫 춘전이다. 반굴이 김민생의 선봉대로 자원해서 온 것이다. 이제 백제군과의 거리가 500여 보로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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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0 20:01

[불멸의 백제] (298) 15장 황산벌 17

잘 싸웠다. 계백이 소리쳐 말했다. 이곳은 웅치산성 아래쪽, 3영의 군사가 다 모였다. 이번 전투는 백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신라군 선봉대를 흩트렸다. 좌우를 펼치고 달려들던 신라군 선봉대는 백제군이 갑자기 방향을 트는 바람에 저희들끼리 겹치고 아군의 화살에 맞는 혼란이 일어났다. 백제군은 재빠른 기마전술로 물러나 다시 모였고 신라군은 지금도 정비 중이다. 신라군과의 거리는 4리(2km) 정도, 아직도 먼지에 덮인 신라군 진영을 바라보면서 계백이 말했다. 앞쪽에는 3영의 대장, 장수들이 다 모여 있다. 이제 신라군은 5만 병력을 믿고 한꺼번에 덤볐다가 저희들끼리 죽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이다. 계백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장수들을 보았다. 황산벌은 기마군 대군이 전투를 하기에는 좁은 곳이야. 그것을 안 김유신은 한꺼번에 대군을 몰아넣지 않을 테니 너희들의 무용(武勇)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가 있다. 수백 명 장수들의 눈빛이 강해졌다. 한낮, 아직 정오도 안 되었다. 한차례 싸움에서 신라군 선봉군 1만을 혼란에 빠뜨린 백제군 5천은 사상자도 수백 명 정도다. 신라는 그 10배의 손실을 입었다. 계백이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라! 이번에는 김유신이 정예군을 뽑아 우리 3영의 진을 깨뜨리려고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5천이 한 덩이가 되어서 친다! 와앗! 장수들이 일제히 함성을 뱉었다. 그야말로 사기충천, 모두 생사(生死)를 잊은 표정이다. 대부분이 왜군 장수다. 본국에서 신라군을 맞아 서전에서 혼란에 빠뜨렸다는 자긍심이 넘쳐흐른다. 전군(全軍)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 김유신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좁은 구덩이 안에서 혼전이 벌어지면 숫자가 많은 쪽이 불리하다. 김품일과 이번 서전에서 혼란에 빠졌던 선봉대장 김흠춘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신의 본진 앞, 잠깐 멈춰선 대군의 대장군 둘이 총사령과 함께 전략을 논의하고 있다. 김유신이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잘 훈련되었다. 기마군의 진퇴가 능란하고 전의(戰意)가 펄펄 솟아오른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적은 죽기를 각오한 자세입니다. 김흠춘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말했다. 허나 우리 신라군은 대군(大軍)임을 믿고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계백이 처자를 왜국으로 보냈다는 소문이 아직 덜 퍼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김품일이 말했다. 왜군 병사들에게 그 소문이 다 퍼졌다면 사기가 떨어질 텐데요. 아니다. 쓴웃음을 지은 김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알 정도니 이미 소문이 다 퍼졌을 것이다. 아니, 그러면. 그것이 오히려 백제군 주력인 왜병의 사기를 더 북돋웠을 거야. 우리도 이겨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할 테니까. 두 대장군의 시선을 받은 김유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김흠춘, 이번에는 선봉군 5천을 뽑아 백제군과 정면으로 부딪쳐라. 5천 대 5천으로. 예, 총사령. 김흠춘이 어깨를 부풀리고 대답했을 때 김유신이 품일에게 말했다. 너도 5천 기마군을 뽑아 대기해라. 네가 2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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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7 20:43

[불멸의 백제] (297) 15장 황산벌 16

백제군 중앙군의 맨 선두는 십인장 사이또, 허리 갑옷만 걸치고 상반신은 붉은 천으로 감았는데 장검을 치켜들고 있다. 24세, 이마에도 붉은 띠를 매어서 불덩이가 날아가는 것 같다. 뒤를 따르는 9명의 기마군도 모두 왜군. 말발굽 진동이 땅을 울렸고 말들의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사이또 조(組)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 뒤를 바짝 붙어 달리는 모리, 혼다, 나까무라의 조(組)도 마찬가지. 본국(本國) 백제 땅에서 적과 처음으로 부딪치는 싸울아비의 감동으로 모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있다. 계백 중앙군 2천기가 이렇게 돌진한다. 쏴라! 백제군이 와락 가까워졌기 때문에 선봉군 중군의 대장 김동천이 소리쳤다. 그 순간 달리는 말 위에서 화살을 재고 있던 수백의 궁수가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거리는 3백보. 그러나 쌍방이 마주 보고 달려가는 터라 화살이 닿은 무렵에는 2백보 거리가 된다. 유효사거리다. 어엇! 그때 김동천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불덩이가 두 개로 쪼개진 것이다. 달려오던 백제군이 그야말로 도끼로 통나무를 쪼개듯이 2개로 좍 갈라졌다. 그 순간 백제군에서도 화살이 쏘아 올려졌다. 앗! 김동천이 놀란 외침을 뱉었고 뒤를 따르던 신라군의 함성이 뚝 그쳤다. 으음. 김동천이 눈을 부릅뜨고 안장에 매단 방패를 꺼내 몸통을 가렸다. 이제 백제군은 비스듬히 앞쪽을 지나간다. 거리는 2백보, 그 순간 백제군이 쏜 화살이 날아왔다. 신라군이 쏜 화살은 대부분 백제군이 갈라진 빈 공간으로 쏟아진다. 아앗! 뒤쪽에서 신음과 외침이 울렸기 때문에 김동천이 잠깐 해찰을 하다가 어깨에 충격을 받고는 몸을 비틀었다. 윽! 저절로 신음이 터지면서 손에 든 방패가 떨어졌고 몸이 기울어졌다. 화살에 맞은 것이다. 쳐라! 선봉 바로 뒤쪽에서 달리던 중군(中軍)의 선봉대장 다께다가 버럭 소리쳤다. 그 순간 처음으로 왜군에게서 함성이 터졌다. 이얏! 목이 찢어질 것처럼 기성을 지른 왜군의 기세가 벌떡 올라갔다. 지금까지 불덩이 귀신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고 달려오던 왜군이다. 왜군의 함성이 진동했다. 다께다는 이제 선봉대가 신라군 선봉 좌측과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부딪치면서 밀고 나간다. 다께다는 반으로 쪼개진 우측군을 맡고 있었는데 좌측군은 야마노가 지휘한다. 죽여라! 다께다가 다시 소리쳤고 기세가 오른 왜군이 함성으로 응했다. 오. 선봉군 중심에 있던 김흠춘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이쪽은 지대가 조금 높아서 백제군이 다 보인다. 보라. 백제군 중심의 기마군 2천여기가 반으로 뚝 갈라지더니 좌우로 비스듬히 달려가 신라군을 친다. 그리고 좌우에서 달려오던 1천여기의 백제군이 방향을 틀어 중앙군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 빈틈이 없다. 좌우의 백제군을 맞으려고 곧장 달려나가던 양쪽 신라군이 허둥대다가 중앙군 선두와 섞여지고 있다. 저런. 김흠춘이 탄식했다. 겹쳐진 신라군은 무용지물이다. 그때 백제군이 다시 방향을 틀어 산성 쪽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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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6 16:24

[불멸의 백제] (296) 15장 황산벌 15

중군(中軍)의 김유신도 선봉군 앞쪽에 붉은 막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백제군이다. 맑고 개인 날씨, 먼지가 가라앉은 황산벌 앞쪽에 마치 붉은 꽃밭이 펼쳐져 있는 것 같다. 장관이다. 쓴웃음을 지었지만 김유신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그때 김품만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총사령, 선봉대가 공격을 할 것 같습니다. 중앙의 기마군을 내보내겠지요. 그렇구나. 제가 기동군으로 좌우를 협공할까요? 그럼 아군끼리 겹친다. 김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백제군이 벌려선 위치가 좁다. 그곳에 대군(大軍)이 들어가면 숫자가 적은 쪽이 유리하다. 과연. 김품만이 김유신을 보았다. 계백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군요. 왜군 기마군이 잘 훈련되었다. 거리가 4리(2km) 정도가 되었으나 벌려선 붉은색 기마군은 정연했다. 김유신이 다시 칭찬했다. 얕보면 안 된다. 기다려라. 계백이 앞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김유신의 본군(本軍)은 움직이지 않겠지만 선봉군은 멈춰설 수가 없다. 주군, 김흠춘의 기마군도 빈틈이 없습니다. 옆에 선 다께다가 감탄했다. 그런데 장비가 무겁게 보이는군요. 그렇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말에 쇠갑옷을 입혔고 기마군 장비가 너무 무겁다. 형식에 매어있다는 증거다. 기마전에서 우리가 유리합니다. 다께다가 분위기에 들떠 움칠거리는 말을 달래면서 말했다. 다께다는 계백령의 신하였기 때문에 계백을 주군(主軍)으로 부른다. 그때 앞쪽 장수가 소리쳤다. 선봉군이 옵니다! 계백도 보았다. 김흠춘의 선봉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먼저 선봉군 중앙의 기마군이 화살촉 모양이 되어 달려 나오고 있다. 그 뒤를 삼각으로 이룬 기마군 2천기 정도가 따른다. 계백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우의 기마군은 그물 모양으로 벌어지고 있다. 끝쪽이 앞으로 나와 그물 안으로 백제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김흠춘의 기마군은 1만, 백제군의 2배다. 이윽고 계백이 소리쳤다. 3면 동시 공격! 그 순간 고수가 격렬하게 북을 쳤다. 백제군의 북소리는 높고 여운이 적다. 그때 계백이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고 말에 박차를 넣었다. 백제군이 옵니다! 부장 성진이 소리쳤지만 김흠춘은 마상에서 앞을 노려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3개대로 나뉘어졌습니다! 성진이 두 번째 소리쳤을 때 김흠춘이 잇사이로 말했다. 부딪쳐라! 백제군은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더니 갑자기 3덩어리가 되어 달려온다. 눈 깜빡할 사이다. 마치 꽃밭이 3개의 불덩이로 나누어진 것 같다. 빠르구나. 그 와중에도 김흠춘이 감탄했다. 백제군이 금방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와앗! 백제군을 맞으려는 신라군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기 때문에 천지가 울렸다. 이쪽의 전고(戰鼓)도 더 격렬하게 울렸고 땅은 달리는 말굽 소리로 흔들렸다. 그런데 백제군 쪽은 조용하다. 함성이 안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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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5 16:21

[불멸의 백제] (295) 15장 황산벌 14

북이 울린다. 오전 진시(8시), 신라군이 먼저 움직여 황산벌로 나오고 있다. 앞장선 신라군 선봉군은 기마군 1만, 좌우 끝이 조금 앞으로 나온 반원형 진(陣), 그 중심에 대장군 김흠춘이 5천 기마군을 한 덩어리로 만든 채 거대한 산이 굴러오는 것처럼 다가온다. 넓게 펼쳐진 진(陣)의 폭은 2리(1km), 양 끝에 포진한 1천기씩의 기마군은 시위에 쟁여진 화살촉 같다. 선봉군 뒤로 1리(500m) 거리를 두고 김유신과 대장군 김품일이 따르고 있었는데 병력은 3만, 김유신의 중군(中軍) 2만을 김품일이 좌우로 둘러싸고 나가는 형국이다. 앞이 훤하게 보이는 터라 허점이 보이거나 필요할 때 김품일의 기마군 1만을 기동군으로 응용하려는 것이다. 그 뒤를 후위군 1만이 따른다. 거리는 1리, 5만이 철갑을 겹겹이 입은 것처럼 나아간다. 보기만 해도 압도적이다. 수십 개의 대고(大鼓)가 울리는 데다 기마군의 말굽소리, 그러나 하늘은 맑아서 구름 한 점 없다. 서늘한 날씨, 북소리에 맞춰 속보로 나아가는 신라군의 어깨에 힘이 실렸다. 아직 앞쪽에서 백제군의 반응은 없다. 멀리 15리쯤 앞쪽으로 검은 산맥이 둘러쳐져 있다. 그곳, 3개 산성에 백제군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백제군은 일시에 쳐들어올 것이다. 김흠춘이 앞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앞에 첨병대를 보냈지만 시야가 탁 트여서 3개 산성이 보인다. 산성과는 이제 15리(7km) 정도, 아직 백제군은 기척이 없다. 이쯤 되면 첨병이나 유격군을 보내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 정상이다. 김흠춘의 옆을 따르던 부장(副將) 성진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산성을 비우지 않았을까요? 그럴 리가 있느냐? 김흠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나란히 속보로 전진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40대 중반으로 백제군과 수십 년 전장에서 만난 성진이 대답했다. 계백의 기마군은 모두 왜에서 데려온 왜군입니다. 계백의 영지에서 조련시켜 데려왔다지만 훈련이 덜 되었는데 모릅니다. 용장 밑에 약졸은 없는 법, 적을 가볍게 보지 말라. 김흠춘이 나무랐지만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북은 더 힘차게 울렸고 말발굽 소리는 지진이 일어난 것 같다. 그때 성진이 소리쳤다. 백제군입니다! 고개를 든 김흠춘이 앞쪽 산성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기마군을 보았다. 3개 산성에서 동시에 쏟아져 내려왔기 때문에 햇살에 번득이는 창날이 위압적이다. 온다! 북을! 성진이 소리치자 옆쪽 고수들이 세차게 북을 쳤다. 전투개시의 북이다. 그때 앞쪽을 응시하던 김흠춘이 소리쳤다. 저놈들이 옆으로 비껴간다! 숨을 들이켠 성진이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고 섰다. 과연 그렇다. 백제 기마군은 정면으로 닥쳐오는 것 같다가 옆으로 비껴 달리는 것이다. 거리가 4리(2km) 이상 떨어져 있어서 이쪽은 바라만 볼 뿐이다. 도망치는가요? 옆으로 다가온 아들 반굴이 물었기 때문에 김흠춘이 고개부터 저었다. 아니다. 저놈들이 무력시위를 한다. 그때 옆쪽에서 낮은 탄성이 울렸다. 보라. 이제는 흙먼지가 걷히면서 백제 기마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두 붉은색 갑옷을 걸쳤다. 그래서 불덩이가 움직이는 것 같다. 3개 산성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군은 직선으로 달려오다가 제각기 말머리를 틀어 옆으로 비껴가고 있다. 정연한 움직임이다. 백제 기마군이 황산벌 앞쪽을 붉은 불길로 가로막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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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4 17:17

[불멸의 백제] (294) 15장 황산벌 13

그날 밤 계백이 주둔한 웅치산성으로 좌평 충상이 찾아왔다. 호위군사 셋과 함께 말을 달려온 것이다. 계백은 흥수와 함께 맞았는데 둘을 본 충상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곳에서 함께 죽읍시다. 허, 좌평, 우리는 그대와 함께 죽을 생각이 없네. 흥수가 정색하고 말을 받았다. 청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충상이 계백과 흥수를 번갈아 보았다. 도성은 이미 연임자가 장악하고 있소. 동방과 서방, 남방군은 모두 연임자의 모략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모일 수도 없소. 오직 이곳만 도성을 막고 있을 뿐이오. 대왕께서 무슨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계백이 묻자 충상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길게 숨을 뱉었다. 달솔, 대왕께선 달솔이 좌평 흥수를 유배지에서 빼낸 것에 진노하셨네. 좌평, 잘 오셨습니다. 계백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충상을 보았다. 좌평께선 이곳에 남아 있다가 대왕을 모시지요. 무슨 말인가? 저희들하고 같이 싸우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오. 아니, 그것은 눈을 크게 뜬 충상이 흥수를 보았다. 충상은 충신이다. 충신(忠臣)이라고 해서 다 기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목에 칼을 대면 변절을 하는 충신이 9할은 된다. 충상이 그런 부류다. 연임자가 반역을 하는 줄 뻔히 알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망설이고 회피했다가 이곳에 온 것은 마지막 용기를 낸 셈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흥수의 얼굴에 쓴 웃음이 번져졌다. 이보게 좌평, 죽는 것이 능사가 아닐세. 충상에게 흥수는 선임자인 데다 연상의 어른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수가 연임자의 모함을 받아 귀양을 떠날 때에도 도와주지 못했다.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나 같다. 흥수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연임자가 백제국을 안에서 무너뜨리는 것을 방관하다가 지금은 마지막 용기를 내어서 죽을 자리를 찾아온 셈인가? 그렇습니다. 시선을 내린 충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겁자를 받아주시오. 그때 계백이 밖에 대고 소리쳤다. 하도리 있느냐? 예, 달솔. 기다렸다는 듯이 창밖에서 목소리가 울리더니 하도리가 위사들과 함께 들어섰다. 그 순간 충상의 얼굴이 누렇게 굳어졌다. 계백이 충상에게 말했다. 좌평,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 웅치산성의 감옥에 계시오. 달, 달솔, 왜 이러시는가? 눈을 크게 뜬 충상이 계백을 보았다. 함께 죽도록 해주시게. 달솔. 우리가 떠났을 때 김유신이 이곳 감옥에 갇힌 좌평을 보고 풀어줄 것이오. 아니, 달솔 적인 나에게 잡혀 갇혀져 있다는 것은 곧 우군이라는 표시일터, 김유신이 우대를 해줄 것이오. 달솔, 나는 김유신과 같이 도성으로 가서 대왕을 모시기 바라오. 그때 흥수가 말을 받는다. 좌평, 알겠는가? 이곳을 지난 김유신은 소정방과 함께 도성을 함락시키지 않겠는가? 그러면 대왕은 포로가 되네. 충상은 숨만 쉬었고 흥수가 말했다. 여기서 죽겠다는 용기로 포로가 된 대왕을 모시기 바라네. 그게 달솔의 뜻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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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3 19:36

[불멸의 백제] (293) 15장 황산벌 12

김유신이 황산벌 남쪽 끝에 멈춰 섰을때는 오후 유시(6시) 무렵이다. 북쪽 끝의 산성에 진을 친 백제군과는 20리 거리가 되어서 기마군들이 내달린다면 한식경만에 칼을 부딪칠 거리다. 내일 아침에 바로 돌파한다. 김유신이 진막에 모인 장수들에게 말했다. 장수들이 긴장했고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기마군이 앞장을 서서 전진한다. 백제군이 대항에 올것이나 밀고 나간다. 전법(戰法)이 없다. 밀고 나가다가 백제군이 부딪치면 물리치고 가란 말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발이 흩날리면 눈발을 맞고 가라는 말이나 같다. 이것이 백전노장 김유신의 용병술이다. 그동안 수백번 전투를 치른 김유신이다. 사사건건 세밀하게 적전지시를 하면 오히려 그 지시가 걸림이 되어서 장수들이 제대로 용병(用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만. 김유신이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선봉군은 김흠춘이 맡고 선봉군과 본군의 사이에 유격군을 두되 수장(首將)은 김품일이다. 각자 방심하지 말라. 김품일과 김흠춘은 진골 왕족으로 각각 화랑인 아들 관창과 반굴을 데리고 출전했다. 간단하고 명료한 작전지시가 끝나고 장수들이 물러갔을 때 대장군이며 중군(中軍)의 수장인 김행보가 말했다. 총사령, 계백이 3개 산성에 군사를 배치해놓고 있습니다. 그냥 전군(全軍)을밀고 나가는 것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계백의 기마전술에 유린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유신과 둘만 있는 자리여서 직언을 한 것이다. 김행보의 말을 들은 김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너, 계백이 처자식을 죽이고 왔다는 말을 들었느냐? 예, 신라군에서도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김유신이 흰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계백은 결사의 대형으로 부딪쳐 올 것이다. 그러니 더욱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군사들도 수장(首將)이 처자식을 베어 죽이고 앞장서 나설테니 모두 죽을 각오로 따르겠지. 그렇습니다. 단 한차례의 돌격으로 부숴진다. 김행보의 시선을 받은 김유신이 다시 웃었다. 파도가 한번 철썩, 바위에 부딪치는 것으로 백제군의 돌격은 끝날 것이다. 숨만 들이켠 김행보를 향해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파도는 뭉쳐서 맞는 편이 낫다. 그러고 나면 백제군은 흩어질 것이다. 과연. 죽음을 무릅쓴 돌격은 한번이면 끝난다. 두 번째에는 일어날 기력도 없이 주저앉아서 죽여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습니다. 역시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김행보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법도 없이 뭉쳐서 나가는 이유를 이해한 것이다. 김유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진군해 나가면 3개 산성의 백제군이 일제히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부딪치겠지요. 김행보가 말을 받는다. 아마 선봉군은 절반쯤 돌파하고 나서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그때 유격군이 섬멸하는 것이지. 이것이 김유신의 머릿속에 든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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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8 20:19

[불멸의 백제] (292) 15장 황산벌 11

달솔, 여쭤볼 말씀이 있소. 청을 나갔던 화청이 다가와 계백에게 물었을 때는 사시(10시) 무렵이다. 화청의 뒤에는 윤진이 따르고 있다. 앞에 선 화청이 주춤거리는 것 같더니 계백을 보았다. 달솔, 대답해 주시오. 이 사람아. 뭘 물어야 대답을 할 것 아닌가? 계백이 웃지도 않고 되물었더니 화청이 멋쩍은 듯 수염을 손바닥으로 훑어 내렸다. 뒤에 선 윤진은 아까부터 딴전을 부리고 있다. 화청이 다시 계백을 보았다. 달솔,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날 밤에 토성에 다녀오셨지 않소? 그렇지. 토성이 불에 타 재가 되었다고 들었소. 맞네. 달솔. 뭔가? 화청이 눈을 부릅떴다. 처자를 베어 죽이셨소? 계백이 시선만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윤진이 한 걸음 다가섰다. 벌써 윤진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윤진이 부른다. 달솔. 너는 또 무슨 일이냐? 소문이 다 퍼져 나가서 모두 울었지만 사기가 떨어졌소. 저런. 윤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달솔, 왜 그러셨소? 어깨를 부풀린 윤진이 계백을 쏘아보았다. 장수들도 이곳저곳에 처자식이 있소. 군사들이야 격해져서 죽음을 잊겠지만 장수들은 앞뒤를 재어야 될 것 아닙니까? 처자식도 다 죽였으니 내 차례다 하고 덤비는 장수에게 승산이 있겠습니까? 과연. 계백이 남의 일처럼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옆에 서 있던 화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난 처자식을 하도리의 부장 혼다를 시켜 왜국으로 옮겼어. 지금쯤 구례 포구에서 왜국행 배를 탔을 것이네. 아아. 화청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떠올랐다. 달솔, 잘하셨소. 그래야지요. 윤진도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수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주겠소. 윤진과 화청이 서둘러 청을 나갔을 때 계백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렇다. 처자를 베어 죽이고 배수진을 친 것처럼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지만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하도리의 부장 혼다를 시켜 그날 밤으로 구례 포구로 떠나보낸 후에 토성에 불을 지른 것이다. 잠시 후에 청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다께다가 뛰어 들어왔다. 주군, 신라군이 왔습니다. 다께다가 소리쳐 말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숨결도 고르다. 먼저 기마군이 남쪽 언덕 위에 포진했고 뒤를 선봉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는 25리(12km)가량 됩니다. 오늘 저녁에야 진을 칠 것이다. 계백이 청을 나서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부터 전쟁이 시작되겠지. 주군, 마님과 공주님을 구례 포구로 보내셨다는 말을 듣고 장수들이 모두 기운을 냈습니다. 옆을 따르던 다께다가 말했다. 다께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처자를 죽여 명예를 지키는 장수가 아니다. 그런 명예는 필요 없다. 발을 떼며 계백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명예도 지켜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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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7 20:09

[불멸의 백제] (291) 15장 황산벌 10

웅치산성의 청안, 계백이 황령산성, 장동석성에서 포진하고 있던 화청, 윤진까지 불러 회의를 하고 있다. 오전 진시(8시) 무렵, 둘러앉은 장수들은 10여명, 왜인으로 백제군 장수가 된 하도리와 다께다까지 모였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는 신라군이 황산벌 남쪽 끝에 닿는다. 계백의 표정은 담담하다. 날씨 이야기를 하는 농부 같다. 농부는 날씨가 궂거나 개거나 태연하다. 하늘의 뜻에 일희일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신라군은 사비도성 앞에서 당군(唐軍)과 만나 함께 사비도성을 공격할 계획이라 우리는 신라군을 막고 그동안 남방(南方)이나 서방(西方)군이 모이기를 기다려야 한다. 달솔. 주장(主將) 계백의 자문 역할로 말석에 앉아있던 흥수가 나섰다. 흥수가 어느새 물기가 번진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서방군, 남방군은 모이지 않소. 이미 연임자가 장수들을 교체 한데다가 사기가 떨어져서 오합지졸이요. 마침내 흥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머개를 든 흥수가 계백을 보았다. 달솔, 황산벌에 모인 왜군은 강군(强軍)이요. 달솔을 위해서 모두 목숨을 바칠 것이오. 허나. 흥수의 시선이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분하오. 대백제가 마지막 국운(國運)을 왜군 5천에 걸고 있다니 내가 죽어서도 눈이 감기지 않을 것 같소. 그때 윤진이 나섰다. 어깨를 치켜세운 윤진이 흥수를 노려보았다. 좌평, 우리는 백제 대왕을 위하여 여기 온 것이 아니오. 달솔 계백과 함께 죽으려고 왔소. 다른 건 상관하지 않소. 윤진의 두 눈도 번들거렸다. 그때 화청이 말을 받았다. 나도 그렇소. 보시오. 화청이 손을 들더니 둘러앉은 장수들을 가리키고 나서 제 가슴을 쳤다. 나는 당(唐)고조 이연이가 태원유수로 있을 때 휘하 장수였다가 탈주하여 대백제의 장수가 되었으며... 숨을 고른 화청이 말을 이었다. 여기 앉은 윤진은 본국(本國) 출신이나 달솔은 백제 담로인 연남군에서 왔소. 화청이 하도리와 다께다를 가리켰다. 하도리는 왜인이었다가 일찍 귀화하여 백제 장수가 되었고 다께다는 왜국 영지의 장수요. 몸을 돌린 화청이 흥수를 보았다. 좌평, 달솔 계백이 지휘하는 군사가 바로 대백제의 얼굴이요. 과연. 어깨를 부풀린 흥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웃는다. 흥수가 고개를 들고 계백을 보았다. 달솔, 내가 늙었으나 신라 장수 한 둘은 벨 수가 있소. 나도 앞장을 설 테니 군사를 주시오. 잠자코 듣기만 하던 계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라군이 왜국 기마군을 전부터 얕보고 있었소. 거기에다 소정방과 합류하려고 서두르고 있으니 헛점이 많을 것이오. 계백이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은 일당백의 용사다. 그러나 자만하면 안 된다. 장수들이 숙연해졌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명심해라. 개죽음을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목적은 대백제의 존속이다. 계백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소멸된다면 신라는 인심 쓰듯이 황산벌의 이야기를 한 줄 남겨둘 것이다. 열 번 싸워 이기다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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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6 19:58

[불멸의 백제] (290) 15장 황산벌 9

계백이 황산벌 위쪽 3개 산성(山城)에 입성했습니다. 달솔 해수가 보고하자 청 안에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의자도 침묵한 채 해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 전 동방방령 사택부한테 보냈던 전령이 돌아와 보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택부는 갑자기 병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다. 적이 눈앞에 왔는데 왕의 명을 받은 장수가 병이 났다고 드러누운 꼴이니 기가 막힐 일이 일어났지만 이제 분개하는 신하도 없다. 그때 내신좌평 연임자가 입을 열었다. 계백은 유배되었던 흥수와 함께 있습니다. 더구나 대왕이 부르시는데도 도성에 오지 않고 있는 데다 부르러 간 덕솔 하성까지 베어 죽였습니다. 의자는 듣기만 했다. 덕솔을 죽인 것은 함께 내려갔던 계백의 사신이었지만 연임자는 그렇게 말을 만들었다. 대왕, 당군(唐軍)이 서쪽에서 나흘 거리로 다가오는 중이고 신라군은 동쪽에서 역시 나흘 거리에 있습니다. 연임자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모두 성충, 흥수, 윤충, 의직 등 반역의 무리가 대왕을 부추겨 방심하시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권력을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서 당과 신라가 연합하는데 대비하지도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남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울 때 자신의 행적을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의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재위 20년, 나이 40이 넘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제 60대다. 백관의 시선을 받은 의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40여 년간 수십 번 전장에 나갔지만 단 한 번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한 적이 없다. 의자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오명을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할까 두렵다. 대왕께서는 영웅이십니다. 연임자가 바로 소리치듯 말했다. 곧 동방군(東方軍)과 서방군(西方軍), 그리고 남방군(南方軍)이 이어서 올 터이니 그동안 웅진성으로 몸을 피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청 안이 술렁거렸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동방군 3만은 지금 사택부가 거느린 채 움직이지 않았고 남방방령 의직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그래서 지금 방좌인 은솔 해무가 남방군 3만을 지휘하고 있지만 병력이 분산되어서 집결시키려면 열흘은 더 걸릴 것이다. 서방군은 달솔 상영의 지휘하에 백강(白江)으로 출동했다가 당군(唐軍)을 놓치고 나서 뒤를 쫓는 형국이 되어있다. 그러나 4만 병력으로 중과부적인 데다 기세가 떨어졌다. 당군은 전투병만 13만인 것이다. 의자가 고개를 들고 위쪽을 보았다. 모두 내 탓이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구나. 그때 좌평 충상이 나섰다. 충상은 윤충 대신 병관좌평을 맡고 있었는데 50대 중반이다. 충상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의자를 보았다. 눈에 물기가 가득 차서 그렇다. 대왕, 소신이 황산벌로 가서 계백과 함께 있겠습니다. 의자의 시선을 받은 충상이 말을 이었다. 황산벌에서 40리 거리의 토성에 계백의 처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충상이 똑바로 의자를 보았다. 어젯밤 그 토성에 불이 났고 하인까지 흩어져 빈 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의자가 마른 목소리로 묻자 충상이 외면하고 대답했다. 계백이 처자를 죽이고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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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5 20:16

[불멸의 백제] (289) 15장 황산벌 8

계백이 황산벌에 포진했어? 놀란 김유신이 목소리를 높이더니 곧 탄식했다. 늦었구나. 총사령, 계백은 왜병 5천기를 끌고 왔을 뿐입니다. 김품일이 다가서며 위로했다. 한식경이면 흩트리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내일 오후에는 황산벌에 닿습니다. 으음, 선봉대를 먼저 보내 그쪽 산성을 장악해두는 건데. 김유신이 입맛을 다셨다. 왜군 기마군의 진군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이야. 오후 술시(8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다. 이곳은 황산벌에서 2백여리(100km) 떨어진 무릉군의 벌판, 백제 동방(東方) 지역이지만 백제군은 보이지 않는다. 동방 방령 사택부가 1백여리 떨어진 군창성 위쪽에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숙영하고 있지만 이미 신라군과 내통하는 사이다. 그동안 두 번이나 전령이 오갔기 때문에 오히려 우군(友軍) 같다. 반역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고금 역사에 기록된 반역자가 스스로 반역이라고 느낀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이 온갖 이유를 붙여 합리화시켜놓기 때문에 나중에야 평가된다. 지금 사택부가, 연임자가 그렇다. 김유신의 진막 안이다. 고개를 든 김유신이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웃음 띤 얼굴이어서 장수들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김유신이 물었다. 백제는 당장 운용할 수 있는 군사가 왜병 5천뿐이다. 백제왕 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과연, 그렇습니다. 김흠춘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김흠춘은 김품일과 더불어 김유신의 최측근으로 대장군이다. 진골 왕족이기도 하다. 몇 달 전만 해도 동, 서, 남, 북 중의 5방(方)에서 20만 군사를 모을 수가 있었지요. 20만뿐입니까? 김품일이 나섰다. 신라, 고구려, 백제, 3국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해외 영지인 담로가 22곳이나 되어서 백만 대군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내부(內部)에서 무너져 버리다니 우습지 않은가? 이제는 김유신이 정색하고 장수들을 보았다. 반면교사다. 너희들도 명심해라. 자만하면 필패한다. 백제왕 의자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신라의 성 40여개를 빼앗았다. 그 후로 18년, 신라는 갈수록 위축되었고 백제는 갈수록 교만해졌다. 김유신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이제 신라는 선덕, 진덕 두 여왕이 죽고 나서 김춘추가 왕이 되었다. 대야성에서 김춘추는 사위 김품석과 딸을 잃었다. 그야말로 절치부심, 김춘추는 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찾아가 원병을 구걸했고 당은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가 읍소했다. 아들 김법민을 당왕 이치의 시종으로까지 바친 김춘추의 노력이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다. 교만해진 백제 내부를 대성8족의 반역으로 이끈 김춘추의 외교술이 결실을 본 것이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이제 내일 황산벌에 닿고, 그다음 날은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나서 당군(唐軍)과 만나게 된다. 김유신의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흐려졌다. 온갖 감회가 밀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왕이 된 김춘추와 수십 년간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백제 멸망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계백군만 물리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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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4 18:35

[불멸의 백제] (288) 15장 황산벌 7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3개의 성(城)이 있으니 장동석성(壯洞石城), 웅치산성(熊峙山城), 황령토성(黃嶺土城)이다. 계백은 이 3성을 연결하여 3영(三營)의 전술로 신라군을 맞았다. 신라군을 분산 격파하려는 기세다. 술시(오후 8시) 무렵, 장동석성에 화청, 황령토성에는 윤진을 주장(主將)으로 두고 각각 1500기마군을 배치 시킨 후에 중앙의 웅치산성에는 계백이 흥수와 다께다, 하도리와 함께 2천 기마군으로 입성했다. 각각의 성에는 2백여 명 정도의 보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계백의 기마군이 입성하자 반색을 하고 맞았다. 소식이 빨라서 동방방령 사택부가 배신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계백의 기마군을 보더니 죽은 부모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반겼다. 사기가 충천해서 기세는 일당백이 되었다. 신라군은 아직 2백여리 밖입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계백이 말했을 때는 해시(오후 10시)가 되었을 무렵이다. 저녁을 먹고 지친 군사들은 잠이 들었다. 계백이 흥수에게 말을 이었다. 좌평, 내 처자가 이곳에서 40리(20㎞) 거리의 토성에 와 있소. 아, 그렇지. 흥수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흥수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계백에게 물었다. 달솔, 처자를 만나고 오겠는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소. 그렇지. 가서 보고 오게.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작별 인사나 하고 오겠소. 흥수는 대답하지 않았고 계백이 몸을 돌렸다. 어둠 속을 30여기의 기마군이 서쪽으로 매닫고 있다. 거친 황야였지만 어둠에 익숙한 전마(戰馬)는 거침없이 질주했고 마상의 기수 또한 말과 일체가 되어있다. 이윽고 기마대가 멈춰선 곳은 토성의 마당이다. 어느덧 마당에 횃불이 서너개 켜졌고 저택의 마루에도 등이 걸렸다. 먼저 달려간 첨병이 기별을 넣은 터라 마루에 서 있던 계백의 처 고화가 내려왔다. 놀랍고 반가운 고화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져 있다. 그리고 고화의 뒤를 따라 계백의 딸 선(善)이 내려왔다. 여덟 살, 눈방울이 또렷한 선이 계백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늦었다. 계백이 짧게 말하고는 고화와 선을 양팔로 당겨 안았다. 마당에서 안은 것이다. 둘러섰던 하인, 시녀들은 잠깐 놀랐지만 모두 처연한 표정이 되었다. 계백이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늦었다는 말이 밤이 깊었다는 말도 되었고 시기가 늦었다는 말도 되었다. 자시(밤 12시)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계백이 양팔에 고화와 선을 감싸 안은 채 마루에 올라 청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선이 계백을 향해 절을 했다. 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것이다. 고화가 시켰을 것이다. 많이 컸구나. 흐려진 눈으로 선을 본 계백의 시선이 고화에게로 옮겨졌다. 밖에서 말굽 소리와 장식이 철거덕거리는 금속 소리, 수군대는 군사들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그때 고화가 입을 열었다. 곧 김유신군(軍)이 온다고 들었습니다. 계백이 시선만 주었고 고화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와 주셔서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선(善)이 아비의 모습을 가슴에 담고 가겠습니다. 그때 계백이 밖에 대고 소리쳤다. 다께다, 거기 있느냐? 부하 장수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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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1 20:31

[불멸의 백제] (287) 15장 황산벌 6

5천 기마군이 질풍처럼 달리고 있다. 제각기 말 한필씩을 끌고 달리는 터라 말 1만필이 달려가는 셈이다. 계백도 예외가 아니다. 중군(中軍)에서 말 한필을 뒤에 매달고 달린다. 오후 미시(2시) 무렵, 태양은 중천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초가을의 햇살은 따갑다. 자욱한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고 마른 땅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계백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고는 앞을 보았다. 이곳은 남방(南方)을 지나 중방(中方)으로 들어가는 경계선이다. 목적지인 황산벌까지는 150리(75km), 오후 술시(8시)까지는 전군(全軍)이 닿을 것이었다. 달솔, 선봉대는 유시(6시)쯤 황산벌에 닿을 것입니다! 옆으로 다가온 화청이 소리쳐 말했다. 화청의 흰 수염이 맞바람을 받아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수염이 짙어서 보기가 좋았기 때문에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장군, 수염이 장관이오. 그렇습니까? 김유신의 수염보다 낫지요. 화청이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웃었다. 붉은 입안에 서너개의 빠진 이가 드러났다. 화청은 김유신과 동갑이다. 66세인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수염이 숱이 적은데다가 이가 거의 다 빠져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화청이 다시 소리쳤다. 우리가 먼저 황산벌에 닿겠습니다. 신라군은 내일 오후에나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북상하면서 수시로 동쪽으로 탐색병을 보내 신라군의 동향을 보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軍)은 기마군 1만에 보군 4만이다. 보군과 함께 움직이는 터라 하루에 150리밖에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계백의 기마군은 각각 예비마 1필을 끄는데다 병참군도 말을 타고 따르는 것이다. 하루에 400리(200km)를 주파한다. 신라군보다 거의 3배나 빠른 기동력이다. 그때 앞쪽에서 전령이 달려왔다. 전령 깃발을 든 기마군 둘 뒤로 무관 복색의 기마인 둘이 따르고 있다. 계백이 달리면서 유심히 앞쪽을 보았다. 그때 계백의 뒤를 따르던 하도리가 소리쳤다, 도성으로 갔던 장덕 한성입니다! 그렇다. 한성이다. 부장(副將) 계덕 천용을 먼저 도망치게 한 다음에 도성에 남았던 한성이다. 그때 전령과 함께 한성이 달려왔다. 달솔. 오, 장덕! 살아왔구나! 달리면서 계백이 소리쳤다. 그때 옆으로 흥수까지 다가왔고 말을 속보로 걸리면서 계백이 물었다. 어떻게 도망쳐 왔느냐! 도성 앞에서 연임자가 보낸 놈을 칼로 베어 죽이고 달려오는 길입니다. 한성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놈들은 저한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놈들이 우두머리르 잃고 당황하는 사이에 도망쳐 온 것입니다! 장하다! 달솔, 도성 안에서 제가 들은 소문이 있소! 이제 계백과 한성을 중심으로 장수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달려가고 있다. 한성이 소리쳐 말했다. 동방방령 사택부에게 3만 기마군을 끌고 황산벌로 나가라고 대왕께서 지시했지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 것이야! 흥수가 핏발 선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백제 조정은 이미 연임자 일당에게 다 장악되었다. 대왕은 허수아비가 되어 있을 뿐이야! 예상한 일이었지만 흥수가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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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0 21:25

[불멸의 백제] (286) 15장 황산벌 5

구례성에 상륙한 계백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대장군 김품일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김품일은 어젯밤 연임자가 보낸 밀사를 만난 것이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신라군은 사비도성을 향해 곧장 진군하는 중이다. 이제 탄현도 군사 한 명 상하지 않고 건넜으니 백제의 왕성인 사비도성까지는 탄탄대로가 뻗어있는 셈이다. 그래서 전군(全軍)의 사기는 충천했다. 군사들의 발걸음에도 그것이 나타나 있다. 이제 사비도성까지는 2백여 리, 이틀이면 닿는다. 당의 총지휘관인 신구도행군도총관 소정방과 7월 13일에 사비성 앞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시간이 넉넉하다. 그때 김유신 오른쪽에서 말을 타고 따르던 김흠춘이 혼잣소리처럼 물었다. 황산벌은 비어 있겠지요? 당연하지요. 김유신 왼쪽의 김품일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의자가 동방방령 사택부에게 황산벌로 나가라고 지금쯤 지시했을 것이오. 김유신은 듣기만 했고 김품일이 짧게 웃었다. 사택부는 그러겠다고 대답은 해놓고 질질 끌 것이오. 휘하의 3만 군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업자득이지. 김흠춘이 따라 웃었다. 의자의 아비 서동이가 대성8족을 일거에 내쫓고 의자가 그 뒤를 따라 신참들을 등용한 대가를 받는 것이지. 백제에 대성8족의 뿌리가 깊은 것을 간과했던 거요. 의자의 부친 무왕(武王)은 서동(薯童)으로 불리던 청년 시절에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을 했고 백제로 데려왔다. 이것이 신라와 백제에 알려진 서동설화이나 사실은 다르다. 그 내막을 김유신도 알고 김품일, 김흥춘도 아는 것이다. 진평왕은 재위 54년을 했으니 장수를 했다. 진평왕은 딸 김덕만과 선화를 두었는데 김덕만은 선덕여왕이 되었고 선화는 곧 백제 무왕(武王)의 왕비이며 의자의 모친이다. 잠깐 김유신과 김품일, 김흠춘은 입을 다물었다. 진평왕이 선화공주를 백제 무왕의 왕비로 보낸 이유는 신라와의 합병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은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비가 됨으로써 신라와 백제의 통합을 기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가 신라, 백제 양국의 통합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안 의자는 의욕을 부렸지만 신라측 진골 왕족들의 방해에 무산되었다. 진평왕 이후로 신라는 성골(聖骨) 출신의 남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김덕만을 여왕으로 추대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선덕여왕이 죽자 이번에는 사촌 여동생인 김승만(金勝曼)을 진덕여왕으로 추대했다가 어제 마침내 김춘추가 진골 왕족으로 대망의 신라왕이 되었다. 그때 김유신이 입을 열었다. 계백이 이끌고 온 기마군은 모두 왜군 아닌가? 그렇습니다. 김품일이 대답했다. 계백이 영주로 있던 왜국에서 추려온 왜병이지요. 왜병은 기마전술이나 기마술이 뒤떨어져서 상대가 안 됩니다. 김흠춘이 웃음 띤 얼굴로 김유신을 보았다. 아직 아이 수준이지요. 그때 김유신이 정색하고 말했다. 계백은 백제의 장수지 왕의 신하가 아니다. 둘은 입을 다물었고 김유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을 보았다. 계백이 지금 북상해 올 것이다. 김유신의 나이는 이제 66세이니 백전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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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1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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