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주민의 4할은 될 것 같네.”
흥수가 다가선 계백에게 말했다. 오전 진시(8시) 무렵 황산벌에서 남진(南進)한 백제군(軍)의 진막 안으로 흥수가 찾아온 것이다.
“배를 타고 남하하는 백성이 1할 정도, 나머지는 육로로 이동할 것이네.”
그동안 흥수는 각 성(城)과 현에 전령을 보내 이주민을 모집했던 것이다. 계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민들은 구례성에서 왜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앞에 앉은 흥수가 길게 숨을 뱉었다.
“신라가 백제 땅을 차지하게 되면 이곳은 모두 신라 귀족들의 장원이 되고 백제 주민들은 농노가 되겠지. 그러나 조상이 묻힌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네.”
“왜국에서 한 달쯤 후에는 5백여 척의 배가 올 것입니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쉴 새 없이 주민들을 옮겨야지요.”
“김유신이 약속을 했지만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네.”
흥수가 여윈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내가 남장(南方)의 각 성에 전령을 보냈으니 군사들이 모이겠지만 당군(唐軍)까지 막기는 역부족이야. 서둘러야겠네.”
“그래야지요.”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대이동이다. 백제 유민은 이제 왜국으로 건너간다.
백제왕 의자가 계백이 보낸 전령을 만났을 때는 신시(10시) 무렵이다. 이미 신라군의 황산벌 돌파를 보고받고 있었던 터라 의자의 얼굴은 침통했다. 전령은 12품 문독 벼슬의 군관이다.
“대왕, 달솔 계백은 좌평 흥수와 함께 주민들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습니다.”
“남하한다고?”
의자가 묻자 전령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예, 남쪽에서 배로 왜국으로 이주할 예정입니다.”
“달솔 상영도 따라갔느냐?”
“계백이 감옥에 가둬놓았으니 김유신군이 진입해서 포로로 잡았을 것입니다.”
청 안에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미 신라군은 하루 거리였고 당군은 반나절 거리로 다가왔다. 그때 의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백제가 왜국으로 옮겨가는가?”
김유신이 앞에 선 내신좌평 연임자와 동방방령 달솔 사택부를 보았다. 진군 중이어서 김유신은 땅바닥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고 주위에 장수들이 둘러서 있다. 사택부 뒤쪽에 황산벌의 웅치산성 감옥에서 풀어내온 달솔 상영도 서있다. 김유신이 물었다.
“사비도성에서 도망쳐 온 것이냐?”
“예, 대감.”
연임자가 허리를 굽히면서 대답했다.
“이제 소인의 소임도 마친 것 같아서 빠져나왔습니다.”
김유신의 시선을 받은 연임자가 웃었다.
“백제에서의 역할이 끝났습니다. 대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김유신이 옆에 선 김품일에게 말했다.
“신라에서의 역할도 끝난 저놈들을 이곳에서 베어 죽이고 떠난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유신이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잘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개보다도 못 한 인간들이다.”
계백이 다가오는 아내 고화와 딸 선(善)을 보았다. 남하하는 길가에서 고화와 계백 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에서 내린 계백이 다가가자 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구름 한 점 떠있지 않은 맑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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